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92화 (92/305)

49, 유관장.

49, 유관장.

태산이라 불리지만 산세 자체는 시야 끝까지 이어졌다. 그렇기에 원후봉의 산로를 벗어나는 순간 빽빽한 삼림이 세 사람을 맞이했다. 풀은 무릎 아래까지 자랐고, 나무는 햇빛을 가릴 만큼 우거졌다.

늪이 아닌 걸 감사해야 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어요.”

천수련의 칭얼거림이다.

돌아가라고 했더니 방향을 모른다며 울상을 짓는다. 한데 잠시 후에는 신기한 풀과 벌레를 발견했다며 웃기 시작했다.

여전히 제정신으로 상대하기에 난해한 녀석이다.

향후 소혜와 한 방에 몰아넣은 후 구경하면 재밌을 듯했다.

“흐음.”

공태령의 묘한 눈빛이 꽂혔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비켜섰다.

녀석의 시선이 허리 쪽을 향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뜬금없이 호감도를 올려버린 상황이 아닌가. 그리고 천수련은 유람을 나온 사람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녀석과 단 둘이 있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찜찜했다.

“뭐? 왜?”

남천휘의 시큰둥한 물음에 공태령은 어딘가를 가리켰다. 다행히 예상했던 곳과 달리 허리춤의 직도를 쳐다본 것이다.

“직도라고 했지요? 왠지 소개연이나 백인검무에서 봤을 때와 조금 느낌이 다르네요.”

남천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아닙니다. 제가 잘못 본 듯합니다.”

공태령은 관심을 끊었지만, 남천휘로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5까지 강화한 직도를 인벤토리에 넣어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해물을 제거하는데 천하도와 제일도를 사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수련용 직도를 꺼내 관목과 잡초를 걷어내던 중이다.

‘설마 이걸 구분하는 건가?’

◎ +5 강화 이상 된 아이템은 자체적으로 부가기능 외에 추가능력치가 생성됩니다. 또한 강화를 통해 평범한 검을 명검이나, 보검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일정한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확인할 수 있는 외형적 변화도 추가됩니다.

십 이상 강화된 무기는 광휘를 뿜어낸다니 낯 뜨거워서 들고 다닐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어찌됐든 새삼 고수에 대한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지난 날 봉황곡의 백타선자가 떠올랐다.

당시 그녀에게 오감증폭제의 사용을 걸릴 뻔하지 않았던가.

‘무균실과 같은 원리인 줄은 몰랐지.’

남천휘의 얼굴은 무균실을 통해 잠시나마 반짝반짝 빛이 났다. 오감증폭제 또한 무균실처럼 해당 공간의 잡음을 제거하고, 소리를 증폭하는 방식이다.

백타선자는 대기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보고 누군가 있을 것이라 경계하지 않았던가. 한데 공태령마저 강화된 직도와 수련용 직도를 어렴풋이 구분하려 했다.

‘고수란 작자들은 무시할 수가 없구나.’

산동성만 해도 이 정도였다.

천하로 나간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고수들이 존재할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촤아아악!

공태령의 도가 횡으로 그어지는 순간 사람의 키만 한 나무가 서너 그루씩 잘려나갔다.

“발목을 잡지 말라고 했더니 스스로 걸려서 넘어질 생각입니까?”

남천휘는 공태령이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발아래를 보니 넝쿨과 잡목이 잘려나간 후였다.

“아, 고마워.”

하나 공태령은 대꾸 없이 쌍도를 꺼내 쉼 없이 휘두를 뿐이다.

“빨리 가고 싶을 뿐입니다. 피곤하거든요.”

이 새끼야! 그렇게 피곤하면 그냥 죽어.

그럼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잘 수 있다고.

핑계를 대려면 그럴싸하게 대라고 충고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더 이상 엮이는 건 좋지 않아.’

어찌됐든 녀석은 칠야와 창월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가 아닌가.

천수련이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이 묘했다.

백인대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달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몽환적인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본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남천휘는 자신의 소맷자락을 잡은 천수련을 손을 슬쩍 떼어냈다.

‘어디서 또 여우 짓을!’

◎ 특기 ‘불굴’이 활성화됩니다.

그렇지. 잘한다! 내 몸아.

이런 수작질에 넘어가지 마.

‘내가 또 당할 줄 알고?’

천수련은 천진난만한 외모로 속내를 감췄다.

처음 만났을 때 유혹을 하듯 손짓과 몸짓을 자연스레 선보이지 않았던가. 한데 본심과는 조금도 관계없는 버릇에 불과했다. 더 이상 천수련의 한 마디에 휘둘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저 남색가가 낫지.’

공태령은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하나 일단 드러내기만 하면 거짓이 아니었다. 비아냥거림을 기억한 후 끝없이 써먹는 것을 보라. 녀석은 졸렬할 뿐 진실했다.

게다가 천수련은 개똥이잖아.

그럼 된 거지.

“어! 남 소협. 남천휘. 공 소협. 어? 어디 갔지?”

천수련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했다.

마치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손을 휘젓는 것이 아닌가.

“아! 어! 어? 내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네.”

얼씨구! 이제는 말까지 더듬는다.

“야! 쟤 왜 저래?”

남천휘는 공태령을 돌아봤다.

한데 녀석의 상태 또한 정상이 아닌 듯했다.

녀석은 철면호협이라는 별호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입꼬리를 올리며 슬쩍 웃는 것만으로 호감도가 오를 만큼 감정 표현에 인색하지 않았던가. 한데 그랬던 녀석이 말라붙은 나무를 생사대적으로 여긴 듯 도를 겨눴다.

“용서하지 않겠어!”

정리를 한 것처럼 가지런한 눈썹은 역 팔자로 치솟았고, 얼굴은 울화가 치민 듯 시뻘겋다.

그리고 재차 씹어뱉듯 읊조렸다.

“당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어!”

너 뭐하니?

남천휘는 공태령과 천수련을 번갈아봤다.

원래부터 정상이 아니던 녀석들이 더 이상해졌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연이어 들려왔다.

◎ 특기 ‘심상’이 활성화됩니다.

남천휘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어! 불굴은 개똥이 때문에 발동한 게 아니었나? 이거 뭔가 이상하잖아!’

그는 황급히 주변 풍광을 살펴봤다.

조금 전과 다를 바가 없는 나무와 풀이었고, 그 너머에 늘어진 산세도 여전했다. 한데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 특기 ‘집중’이 활성화됩니다.

남천휘는 저절로 발동한 세 개의 특기를 염두에 뒀다. 그리고 지도상에서 현재 위치를 확인하는 순간 짚이는 바가 있었다.

‘진법인가?’

아니나다를까 재이가 경고했다.

◎ B급 진법 ‘미환비림’에 진입했습니다.

- 오감의 감응도가 하락합니다.

- 내력의 흐름이 방해를 받습니다.

- 모든 능력 수치가 서서히 하락합니다.

미환비림(迷幻秘林)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처럼 무서운 명칭의 진법이 고작해야 B등급이란다.

‘재이! 탈출로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재이의 알림이 이어졌다.

띠링-

그것도 돌발 퀘스트로 나타났다.

《대탈출》

- 미환비림에서 탈출하세요.

- 탈출로가 지도에 표시됩니다.

※성공 시 자수정과 특수 능력 ‘귀식’이 지급됩니다.

※실패 시 대상자는 행동불능상태에 빠집니다.

미친! ‘B급 보도’ 퀘스트를 하면서 생사의 관문을 두는 건 균형이 맞지 않잖아.

행동불능 상태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 건데?

설마 누가 구하러 올 때까지 쓰러져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하나 재이는 대꾸하는 대신 지도에 붉은 선을 긋기 시작했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탈출로는 오직 하나, 천릉곡으로 향하는 것뿐이다.

‘진법은 방금 발동됐잖아? 돌아가는 게 낫지 않아?’

B급 퀘스트에 생명을 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재이는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 탈출 예정 시간을 표시합니다.

※ 천릉곡 도달 시간은 00:14:47입니다.

정확히 일각의 여유였다.

아마 일각 안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모든 수치가 바닥을 칠 것이고 행동불능 상태에 빠지리라.

그 후의 일은 어찌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젠장! 야! 다들 정신 차려. 여기 있으면 행동불능······. 아니, 그냥 죽어!”

하나 공태령과 천수련은 저마다 자신만의 상념에 빠진 채 남천휘의 말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이쯤 되면 남녀의 예법은 개나 주라지.

남천휘는 공태령과 천수련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자율 의지를 상실한 듯 끌려왔다.

게다가 남천휘가 속도를 올릴수록 발을 맞춰 뛰기 시작했다.

상태창을 열고 실시간으로 능력 수치를 살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어.’

그 때 천수련이 남천휘을 손을 떨쳐냈다.

“걱정마세요! 제가 정천칠공의 유산을 찾아내겠습니다! 저만 믿으세요.”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너도 유산을 찾고 있냐?”

천수련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몽롱한 눈빛이 더욱 깊어지는 듯했다.

“네.”

이거 뭔가 묻는 족족 대꾸할 기세였다.

남천휘가 정천칠공의 유산에 대해서 물으려는 순간 천수련이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실연당한 여인네처럼 풀썩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너무 뜬금없이 쓰려져서, 연기를 하는 줄 알았다.

“아.”

남천휘가 반응할 사이도 없이 공태령도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더니 남천휘를 빤히 쳐다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피곤하군요.”

그러더니 천수련 곁에 주저앉는다.

남천휘는 황망한 와중에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이것들이 쌍으로 놀고 있네.”

그는 널브러진 두 사람을 보며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을 안고, 제 시간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미 제한 시간 또한 제법 흐른 상황이 아닌가.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남천휘는 뒤통수를 긁적이여 외쳤다.

“아우! 빌어먹을! 그냥 혼자 올 걸!”

하나 결국 공태령과 천수련을 양 허리에 꼈다.

무겁다. 그것도 제법 무겁다.

어여쁜 여인을 안으면 깃털처럼 가볍다더니 모두 거짓부렁이 아닌가. 그렇다고 개똥이나 남색을 예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란다.

‘오해하지 마!’

남천휘는 뛰었다.

두 사람을 안고 뛰는 순간 능력 수치의 하락은 마치 제방을 무너트린 물줄기처럼 빠르게 하락했다.

“후우, 후우, 오감증폭제! 시각! 청각!”

방향 감각이 마비되는 듯하더니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으아아아! 적선단! 벽선단!”

체력과 내공이 조금이나마 회복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중의 돈을 모두 털어서 영약이나 사놓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일었다.

한데 적선단과 벽선단의 효력은 금세 사라졌다.

한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연기를 들이마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아이템 소환을 입으로! 빙당호로!”

그 순간 입술 사이로 빙당호로가 나타났다.

“으으, 달아!”

용봉평 주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점의 빙당호로를 사놓은 것이다. 낮에는 사람들이 줄까지 서서 구입하는 명물이 아닌가.

“퉤!”

두어 번 씹고 내뱉었다.

이것이 진정한 부자의 삶이지.

특급 강호인이고 뭐고 간에 물 좋고, 산 좋은 곳에서 미녀들을 옆에 끼고······.

“육포!”

한 장에 은자 한 냥인 고가의 천품육포가 입안에 등장했다.

“으으, 짜!”

그 역시 두어 번 씹고 버려버렸다.

달고 짠 것을 번갈아 먹으며 미각을 자극했다.

다행히 안빈낙도에 대한 유혹이 사그라졌다.

오감이 마비될수록 잡념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안 되지. 버텨야 해!’

이번에는 만두다.

기본 맛과 매운 맛을 번갈아 먹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면 차를 우려내기 위해 넣어둔 온수까지 입안으로 소환했다.

“으아아아! 뜨거워.”

다행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천휘의 두 눈은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만약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면 세 사람은 도원결의를 한 유관장(劉關張)처럼 한날한시에 가버리는 게다.

“천하통일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어! 최소한 조가 놈의 목은 따고 가야 한실 종친으로서······.”

되도 않는 말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아! 점점 뭐가 뭔지 모르겠다.

소혜가 개구리인지, 개구리가 소혜인지 헷갈릴 만큼 세상이 빙빙 돌았다.

이렇게 비명에 가는구나 싶다.

‘한실이고 뭐고 간에 나부터 살자!

있는 힘껏 뛰었다.

내공마저 아낌없이 사용했다.

팔다리가 끊어져도 개의치 않을 것처럼 달렸다.

타다다다다다닷!

남천휘는 빼곡하게 들어찬 삼림을 망설임 없이 질주했다. 이미 탈출로가 붉은 선으로 존재하지 않던가. 그것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튜토리얼 당시 방향에 대해 익혔던 단계를 연상케 했다.

남천휘는 그저 선을 따라 달렸다.

특기 심상과 집중이 발동된 덕분에 잡생각 없이 달리는 것이 가능했다.

오직 미환비림을 탈출하는 것만 염두에 뒀다.

매 걸음마다 절박함을 실어 뛰고, 또 뛰었다.

무쌍 모드가 열렸을 때에도 이처럼 절박하게 날뛰지는 않았으리라.

솨아아아아아아-

한데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아랫배에서 제멋대로 한 움큼의 내력이 튀어나오더니 두 다리를 향해 퍼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양 발의 혈맥을 노도와 같이 질주한 내력이 용천혈을 통해 폭발하듯 분출됐다.

쾅!

남천휘의 신형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한 걸음에 내딛은 거리가 일 장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주변 풍광이 단색으로 통일됐다.

쇄애애애애액!

남천휘는 빛이 번쩍이듯 빠르게 내달렸다.

‘빠르다. 내가 아닌 것처럼 빨라!’

그가 입꼬리를 올리는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신법의 속도가 한계치를 돌파했습니다.

- 특기 ‘신속’이 등록됩니다.

※ 지형지물로 인한 방해가 소폭 하락합니다.

좋아. 좋아!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사람 키만 한 둔덕에서 몸을 날렸다.

‘자! 이제 날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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