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고난 전일(苦難 全日). (2)
초류혁의 시신은 생각보다 참혹하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 표정 또한 잠을 자다가 당한 것처럼 편안해보였다. 하나 사혈이라 할 수 있는 요혈마다 핏자국이 낭자했다.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단순한 살인이 아닌 건 분명한데······.’
그 사이 의원으로 보이는 자가 초류혁의 시신을 이리저리 살핀다. 하나 표정만 봐도 마지못해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얇고 기다란 막대로 고깃덩이를 다루듯 옷자락을 들었다.
그 때마다 서책에 자상의 위치를 기록했다.
“쯧쯧, 많이도 찔렀군. 원한이 얼마나 깊기에······.”
한데 의원이 갑자기 탄성을 흘렸다.
남천휘는 슬쩍 다가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는 남천휘를 힐끔 본 후 마뜩찮은 표정을 보였다. 삼자의 개입으로 인해 귀찮아질 것을 우려한 듯했다. 하나 서산노옹의 외침을 들었으니 대놓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시신의 자상은 총 스물두 곳이네. 한데 모두 요혈을 노렸어. 게다가 이것 보이는가?”
그는 막대를 상처에 찔러 넣었다.
몇 군데를 찔렀다가 뺐음에도 피가 묻은 막대의 위치는 일정했다.
“같은 깊이군요.”
“그래, 고수야. 그것도 검법을 제대로 익힌 고수지. 이런 종류의 검법을 익힌 자를 찾아내면 쉽게 흉수를 특정 지을 수 있을 게야.”
의원이 쉬이 발견할 만한 흔적이라.
남천휘는 그렇기에 천수련이 아닌 제 삼자의 존재를 확신했다. 문제는 천수련의 억울함을 밝히는 방법과 제 삼자의 정체였다.
“아까 그 여인도 검을 차고 있더군. 검과 상처를 비교하면 단서가 나올 게야.”
누구라도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다.
“언제 죽은 겁니까?”
의원은 초류혁의 눈과 피부를 살피고, 시신을 뒤집어 등을 살폈다.
“변화가 거의 없어. 신고자의 말에 의하면 여인의 비명이 들렸고, 무슨 일인가 해서 들여다봤더니 이 꼴이었다고 하더군. 시간의 흐름으로 보아 여인의 비명을 질렀을 즈음 사망했네.”
그 말은 곧 천수련의 혐의가 더욱더 짙어짐을 의미했다.
“신고자가 누굽니까?”
의원은 잠시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혜소의 이름을 꺼냈다.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혜소가 거짓을 말할 리 없다.
그러니 그는 시신을 발견하고, 가장 먼저 명숙들의 거처로 달려갔을 게다. 그 후 자신을 찾아와 초류혁의 죽음을 알렸을 터였다.
남천휘의 처소는 동숙(東宿)이고, 초류혁의 처소는 서숙(西宿)이다. 그러니 혜소가 명숙들의 거처인 중숙을 지나 자신을 찾아온 건 이상할 것이 없다.
“명숙 중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서산노옹께서 제일 먼저 나오셨지. 그분은 후기지수들의 난장을 걱정하여 늘 가장 늦게 침소에 드시거든.”
남천휘는 황급히 현장을 벗어났다.
그가 이곳에서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서산노옹과 혜소가 전부였다.
“어르신! 어르신!”
서산노옹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바쁜 마음에 황급히 물었다.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혹시 지금 용봉평 출입이 가능합니까?”
“그럴 리가.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출입문을 막았네.”
남천휘는 탄성을 흘렸다.
“역시 어르신의 혜안은 대단하십니다. 범인이 외부로 도망칠 것을 예견하셨군요.”
서산노옹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니라 상부에서 지시했네. 명숙들은 물론이고, 신공부의 무인들까지 모두 동원됐어. 청도문의 소문주가 죽었네. 소문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서 재빨리 움직인 게지. 한데 자네는 정말 천수련 외에 흉수가 있다고 여기는 겐가?”
남천휘는 목소리를 낮췄다.
“네. 그리고 제 예상이 옳다면 흉수는 아직 용봉평을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크흠. 그랬으면 좋겠군. 천수련은 눈이 맑아. 그런 아이는 저렇게 흉악한 짓을 할 수 없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제 그녀에게 칼침을 맞은 것만 수십 명이랍니다.
어찌됐든 용봉평의 출입이 막혔다면 최악의 상황은 막은 셈이다.
남천휘는 천수련의 심문을 조금만 늦춰주기를 청한 후 혜소를 찾았다. 다행히 녀석은 남천휘를 걱정한 듯 주변에 머물렀다.
“형님, 어찌된 일입니까? 안에 들어가신 후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잖아요.”
자식, 충견처럼 기다리는 모습이 귀엽구나.
“조사할 게 있었어. 너는 지금 당장 왕대만을 불러와라.”
혜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누군데요?”
남천휘는 흠칫 놀라며 헛기침을 했다.
“일양도 왕 대협을 모셔와. 우리끼리 편하게 말한다는 게 실언을 했네.”
“없을 때에는 황상도 욕한다잖아요. 뭐 어때요? 일단 저는 일양도 왕 대협을 모셔올게요.”
이야. 우리 대만이, 많이 유명해졌네.
별호만 얘기해도 누군지 알 정도면 충분히 출세한 게 아니던가.
‘그러니 잘 활용해야지.’
남천휘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의원은 조사를 마무리하려는 듯 무인들에게 시신을 인도하려 했다.
“잠깐만요!”
“쯧, 다시 왔는가? 조사가 끝났으니 이제 청도문에 인계를 할 시간이야.”
“시신 좀 봅시다.”
남천휘의 말에 의원은 미간을 좁혔다.
“보면 뭘 알고?”
이쯤 해서 서열 정리를 해야 할 듯했다.
남천휘는 의원을 빤히 쳐다봤다.
절정 무인의 눈빛이다. 의원으로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하나 그는 허장성세라도 부리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왜?”
“잠깐 맥 좀 잡아 봐도 되겠습니까?”
무인에게 맥문을 내주는 건 생명을 거는 행위였다.
하나 의원에게 맥을 짚는 건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던가. 그는 귀찮다는 기색으로 손을 내밀었다.
남천휘는 의원의 맥을 짚은 채 말했다.
“자세가 삐딱한 것으로 보아 골반이 뒤틀렸군요. 딱딱한 침상에서 옆으로 주무시는 걸 선호하시나요? 하지만 환도혈.”
대퇴부 측면을 건드렸다.
“그리고 양릉천의 흐름이 좋지 않습니다.”
무릎 바깥쪽을 건드린 후 어깨의 견정혈을 짚었다.
의원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크흑.”
남천휘는 근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십이경락 중 족소양담경의 혈도가 막히거나, 부었습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감각이 무뎌질 것이고, 최악의 경우 마비가 올 수도 있습니다. 아마 손 떨림과 눈의 경련도 있으실 듯하군요. 그래서 의원 생활을 접고 검시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의원은 귀신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린 채 물었다.
“그걸 어떻게. 자네 뭐하는 사람인가?”
“제 이름은 남천휘. 명포쾌가 될 사람입니다.”
물론 퀘스트가 끝나는 순간 십만팔천 리 밖으로 사라질 꿈이겠지만 말이다.
“허허, 자네의 의술과 눈썰미가 대단하이. 혹 치료 방법도 알려줄 수 있는가?”
왜 없겠어요.
제 머릿속에는 단양자의 ‘마단양천성십이혈병치잡병가’라는 아주 긴 이름의 지식이 담겨 있답니다.
남천휘는 족소양담경을 회복할 수 있는 치료법을 알려줬다.
“고맙네.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내가 찾지 못한 걸 발견할 수도 있겠군. 어서 보시게.”
주변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청도문의 무인들에게 선언하는 듯한 한 마디였다.
남천휘는 가까이서 초류혁의 시신을 살폈다.
의원이 기록한 것처럼 시신의 검상은 모두 요혈을 꿰뚫었다. 게다가 깊이가 일정하여 범상치 않은 검법을 익힌 듯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혈인도라도 있다면 모를까.
눈과 손으로만 살피다보니 한계에 봉착했다.
하지만 적대적인 관계였고, 이제는 죽은 자의 호감을 사는 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 혈인도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y/n)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분명 혈인도의 활성화는 일정 수준 이상의 관계가 정립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미환비림에서도 공태령의 것은 보지 못했다.
하나 남천휘는 재이의 설명에 입꼬리를 올렸다.
‘죽은 놈은 괜찮다 이거지.’
망설일 것 없이 혈인도를 눈앞에 띄웠다.
혈도와 혈맥을 비롯해 기의 흐름까지 표현됐다.
남천휘는 혈인도를 보는 순간 미간을 좁혔다.
‘이건······.’
혈인도에는 초류혁의 마지막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파괴된 혈도, 찢긴 혈맥, 내공이 흩어진 위치까지 보였다.
남천휘는 시신의 남은 검상과 혈인도를 비교했다.
달랐다.
일견하기에 요혈을 찌른 듯했지만, 자세히 살피면 요혈 주변을 찌른 것에 불과했다.
흉수의 의도가 고스란히 엿보였다.
‘천수련의 검법을 흉내 냈군. 뒤집어씌우려는 거야.’
하나 여전히 가장 큰 문제가 존재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 하냐?’
남천휘만 볼 수 있는 혈인도는 증거가 될 수 없다.
마치 저 앞에 산이 있는데 안개로 인해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답답한 마음에 다른 증거를 찾으려던 중 묘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풍부혈로 통하는 혈맥이 막혔어.’
풍부혈은 뒷목의 요혈로 기습으로 상대를 제압할 때 요긴한 위치가 아닌가. 그제야 초류혁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는 놈이야.’
그러나 이래서야 더더욱 애매모호했다.
용봉쟁투 내에서 삼정끼리 대립하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초류혁이 웃으며 등을 맡길 수 있는 건 청도문의 수뇌부나 쫓겨난 모인적이 전부일 터였다.
그러니 모인적이 쫓겨난 이상 흉수는 청도문이 되어야 마땅했다.
한데 그거야 말로 어불성설이 아니던가.
‘청도문 소속이 소문주를 죽일 수 있을까?’
청도문주의 자식은 초류혁이 유일했다.
그렇다면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닌 말로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는 방식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한데 어느 누가 감히 초류혁을 뼈로 여길 수 있겠는가.
‘제정신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그 순간 남천휘의 뇌리에 벼락처럼 스쳐가는 장면이 있었다.
전 날 천릉곡에서 마주했던 괴인의 행보였다.
‘청도문 소속으로 오랫동안 잠행한 자. 어둠 속에서 수많은 흑도 세력을 일군 자.’
낭야방의 무인을 고문했을 때의 정보를 떠올려 보자. 그는 다른 흑도 세력을 동료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같은 의뢰를 받았다고 여겼을 뿐이다.
태산, 몽산, 천릉곡.
남천휘가 만났던 흑도 세력들의 언행을 되새겼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야.’
그 말은 괴인이 흑도세력을 점조직처럼 운영했다는 뜻이다. 흑도 세력의 출현 시기를 보면 십수 년 동안 그리했으리라. 그것은 어지간한 집념과 갈망이 없다면 시행할 수 없을 만큼 고된 여정이었겠지.
왜 그랬을까?
‘청도문의 중흥을 위해서라고 했지.’
남천휘의 호흡이 잦아들었다.
심상과 집중을 통해 지혜 수치를 활용했다.
‘분명 원후봉은 삼정의 후계자를 죽이기 위한 함정이었어. 하나 초류혁은 아니야. 그 때까지만 해도 초류혁을 죽여서 얻을 있는 것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공태령과 황보장천을 노렸겠지. 만약 청도문이 혐의를 벗을 수 있다면 두 세력은 서로 물고 뜯고 했을 게야.’
남천휘의 머릿속에 산동성의 지형이 떠올랐다.
신공부와 황보세가는 이와 잇몸처럼 위아래로 붙어 있다. 반면 청도문은 태산 건너편에 위치하지 않았던가.
강 건너 불구경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
‘한데 우연찮게 흘러나온 한 마디.’
괴인이 청도문을 언급한 순간 십 년 넘게 꾸며왔던 계획은 들통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화가 났을까?
하나 세 사람을 상대로 화풀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당황스러웠을 거야.’
이제 청도문은 산동강호의 주적이 되게 생겼다.
괴인은 이 일을 봉합하고 싶었을 게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청도문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으리라.
남천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소문주를 죽여서라도.’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결코 선택하지 못할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애초에 놈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도문을 지키기 위해 미환비림에 스스로 몸을 던졌을 터였다.
그리고 효과는 확실했다.
이제 남천휘를 비롯한 세 사람이 천릉곡의 음모를 알려도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라.
청도문의 소문주가 죽었으니까.
게다가 소문주를 죽인 흉수로 의심되는 자가 천수련이라면 더 할 나위가 없으리라.
‘괴인은 개똥이의 검법을 지켜봤어. 게다가 검후의 검법인 줄도 알지. 그가 만도를 사용한 건 청도문 소속임을 감추고 위해서야. 애초에 청도문은 검법으로 유명하니 어설프게나마 따라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사건의 전모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
이제 증명의 시간이다.
남천휘는 시신을 뒤로 한 채 공태령의 처소를 찾아갔다. 녀석에게 사건 해결의 중요한 축을 맡길 생각이다.
공태령은 수련하는 와중에 남천휘의 기척을 잡아내고 외쳤다.
“타인의 수련장을 허락 없이 출입하는 건 강호의 법도에 어긋납니다.”
하나 남천휘는 도풍이 몰아치는 연무장에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섰다.
쉬리리리리릭!
아슬아슬하게 패도가 스쳐가더니 한 순간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다.
남천휘는 코앞에서 도풍이 일었음에도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