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고난 전일(苦難 前日). (3)
공태령은 대답 없이 수련을 이어갔다.
잠시 후 그가 패도를 수습하며 읊조렸다.
“천 소저에 대한 일인가요? 제가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드리면 될까요?”
남천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한테 딱 맞는 일이 하나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순순히 나서네?”
공태령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빚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피곤하니까 필요한 일부터 말씀하시지요.”
남천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저 녀석의 습성을 알 듯했다.
입버릇처럼 피곤하다고 하지만, 거절하지는 않는다.
상대방과 어울리려는 녀석만의 방식이리라.
‘그래도 다른 사람까지 힘 빠지게 만드는 저 말투만은 바꿔주고 싶네.’
하나 성격 개조는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은 사건 해결이 먼저였다.
“너 정도 신분이면 어느 곳이나 출입이 가능하지?”
“용봉평 내부라면.”
“좋아. 지금부터 네가 가야 할 곳은······.”
*
이른 아침임에도 방 안은 어두웠다.
판자로 막은 창 사이로 희미하게 들이치는 빛이 전부였다. 천장에 닿을 듯이 쌓아놓은 궤짝 사이에서 거침 호흡이 흘러나왔다.
“후우. 후우. 후우.”
희미한 빛이 궤짝이 사이로 비칠 때마다 괴인이 보였다. 얼굴에 가득한 흉터마저 빛이 발할 만큼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
곤륜산인.
미환비림으로 도망쳤던 그가 어울리지 않게 창고에 숨어 있는 게다. 하나 미환비림을 통과하기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룬 상태였다.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푹 파인 눈매를 보라.
게다가 눈빛은 진흙탕처럼 혼탁하여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허공을 응시한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후우.”
문이 열렸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는 문을 닫은 후 인상을 쓰며 읊조렸다.
“산인!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소문주를 죽인 겁니까? 십 수 년 동안 청도문 밖에서 생활하다보니 미치기라도 한 게요?”
윽박을 지르는 자의 정체는 청도문에서 용봉쟁투를 관리하기 위하여 파견된 흑검이다. 그는 지난 번 곤륜산인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노기를 드러냈다.
하나 산인은 흑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제 할 말을 했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흑검은 눈앞의 상대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나 무공으로는 적수가 되지 못했고, 외부에 알렸다가는 도매 급으로 묶일 형국이다.
“크흑! 일단 천수련을 의심하고 있소. 그런데 정말 제대로 꾸민 게 맞는 거요? 행여 천수련이 아니라는 증거라도 나온다면 우리 둘 다 살아남지 못해! 무엇보다 서산노옹은 꼼꼼한 자요. 행여 의심이라도 한다면······.”
산인은 흑검을 보지도 않은 채 손바닥을 보였다.
“그분께서 이것만이 해결책이라 하셨네.”
흑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가 뭐라는 거야?’
청도문주가 이곳에 왔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그분’은 또 누구란 말인가?
흑검은 곤륜산인의 흐릿한 눈동자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내가 미친놈을 도왔구나.’
이미 후기지수들이 몸 성히 돌아왔을 때부터 계략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꼭두새벽에 피투성이가 된 채 나타난 곤륜산인을 받아줬다. 결과야 어찌됐든 청도문을 위해 십수 년 동안 야인 생활을 자처하지 않았던가.
대업이야 다시 도모하면 된다고 여겼다.
한데 산인은 허락도 없이 술병을 꺼내더니 숨도 쉬지 않고 병을 비웠다. 그러더니 대뜸 하는 말이 초류혁을 죽였단다.
그 때 산인을 내보냈어야 했다.
청도문에 대한 충심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여겼기에 받아줬을 뿐이다.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산인을 지켜볼수록 후회가 막심했다.
‘살 길을 찾아야 해.’
초류혁을 애도하는데 단 일순도 허비하지 않을 셈이다. 그가 죽는 순간부터 이제는 권세나 명예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누구요?”
“자네는 자격이 없네. 그분이 허락하신 이상 청도문주도 나의 충심을 외면하지 않을 터. 죽은 자는 잊고, 사태 수습에 집중하게.”
흑검은 영문 모를 소리가 이어질수록 표정을 구겼다. 곤륜산인이 실성하지 않았다면 청도문주 위에 누군가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문주가 누군가의 수족이라니······.’
그는 태연한 척하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크흠, 지금 신공부에서 나온 자들과 명숙들이 사방에 깔려 있소. 밤이 되면 빠져나갈 기회를 엿볼 테니 꼼짝도 하지 말고 여기 계시오.”
“걱정 말게. 밤이 되기 전 그분이 나를 이곳에서 빼내 주실 게야.”
흑검은 뒷걸음질 치며 창고는 빠져나왔다.
곤륜산인의 기괴한 얼굴을 보고 있자면 도저히 등을 내보일 수 없었다.
‘잠깐!’
그는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창고를 돌아봤다.
‘일조가 원후봉에서 낭인들을 처리한 게 정오 이전이었어. 한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산인이 되돌아와 초류혁을 죽였다는 건데.’
그렇다면 그분이라는 존재는 멀리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닌가. 게다가 산인의 마지막 한 마디에 마음에 걸렸다.
‘빼내 준다고?’
흑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용봉평은 양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상태였다. 곳곳에 가득한 무인들은 초류혁의 죽음으로 인해 날 선 눈빛으로 서로를 감시했다. 그런데 어찌 산인처럼 용모마저 괴이한 자를 빼낼 수 있단 말인가.
‘설마······.’
그는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우스갯소리를 떠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자물쇠로 문을 잠갔다. 그리고 유일한 열쇠는 주인이 지녔단다. 그 문을 열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농담이었다.
‘주인이 열쇠로 열면 된다는 건데.’
흑검은 몸을 부르르 떨며 한숨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만약 그렇다면 산동 강호 전체가 뒤집어지겠군.’
*
혜소에게 부탁을 했고, 왕대만에게 일거리를 줬다.
그리고 공태령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남천휘는 보법까지 펼치며 서산노옹을 찾았다.
그는 작은 연무장에서 십 수 명의 명숙들과 천수련을 둘러싼 채 심문을 하고 있었다. 한데 천수련은 목검을 쥔 채 검법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신에 남은 흔적과 검법을 비교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젠장! 늦었다.’
아니나다를까 천수련이 약식으로 검법을 펼쳐보이자, 명숙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저렇게 찌르는 검법이라면 초 소협의 시신에 난 자상과 다를 바가 없소.”
“제연평에서 보낸 계집이 살수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건 저 아이뿐 아니라 제연평에도 책임을 물어야 하오.”
“일단 가둬둡시다! 청도문에 넘기면 이번 일로 소란을 피우지 않을 게요.”
저런 미친 영감들을 봤나.
눈은 뒀다가 돈 받아먹을 때만 쓰나.
남천휘는 빠르게 다가갔다.
만약 천수련이 갇히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놈들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누가 알겠는가.
“어르신!”
서산노옹의 주름진 눈매 사이에 갇혀 있던 눈동자가 번뜩였다. 명숙들의 삿대질과 욕설에 지친 듯 말도 없이 연무장을 벗어났다.
“이미 상부에 보고가 들어갔어. 명확한 증거, 아니 아예 흉수를 대령하기 전에는 천수련을 풀어줄 수 없을 게야.”
“흉수를 찾았습니다. 밝혀낼 수 있어요.”
서산노옹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 대단하구나! 그 사이 어떻게 흉수를 찾아냈단 말인가. 어서 나와 함께 가서 흉수의 정체를 알리자꾸나.”
남천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아무리 명확한 증거를 늘어놓아도 저들은 믿지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어르신께서도 말씀하셨잖습니까. 저 역시 위험할 수 있다고요. 천수련의 혐의를 깨끗하게 벗기려면 제가 얽히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서산노응은 침음을 흘렸다.
남천휘의 말이 옳다.
게다가 진짜 흉수가 따로 존재한다면 그를 숨겨주는 자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남천휘는 목소리를 낮췄다.
“놈은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그냥 발각된다면 자결을 할지언정 범행 일체를 자백할 리가 없니다.”
서산노옹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큰일이군. 저들은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리자고 성화야. 내가 조사를 책임진다고 해도 오래 버틸 수 없어. 이대로라면 곤란해.”
남천휘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묘수가 있는가?”
서산노옹의 물음에 남천휘는 저잣거리의 약장수처럼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 저랑 경극 한 판 펼쳐보시지요.”
*
서산노옹은 종결을 선언했다.
삼종의 실무자들은 물론이고, 여력이 되는 명숙들이 모두 모였다. 천수련은 비 맞은 쥐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실무자와 명숙들은 당연히 천수련을 흉수라고 확신했다.
흑검은 빌고 또 빌었다.
한 시라도 빨리 사건을 정리하고, 곤륜산인이 사라지기를 기원했다.
‘젠장, 장소는 왜 하필 여기란 말인가?’
다행히 명숙 중 한 명이 물었다.
“연무장을 두고 굳이 이리 모이라 하신 까닭이 뭡니까? 어차피 흉수를 밝힐 자리라면 뇌옥과 가까운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서산노옹은 더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청도문의 소문주가 죽었소. 강호의 후기지수로서 장차 산동성의 한 죽을 짊어져야 할 동량이 헛되이 죽은 날이외다. 그러니 청도문을 대표하는 이곳에서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밝히는 것 또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소.”
명숙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청도문을 대표해서 참석한 흑검의 처소다.
서산노옹은 명숙들이 진정하자, 헛기침을 했다.
저들의 눈빛이 하나씩 꽂혀든다.
천수련이 흉수일 것이라 확신하는 자.
천수련이 흉수로 결정되기를 기원하는 자.
그리고 뭐가 됐든 빨리 평온한 하루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자들의 눈빛까지 다양했다.
서산노옹은 그들을 향해 일갈을 내질렀다.
“천수련은 흉수가 아니외다!”
하나의 감정이 병균처럼 퍼져나갔다.
당혹스러움.
신공부는 미간을 좁혔고, 황보세가는 흥미를 보였다. 청도문은 분노했고, 명숙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듯한 명숙 중 한 명이 인상을 쓰며 외쳤다.
“그게 무슨 개소리란 말입니까!”
시뻘게진 얼굴로 침을 튀기는 자.
왕대만이다.
그래, 너는 거기서 나와도 돼.
더 격렬하게, 더 격앙된 어조로 외쳐보렴.
“천수련은 흉수가 분명합니다!”
옳지. 잘한다. 우리 대만이.
남천휘는 한쪽 구석에서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그래, 그렇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라고.’
왕대만은 본래 이번 일에 개입하기를 극구 거부했다. 그라고 해서 소문주가 죽은 후 용봉평의 분위기가 험악한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니 섣불리 말이라도 섞였다가 불이익을 볼까 두려웠던 게다.
하나 특기 ‘억압’과 더불어 오줌 사건을 널리 알리겠다고 협박을 했더니 일단 들어나 보자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게. 평소에 괄약근 조절을 힘썼어야지.
남천휘가 시킨 건 간단했다.
서산노옹이 무언가를 하려 할 때마다 말꼬리를 잡으라는 명령에 왕대만은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서산노옹! 어디 한 번 말씀해보시구려! 명백히 모든 증거가 천수련을 가리키고 있는데 아니라고 주장하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왕대만은 배역에 몰입한 듯 열성적으로 서산노옹을 깎아내렸다. 한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사래를 치며 내빼려던 녀석 치고는 너무 능숙하지 않은가.
‘쯧쯧, 애초에 남 탓만 하고 살았으니 자연스러울 수밖에.’
한데 서산노옹이 표정을 굳혔다.
왕대만이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니 대사라도 잊어버리신 걸까.
남천휘는 고개를 슬쩍 숙인 채 손으로 입을 가렸다.
[용봉평에서 가장 유명한 고수, 서산노옹께 알립니다. 제 말 들리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