55, 내가 돌아왔다! (2)
남천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성소의 주인이 되었을 때와 상황이 흡사했다.
‘그래, 그래서 뭐?’
하나 재이는 대답이 없다.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뭐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니냐? 여보세요! 저기요.’
요즘 조금이나마 친절해졌다고 생각했더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했다.
“내가 더러워서라도 레벨을 올리던가 해야지.”
남천휘는 침상에 널브러졌다.
‘일단 하나씩 차근차근 하다보면 되겠지.’
가장 먼저 천수련의 탈각진체법을 통해 통찰을 얻어야 했다. 그 후 몽산의 대두동에서 개인적으로 수련에 매진할 요량이다.
단양자와 남추의 기억과 이어지는 유선관은 그 후에야 찾아볼 수 있을 터였다.
‘저녁까지 그냥 쉬기만 하는 건 좀 그런데…….’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정리하면서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낮이다.
남천휘는 부러진 도를 보다가 아직 확인하지 않은 영상을 떠올렸다.
‘그거나 펼쳐봐.’
재이가 반응했다.
《칠야와 창월에 깃든 영상이 재생됩니다.》
아주 이런 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빠르지.
남천휘는 자세를 편안히 했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는 순간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다시 빛이 스며들었을 때 온 세상은 눈으로 가득했다.
이름 모를 설산의 어딘가.
부쩍 늙은 남추가 지팡이를 짚은 채 나갔다.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등에 메고 있던 보따리를 풀었다.
‘칠야와 창월!’
쌍도는 이미 부러진 후였다.
“강기를 베는 도가 강기에 잘리다니. 이 또한 쓰임이 다했다는 하늘의 뜻이던가?”
남추는 독문병기를 잃었음에도 후련한 표정이다.
“어르신! 이대로 낙향하실 겁니까?”
이건 또 누구야?
남천휘는 화면을 돌려 등 뒤를 쳐다봤다.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씩씩 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남추와 쌍도를 번갈아보며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결심을 하시는 순간 만금의 재화와 지고의 권력을 얻으실 수 있잖습니까. 한데 굳이 낙향하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가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줄 아는가?”
“또 선문답입니까? 저는 전진교도가 아닙니다.”
남천휘는 남추를 몰아붙이는 청년을 보며 주먹질을 했다.
‘이 새끼가! 할아버지한테 말버릇 하고는.’
하나 남추는 청년의 외침을 귓등으로 흘렸다.
일견하기에도 청년이 억지로 남추를 쫓아다니는 모양새가 아닌가.
남추는 절벽에 걸린 잔도를 앞두고 걸음을 멈췄다.
“이걸 들고 건너는 건 무리인가?”
그는 나직이 혼잣말을 읊조리더니 대뜸 보따리를 절벽 아래로 내던지는 것이 아닌가.
쉬이이이익!
칼바람에 휘말린 보따리가 찢기듯 풀렸다.
그리고 부러진 칠야와 창월은 협곡이 만들어낸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어, 어르신!”
하나 남추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잔도(棧道)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위태로울지언정 물러서지 않은 채 잔도 너머로 향했다.
“크흑!”
청년은 잠시 남추가 사라진 곳과 협곡을 번갈아 응시했다.
“저것만 있어도 차기 가주 자리는 내 것인데…….”
그는 호흡을 가다듬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황보세가의 가주가 되는 거다! 이 정도의 시련은 이겨낼 수 있어야 자격이 있을 터!”
그러더니 얼어붙은 넝쿨을 한데 모아 허리에 감았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협곡 아래로 사라지는 순간 시간이 물살에 휘말린 것처럼 빠르게 흘렀다.
해와 달이 서너 차례 뒤바뀐 후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푹 젖은 옷과 시퍼런 얼굴.
추위에 떨면서도 손에 쥐고 있는 칠야와 창월을 더욱 강하게 움켜쥘 뿐이다.
“이걸 고쳐서 내 것으로 삼겠다!”
눈보라가 몰아쳤다.
청년도 감췄고, 설산마저 눈보라에 휘말린 채 온 세상이 단색으로 물들었다.
검게 물든 세상이 빛과 함께 폭발했다.
“아!”
남천휘는 탄성과 함께 눈을 떴다.
이제야 부러진 창월과 칠야가 어떻게 황보세가를 통해 등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 창월과 칠야 정도 되는 기병을 손쉽게 고치는 건 불가능했다.
결곡 골동품으로 지금까지 내려왔을 터였다.
남천휘는 청년을 떠올리며 짜증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뭐야? 황보세가가 우리 종이었냐?”
종이든, 제자든.
남추의 꽁무니를 쫓아다닌 건 사실이다.
마지막에는 도둑질까지 했고.
남천휘는 기고만장하던 황보장천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뭣도 아닌 게 까불기는.”
이럴 줄 알았으면 엉덩이라도 한 번 걷어 차줄 것 그랬다. 하나 풀 죽은 강아지처럼 돌아가던 녀석을 떠올리니 한순간 마음이 유해졌다.
특급 강호인이 되어야 할 자신은 경극으로 치자면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한낱 조연 일호 따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다.
‘어디 예비 특급 강호인의 현재 상태를 보자꾸나.’
기분 좋게 상태창을 펼쳤다.
《남천휘(南天輝)》
- 소속 : 대두동(大頭洞)
- 호칭 : 추억팔이
- 별호 : 용봉삼협 中 귀협
- 등급 : 78
- VIP : 3등급(잔여 점수 : 1640)
- 성소 포인트 : 23100
- 저항 수치
※ 냉기 : 148, 독기 : 27.
근력(筋力) : 450 민첩(敏捷) : 450
체력(體力) : 450 지혜(知慧) : 414
내공(內功) : 1450.
- 미 배분 능력치(+0)
▼ 능력 ▼ 장비 ▼ 성취
▼ 특기 ▼ 비책 ▼ 인맥
새로운 별호에도 기본 능력이 붙어 있었다.
음모나 귀계를 꾸밀 때 일시적으로 이 할 이상의 지혜 수치가 상승했다. 이러다 군사에 관련된 특기라도 얻는 게 아닐까 우려스럽다.
다행히 용봉삼협에도 추가 공능이 존재했다.
삼협과 함께 싸울 때 공방의 수치가 상승한단다. 두 명일 때 10%, 모두가 모인다면 30%의 상승폭을 지녔다. 앞으로 또 언제 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도움이 될 공능이었다.
‘그나저나 성소 포인트는 엄청 많이 모였네.’
대화동과 대두동의 군사들, 또는 군사가 열심히 성소를 돌리고 있는 듯했다.
조만간 성소를 찾아가 수련에 매진할 계획이다.
지난 번 성소의 명령 목록을 확인했을 때 영기를 집중시켜 경험치 상승을 꾀하는 효과가 있지 않았던가.
그것만 활용해도 100레벨을 넘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한껏 모인 포인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총합으로는 더 이상 보상이 없는 건가?’
능력 수치 총합이 일천을 넘겼을 때 보상품이 지급됐다. 하나 그 후 능력치 총합을 헤아리는 퀘스트는 발동하지 않았다. 재이에게 물어봐도 확인할 수 없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VIP 등급이다.
100 레벨에 열린다는 4등급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포인트를 모아야 했다.
‘당분간 할 일만 제대로 해도 어렵지 않을 듯한데…….’
그가 다시 한 번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하는 순간 처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공자, 소혜에요.”
소혜의 부드럽고, 조신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녀는 남천휘가 사색에 잠겼을 때 빨랫감을 안고 들어섰고, 자고 있을 때 청소를 하겠다며 난입하기 일쑤였다. 그런 아이가 갑작스레 점잖을 떠니 이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남천휘는 창밖을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그럼 그렇지.’
소혜의 뒤에는 천수련이 뒷짐을 지고 있었다.
쾅!
남천휘는 문이 부서져라 열어젖혔다.
“왜?”
“천 소저께서 뵙기를 청하세요.”
이 녀석이 겨울 예절 학당이라도 다녀왔나?
갑자기 이상한 말투를 쓰네.
무엇보다 외모가 사람의 전부는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나도 외모 서열은 상위 2%라고!’
슬쩍 무균실이 발동했을 때의 서열을 중얼거렸다.
아니나다를까 잠자코 있던 재이가 잽싸게 알림을 울리며 12%라고 정정을 해줬다.
‘나쁜 것, 나쁜 계집애들.’
천수련이 중재를 하고 나섰다.
“제가 소혜에게 부탁을 했어요. 잠시 시간 좀 내줘요.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옷 입고 나올게. 그쪽으로 가면 연무장이야.”
천수련은 고개를 까딱인 후 연무장 쪽으로 향했다.
소혜가 따라 들어왔다.
“너는 왜 와?”
남천휘의 시큰둥한 한 마디에 소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공자 수발을 들어야지요.”
“천수련하고 친자매처럼 어울리더니 이제 와서 무슨 수발을 들어.”
하나 소혜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다.
“당연히 제가 돌봐드려야지요. 공자께서 처음으로 집에 데리고 오신 소저잖아요.”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그거 무슨 의미냐?”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요.”
“그러니까 나랑 개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지. 그래서 네가 아가씨 대우를?”
소혜도 이쯤 되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나 보다.
“아닌가요?”
“너는 소문도 못 들었냐? 백협하고 화협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잖아.”
남천휘의 타박에 소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그걸 제가 어찌 알아요. 저야 공자 소식만 챙겨 듣는 걸요.”
아이고, 이제야 기특한 소리를 하네.
남천휘는 소혜의 찰떡같은 볼을 잡아당겼다.
동그란 눈에 기다란 입을 보니 이제야 그가 아는 개구리다웠다.
“자식, 좋았어. 옷 입는 것 좀 도와다오.”
남천휘는 오랜만에 곡부남가의 무복을 걸쳤다.
소혜의 능력은 가사를 전담할 때 빛을 발휘했다.
팔을 슬쩍 들었다고 놓으니 어느새 멋들어진 무복이 몸에 감겨 있지 않은가.
“그런데 개똥이가 뭐예요?”
남천휘는 기분 좋은 상태에서 흔쾌히 개똥이의 유래를 알려줬다.
“아, 그렇군요.”
“저녁 연회까지 돌아올 테니까 너도 쉬고 있어.”
소혜는 고개를 꾸벅인 후 남천휘를 배웅했다.
한데 남천휘는 연무장으로 향하던 중 눈을 가늘게 떴다. 한껏 상승한 내공과 전음, 그리고 천성혈법으로 인해 기감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소혜의 중얼거림이 귓가를 스쳐갔다.
“……주제에. 쳇!”
남천휘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소혜는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마치 못미더운 사람을 떠나보내듯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개똥이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잘 못 들었나?’
남천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에 들어서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아.’
의아함이라는 안개가 천수련이라는 바람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그만큼 연무장 중앙에 서있는 천수련의 외모는 독보적이었다.
‘입만 안 열면 진짜 사람 홀리기 딱 좋은 외모인데 말이지.’
백치미가 있는가 싶으면 협객의 고집이 가득했다.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건 물론이고,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묘한 화법을 구사하지 않던가. 게다가 레벨은 세 자리에 검후의 후손이니 고강한 무공은 기본이다. 그러니 어지간한 사내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을 것이 분명했다.
남천휘는 진저리를 쳤다.
‘잘못 걸리면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통찰만 빼먹는 거다.
게다가 잠시였지만, 연하연의 그렁그렁하던 눈망울 또한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래서 첫 여자가 중요한가 보다.
‘연 소저, 잘 지내지. 봉황곡은... 젠장!’
날을 잡아 하오문에 물어봐야겠다.
거금을 안겨주면 봉황곡의 근황이라도 알아오겠지.
“크흠.”
남천휘는 연하연을 잠시 마음 한쪽에 미뤄둔 채 천수련에게 다가갔다.
“아! 왔어요.”
천수련은 귀밑머리를 정리하며 빙긋 웃었다.
“탈각진체법에 대하여 알려줄 것이 있어요.”
남천휘는 그제야 천수련의 청초한 외모에서 시선을 돌렸다. 조금만 방심해도 마음이 콩밭으로 가니 불굴이라도 동원해야 할 분위기다.
“따로 중요한 수련법이 있어?”
“탈각진체법의 수련은 간단해요. 아니, 어쩌면 남 소협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어요.”
천수련은 진지했다.
남천휘 역시 진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타인과 달리 시스템을 활용하여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며,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천수련의 말처럼 탈각진체법의 요체를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눈동자의 흔들림과 호흡의 깊이, 거기에 더하여 근육과 힘줄의 미세한 움직임을 한눈에 담는 게다. 그로 인해 상대의 투로(套路)를 예상하는 방식일 터였다.
‘그게 말이야 쉽지.’
하나 천수련에게는 검후에게만 전해지는 비전이 섞여 있으리라. 남천휘가 얻어내야 할 것이 바로 그 비전이었다.
천수련은 진중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시작은 나를 아는 것입니다.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충분히 알고 있어.”
이미 특기 ‘집중’과 ‘심상’을 통해 몇 번이나 스스로를 관조하지 않았던가. 하나 그것을 알 리 없는 천수련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탈각하여 진체를 깨우쳐야 합니다. 농담이 아니라고요. 탈각은 관조와 성찰을 이뤄야 합니다. 불가의 고승이라고 해도 쉽지 않아요.”
남천휘는 천수련을 빤히 쳐다봤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천수련 역시 남천휘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했다.
맑은 눈동자가 서로를 비춘다.
태생적으로 천수련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하나 여전히 단호했다.
“고집을 피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내기할래?”
천수련의 고운 아미가 일그러졌다.
“대신 탈각에 대한 평가는 제가 합니다.”
“좋아. 그런데 존대나 평대, 둘 중 하나만 해줄래?”
남천휘의 웃음기 섞인 한 마디에 천수련은 헛기침을 했다.
“크흠! 저도 누구를 가르치는 건 처음이란 말이에요! 어쨌든 통기로 판단할 겁니다.”
통기(通氣)란 몸이 닿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내력을 흘려내는 행위였다. 말로 초식을 겨룰 때 논검을 하듯 내공의 운용을 겨룰 때 통기를 활용했다.
“좋아.”
남천휘는 좌정을 한 후 빠르게 말을 이었다.
“뭐든지 시키는 건 다 하는 거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천수련은 반박하려다 호흡을 조절했다.
‘남 소협처럼 가벼운 성정의 무인은 탈각 자체가 불가능해. 그래, 이 기회에 진짜 정중동이 뭔지를 알려주는 거야!’
그녀는 알 수 없는 의무감에 휩싸인 채 손을 뻗었다. 하나 그녀는 손을 뻗기만 했을 뿐 내력을 운용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봐야 할 터였다.
‘맙소사!’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낄낄 거리던 남천휘는 돌이라도 된 것처럼 기척조차 흘리지 않았다.
완벽한 탈각의 자세가 아닌가.
“와, 완벽해! 멋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