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함께 할 때 우리는.
52, 함께 할 때 우리는.
서산노옹의 흔들리던 눈빛이 제빛을 찾았다.
남천휘의 전음에 놀라기도 했고, 그의 농담에 긴장이 풀린 것 또한 사실이다.
“크흠.”
서산노옹은 평소의 신색을 유지한 채 헛기침을 했다. 하나 표정이 밝아졌다고 해서 속마음까지 편한 건 아니었다.
본래 공명정대한 사람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러니 속내를 숨길 이유가 없고, 백주대낮에 활보하듯 거침이 없었다.
한데 갑작스럽게 연기를 하려니 편할 리 만무했다.
그런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지켜보는 남천휘가 있었다.
[왕 대협은 우리 편입니다. 그런데 부탁했던 것보다 심하네요. 나중에 제가 혼내주겠습니다. 같은 편이니까 편하게 시작하시지요.]
서산노옹은 왕대만을 가리켰다.
그리고 회견을 하듯 능숙하게 되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일양에서 온 왕 모라고 합니다.”
“허허, 일양도 왕 대협이시군. 그대의 도법이 일절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네.”
왕대만은 포권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강호 동도들이 친분 삼아 붙여준 별호일 뿐입니다. 청백과 공명의 상징인 서산노옹께 불릴만한 별호가 아닙니다.”
아주 죽마고우처럼 덕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좋았어. 내려갔으니까 다시 올라가면서!’
남천휘가 지휘를 하듯 손가락을 까딱이는 순간 왕대만이 표정을 굳힌 채 외쳤다.
“서산노옹께서 괜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겠지요. 하나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서산노옹은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 남천휘의 전음이 흘러들어왔다.
그는 전음을 들으며 말했다.
한데 어색함을 숨기지 못하고 책을 읽듯 딱딱한 어조였다.
“천수련은 흉수가 불러낸 것이외다.”
반면 왕대만은 숨 쉴 여력도 없이 치고 들어왔다.
“그걸 어찌 압니까?”
아주 윽박지르고, 남 탓하는 건 산동에서 열 손가락에 들만큼 능숙하지 않은가.
하나 서산노옹의 표정도 점차 풀렸다.
노회한 고수답게 금세 적응한 게다.
“천수련은 용봉쟁투를 통해 얻어내야 할 것이 있소. 한데 그걸 미끼로 불러낸 듯하오.”
하나 왕대만은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증거가 있습니까? 무엇보다 초 소협의 시신에 남은 검흔만 봐도 천수련의 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명숙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대만이 워낙 저돌적으로 치고 나가니 그들은 어느새 부외자처럼 관망하는 중이다. 한데 왕대만이 생각보다 서산노옹을 제대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어느 순간 왕대만을 대표라고 여기는 분위기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 전에 묻겠다고 하세요. 천수련을 제연평이 추천한 이유가 뭔지 아느냐고요. 그리고 그녀의 검법을 제대로 본 적이 있는 지도요.]
서산노옹이 남천휘의 말을 받아 전했다.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왕대만은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야 진실을 알았을 때 크게 호응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남천휘는 왕대만을 응원하며 천수련의 정체를 서산노옹에게 전했다.
“내가 알려주지. 천 소저는 응!”
서산노옹은 생각지도 못한 천수련의 정체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하나 이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은하검후의 후인이외다.”
이제 명숙들이 놀랄 차례였다.
그들은 서산노옹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정천칠공의 한 사람인 은하검후라니!”
“여중제일인의 후손이란 말인가.”
은하검후(銀河劍后).
산동성을 넘어 중원 전체에 영향을 끼칠 만큼 대단한 별호였다.
신마대전을 종식시킨 일곱 명의 고수.
그들을 가리켜 정천칠공(正天七公)이라 했다.
그들은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었던 사령신(邪鈴神)과 괴겁천마(怪劫天魔)를 없앤 정파의 수호자였다.
분위기가 반전됐다.
삼정의 실무자들은 여전히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다.
하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명숙들은 동요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천칠공의 후계자라면 정파의 가장 고귀한 핏줄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던가. 아닌 말로 사람 몇 명 죽였어도 그냥 넘어갈 만큼 대단한 존재였다. 이제 천수련이 흉수라는 확고부동한 의지에 금이 갔다.
남천휘가 예상했던 대로다.
그는 빠르게 전음을 이어갔다.
“은하검후의 독문무공은 용화수공임을 모르지 않을 터, 그 검법의 흔적이 어떻소이까?”
누군가 중얼거렸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소한의 흔적만. 죽은 자에게는 한 방울의 핏물만 남으리라.”
일점홍(一點紅).
용화수주공의 증표였다.
“여기 의원이 검시한 내역이 있소. 일견하기에 모두 요혈을 찌른 것 같지.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흉내내기에 불과했소.”
자! 여기서 왕대만이 한 번 더 나서고.
“천수련의 성취가 낮아서 그랬을 수도 있잖습니까? 아닌 말로 검후께서 살아 돌아오신 것도 아닌데 저 나이에 그 정도 고절한 무위를 갖추는 것이 가능합니까?”
사람들은 이제 왕대만의 입과 서산노옹의 입만 번갈아보는 형국이다.
서산노옹은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어제 용봉쟁투의 삼 관문이 진행됐소. 그 때 우승할 것이라 예견됐던 일조가 중도포기를 선언했지. 모두 알고 있을 게요. 한데 그들이 포기한 까닭이 천릉곡이라는 곳에서 수백 명의 적도를 상대했기 때문임을 아는 자는 많지 않소. 신공부에게 묻겠소! 어제 신공부의 소부주인 공태령이 천릉곡의 일을 전하지 않았소이까?”
신공부의 신은 눈을 빛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지없이 신공부가 책임을 뒤집어쓰게 생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수련을 흉수로 삼아도 장소 제공에 대한 책임까지 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활로가 열리는 듯했다.
그러니 망설일 까닭이 없다.
“그렇습니다. 하여 이른 아침부터 수하들을 보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서산노옹이 반대편을 가리켰다.
“내 친우를 잠시 소개하리다.”
청수한 문사가 고색창연한 검을 품은 채 나섰다.
“아시다시피 백주검은 나와 함께 수십 년 간 동고동락한 믿을 수 있는 친우요. 그리고 백주검이 쾌검의 달인임도 널리 알려져 있소. 이른 아침 사건을 접하고 이 친구를 천릉곡에 보냈소이다.”
백주검(伯朱劍)은 별호처럼 쾌검을 통해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는 고수였다. 그리고 서산노옹과 더불어 녹린탄을 증오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남천휘가 서산노옹에게 부탁하여 천릉곡으로 보낸 것이다.
“상황이 심각하니 인사는 미룹시다. 천릉곡에서 가서 살펴본 바 수백 명의 시신을 발견했소. 그리고 그들에게서 세 가지 흔적을 찾았소이다.”
그는 천수련에게 당한 낭인들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그 결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요혈이 파괴되거나, 꿰뚫렸음을 확인했소이다. 현재 신공부의 무인들이 남아서 조사를 하고 있소. 그러니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신공부의 조사 결과를 기다려보시오.”
명숙들이 웅성거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왕대만 또한 눈을 끔뻑이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는 결국 남천휘를 힐끔 쳐다보며 도움을 청했다.
‘더! 더! 토끼 굴에 불을 지펴라! 토끼가 못참고 나올 때까지!’
남천휘는 손바닥을 위로 한 채 흔들자, 왕대만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자식, 하여간 남 괴롭히는 건 어지간히 즐기는구나.
“서산노옹과 백주검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한데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천수련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하나 그녀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입니까?”
자! 설계자가 등장합니다.
서산노옹은 남천휘를 향해 손짓했다.
“용봉쟁투 서열 일 위인 남천휘요. 재지가 뛰어나고, 혜안이 있어 몇 가지 일을 맡겼소이다.”
남천휘는 폭소를 억지로 참았다.
서산노옹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마치 자신의 제자나 자식을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과 같은 마음이리라.
“네! 어르신. 명령하신 일을 알아왔습니다.”
남천휘의 손에는 혜소에게 부탁했던 결과가 들려 있었다.
그는 시동처럼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서산노옹에게 서책을 건넸다.
“아주 잘하시고 계십니다.”
“크흠, 이거 두 번은 못하겠어.”
“흐흐,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시고 부탁드립니다.”
서산노옹은 헛기침과 함께 장부를 들었다.
“하오문에서 보낸 정보요.”
하오문 산동지부에 거금을 주고 구입한 정보였다.
내용은 혈랑회를 비롯한 흑도 방파의 동향과 지금까지의 악행이 정리됐다.
시기와 장소 별로 정리된 정보의 결론은 하나였다.
십여 개 남짓한 흑도방파의 동선은 십 수 년 동안 조급도 겹치지 않았다.
우연 치고는 너무 신기한 일이 아닌가.
잠시 후 서산노옹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가 분위기를 뒤집었다.
“청도문!”
명숙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청도문 소속의 무인들을 쳐다봤다.
“닥치시오! 서산노옹! 그 삿된 혀를 함부로 놀리다가는 제 명에 죽지 못할 게요!”
흑검이 분기탱천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왕대만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더니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봤을 때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직감한 게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산동 제일이다.
어! 그러고 보면 저 놈은 무공 빼고 다 잘하네.
“일단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오. 그 후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내 이름을 걸고 책임을 지리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저렇게까지 안하셔도 되는데······.’
강호인에게 명성이란 삶의 발자취와 같다.
한데 그것을 걸었으니 서산노옹은 모든 것을 건 셈이다. 불과 며칠 전에 알게 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치잇.’
남천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 특기 ‘의협’에 대한 실마리가 추가됐습니다.
- 향후 지속적으로 협의지심에 노출될 경우 특기 ‘의협(義俠)’의 획득이 가능합니다.
이런 때에는 그냥 있어라.
마치 내 마음 속에는 협의지심이 콩알만큼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하나 서산노옹이 모든 것을 건 이상 장난처럼 응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서산노옹은 담담한 어조로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
대부분 정황이나 추측에 기반을 한 내용이지만, 반응은 생각 외로 거대했다.
청도문이 삼정의 후계자를 죽인 후 신공부와 황보세가를 싸움 붙이려 했다지 않은가. 백 중 하나라도 진실이면 산동성의 평화는 깨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소리! 뭣들 하는 거냐? 끌어내. 신공부와 황보세가는 저런 이간질을 듣고만 있을 셈이오?”
그 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그만! 모두 멈추라!”
선풍도골의 헌앙한 외모를 자랑하며 문사 한 명이 허공에서 내려왔다.
신공부의 이총관인 신풍수사(新風秀士)였다.
용봉쟁투의 최고 책임자이며, 차기 신공부를 이끌어나갈 것이라는 실세가 등장한 것이다.
그가 등장하는 순간 흑검조차 말을 아꼈다.
“중요한 자리에 늦을뻔 했군.”
신풍수사는 섭선을 흔들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문사가 흘려낼 수 없는 강렬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봤다.
“노옹.”
그는 서산노옹을 향해 목례를 했다.
“수사께서 오셨으니 차라리 잘 됐소.”
신풍수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노옹께서 일으킨 파도는 산동성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 겁니다. 만약 아니라면 노옹은 물론이고, 피붙이와 친우까지 지탄의 대상이 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시렵니까?”
사건의 발단이야 어찌됐든 정치적으로 해결하자는 뜻이다.
하나 서산노옹의 기개는 대나무와 같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으니 물러설 까닭이 없다.
“잘못 된 것을 바로 잡지 않으면 언제고 같은 죄업과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외다.”
신풍수사는 나직이 한 숨을 흘렸다.
그리고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남천휘는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뜬 채 신풍수사를 노려봤다.
‘저 사람도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하나 전장을 더 넓히는 건 불리했다.
지금은 청도문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서산노옹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사건의 전말을 다시 한 번 밝혔다.
“흥! 청도문의 사주를 받은 충신이 십 년 넘게 음모를 꾸몄다. 그런데 일이 잘못되어 청도문의 정체가 들통 나자, 일을 덮기 위해 소문주를 죽였다는 거요? 노옹! 노망이라도 든 게요.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앞뒤가 맞지 않잖소!”
자! 이제 승부의 분수령이다.
서산노옹조차 남천휘의 전음을 들으며 실시간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 않은가.
“내가 지금부터 청도문주의 이름을 세 번 부르겠소.”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상황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 서산노옹은 개의치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세 번을 호명하기 전! 흉수가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날 게요.”
사람들은 진심으로 서산노옹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깃장을 부려도 정도가 있는 게다.
하나 서산노옹은 내력까지 담아 일갈을 내질렀다.
“초. 운. 강!”
남천휘는 눈을 부른 뜬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음으로는 청도문주를 호명하자고 합의를 보지 않았던가.
‘노옹께서 모든 것을 거셨으니.’
남천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껏 가늘고 길게 살면서 호의호식하려 했다.
하여 적당히 드러내고, 적당히 경박한 모습을 보였다. 한데 저렇게 진심으로 다가오면 진심으로 응대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서산노옹의 목소리가 멀리 퍼지며 사그라든다.
그 때 어디선가 서산노옹의 목소리에 호응하듯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개자식아!”
명숙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남천휘가 서산노옹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눈을 부릅뜨고 있지 않은가.
‘한 번.’
서산노옹이 다시 외쳤다.
“초. 운. 강!”
남천휘가 호응했다.
1400이 넘는 내공을 모조리 소모할 각오로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자식을 죽여서까지 권세에 집착하는 쓰레기!”
서산노옹조차 남천휘의 외침에 움찔했다.
하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초! 운! 강!”
“개돼지도 자식 귀한 줄은 안다! 청도문이야말로 개돼지의 집단······.”
그 순간 흑검의 처소 옆에 위치한 창고가 폭발했다.
기와와 짚단이 비상하는 가운데 피투성이의 괴인이 솟구쳤다.
“너! 이 놈! 감히 청도문을 모욕해!”
남천휘의 호흡이 한순간 안정됐다.
“나왔구나. 개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