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93화 (93/305)

49, 유관장. (2)

뛸수록 어지러움이 잦아들었다.

어느 순간 단전에서 흘러나온 내력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그냥 했던 것을 이제야 알고 하는 듯한 기분이다.

혈맥을 휘도는 내력의 흐름.

혈도를 두드리는 내력의 강약.

내공이 용천혈을 통해 빠져나갈 때까지의 경로.

이 모든 것이 머리와 몸에 각인됐다.

‘이게 왕대만이 말했던 그건가’

왕대만이 절정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했던 말이 있지 않은가. 어제까지는 태산처럼 높았던 벽이 오늘은 문지방처럼 낮아서 그냥 지나쳤다고 하더라.

남천휘의 심정이 그러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미세한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조금씩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반대편을 보듯 모든 것이 익숙했다.

‘나 절정인 거냐?’

◎ 강호의 법도와 행태에 의하면 경지를 넘어서는 건 스스로 인지한다고 했습니다.

아, 그럼 아니네. 젠장!

타탓!

남천휘는 비좁은 나무 사이를 가볍게 지나쳤다.

특기 ‘신속’의 발현으로 인해 지형지물로 인한 불편함이 상쇄되는 듯했다.

마치 평지를 뛰듯 내달렸다.

남천휘의 입매는 땀을 뻘뻘 흘릴수록 치솟았다.

절정이든, 그렇지 않든.

한 계단 오른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 겨울 산속을 뛰어다니고 있음에도 한여름에 들판을 내달리듯 상쾌함이 온 몸에 스며들었다.

가슴 속에서 벅차오르는 감정.

그것을 토해내는 순간 소성(笑聲)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하하하하!”

한데 뛰고, 또 뛰던 중 눈앞에 절벽이 나타났다.

남천휘는 가볍게 걸음을 멈춘 후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이걸 올라가야 하는 건가?’

중턱에 안개가 자욱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백 장은 될 법한 높이였다.

한데 재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남천휘는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지도를 확인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힘이 풀려 공태령과 천수련을 놓치고 말았다.

“아! 이게 뭐야?”

지도에 미환비림이 표시되지 않았다.

남천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침을 꿀꺽 삼키며 지도를 확대했다. 그러자 저 멀리 미환비림의 영역이 불그스름하게 나타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환비림을 빠져나온 게다.

“나 언제 빠져나왔냐?”

◎ 00:08:27 전에 미환비림을 통과했습니다.

- 퀘스트 보상을 확인해주세요.

남천휘는 퀘스트 보상보다 주변을 살피며 헛웃음을 흘렸다. 저 멀리 뒤쪽에 안개가 자욱한 숲이 미환비림일 것이다.

‘내가 이렇게 빨리 통과하다니?’

퀘스트 완료 창을 살펴보니 절반의 시간만 소모한 채 미환비림을 통과한 듯했다.

남천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절진에 빠져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더니 정말 큰일이 나버렸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내가 한 단계 올라섰구나.’

자수정과 특기보다 지금의 깨달음이 더 큰 보상으로 여겨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보상을 받지 않겠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잠시 후 자수정 천 개는 인벤토리에, ‘귀식’은 특기 목록에 등록됐다.

《귀식(龜息)》

- 스스로 활성화가 가능합니다.

- 호흡과 기척을 감춥니다. 고 레벨은 사자(死者)와 동일한 조건으로 위장이 가능합니다.

남천휘는 탄성을 흘렸다.

귀식대법이라면 살수 집단이나 정보 단체에서나 암암리에 전해지는 비전이 아닌가. 재이의 설명처럼 강호의 고수 중에는 스스로 호흡을 끊고, 죽음을 위장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특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운이 좋아.’

남천휘가 입꼬리를 올리는 순간 여지없이 재이가 진실의 몽둥이를 발동했다.

◎ 시스템 발동 기간과 임무 대비 성장 예정치가 평균에 미치지 못합니다. 시스템의 보정으로도 격차가 줄어들지 않으면 페널티로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아닌가.

하나 예전과 달리 얼굴을 구기지 않았다.

남천휘는 묘한 기대감으로 얼굴을 붉혔다.

지금도 또래나 비슷한 레벨보다 우위에 서지 않았던가. 한데 뒤쳐졌던 걸 만회한다면 얼마나 더 성장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재이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특급 강호인이 되기 위한 위대한 한 걸음일 터였다.

“그나저나······.”

남천휘는 공태령과 천수련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댔다. 호흡은 가늘면서 규칙적이고, 가슴도 오르락내리락하며 등락을 거듭했다.

“다행이네.”

그는 망설임없이 절벽 앞에 섰다.

어차피 뒤는 미환비림이고, 앞은 깎아지를 듯한 절벽이다. 외인에 대한 위험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조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끝.

남천휘는 절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상식적으로 이 높은 곳을 오르라고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누누이 말하지만, 재이는 결코 불가능한 걸 퀘스트로 내주지 않았다. 레벨 업 시스템은 특급 강호인으로서의 승급을 최우선으로 했기 때문이다.

“빈틈이 있을 텐데······.”

오감증폭제를 청각과 촉각에 사용했다.

눈을 반개한 채 절벽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걷던 중 희미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수련용 직도 16호를 꺼냈다.

어느새 이놈은 풀베기 전용으로 정해진 듯했다.

열 겹 정도 벗겨내자 제법 바람이 들이찼다.

하나 이제야 겨우 손을 넣을 만큼 벌어졌을 뿐이다. 넝쿨과 이끼로 보아 수십 년, 아니 백 년 이상 막혀 있었던 듯했다.

‘아니, 이런 길로 나를 끌고 왔단 말이야?’

최단 거리로 안내해줬으니 고마워하라는 재이의 말에 다시 한 번 울화가 치밀었다.

안내원도 아니면서 고맙기는 개뿔이다.

퍽! 퍽! 퍽!

사람은 역시 감정의 동물이다.

화를 내니까 칼질은 더욱 격렬해졌다.

촤악!

내력이 담긴 일격에 수십 가닥이 넝쿨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날만한 공간을 통해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쉬이이이이익-

마치 깔때기의 아랫부분에 서있는 듯했다.

남천휘는 걸음을 옮길수록 넓어지는 협곡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협곡의 내부는 평이했지만, 절벽 위에는 여전히 안개가 자욱했다. 마치 이곳에 협곡이 있음을 가리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퀘스트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지도상에 표시된 붉은 선이 있는 한 늦지 않으리라.

남천휘는 퀘스트 내용을 떠올렸다.

- 계곡의 가장 깊은 곳, 그곳에 있다.

자신이 들어온 곳은 정상적인 입구가 아니었다.

아마 반대편의 넓은 공간이 입구였으리라.

그렇다면 목적지는 코앞이다.

아니나다를까 우측 절벽 중턱에 숨겨진 동굴을 발견했다. 위로는 안개가 가려주었고, 아래로는 툭 튀어나온 구조로 인해 쉬이 찾을 수 없는 장소였다.

“후우.”

남천휘는 허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을 앞에 두고 심호흡을 했다.

걸음을 내딛는 순간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마치 안개를 헤치는 기분으로 지나쳤다.

다행히 진법이나 미혼약 같은 함정은 보이지 않았다. 한데 동굴의 깊이는 예상보다 짧았고, 내부에는 물건이라고 할 것이 전무했다. 오감증폭제를 청각과 촉각에 다시 걸고 더듬어봤지만, 바위를 깎아 만든듯한 석탁이 전부였다.

‘석탁에 뭐가 있을 것 같은데······.’

몇 번을 매만져도 이음새나 빈틈을 찾지 못했다.

다만 만질수록 놀라게 된다.

석탁은 오랜 세월 바람과 물에 시달린 것처럼 매끈했기 때문이다.

기물이 분명했다.

남천휘는 혀를 찼다.

“이럴 때 군사가 있으면 참 편했을 텐데······.”

시끄럽기만 했던 대화동과 대두동의 군사가 그리울 정도였다.

‘재이야, 성소를 먹어야겠다.’

하나 재이는 협곡에 들어온 이후 말이 없다.

결국 남천휘는 홀로 궁리를 하다가 다시 동굴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대두동에서 성소를 얻었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입구에 무언가 있을듯했다.

“찾았다! 거봐, 있잖아.”

넝쿨과 이끼 뒤에 가려진 글귀가 나타났다.

남천휘가 학문을 가까이 하지 않았음에도 보는 순간 알 수 있는 글귀였다.

“아.”

눈가의 경련이 느껴질 때까지 글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진(一眞)이 거(居)하여.

욕(慾)을 멀리하고, 치(恥)를 참으며 부끄럽지 않은 나날이었도다. 그러니 사람이 아닌 호랑이로 죽어 가죽을 남기는 것으로 족하다. 가죽을 뒤집어쓴 자는 사람이든, 호랑이든 되지 못할 것이 없으랴.」

대두동에 봤던 글귀와 흡사했다.

조상인 남추가 스스로를 팔진(八眞)이라 칭하고, 삼교일치를 받아들이지 못해 부끄럽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에 일진이라는 자가 남추를 위로하며 글귀를 남겼다.

그 때의 글귀가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게다.

남천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긴다 했다. 한데 단양자는 이름을 남기는 대신 가죽을 남겼단다.’

퀘스트의 설명인 줄 알았던 글귀가 뇌리를 스쳤다.

- 하나의 삶, 그리고 하나의 삶이 교차한다.

가죽을 통해 삶이 이어진다.

그리고 가죽의 정체는 단양자의 비전일 터였다.

몽산의 대두동에 이어 천릉곡에서 또다시 백파도 남추의 흔적이 발견됐다.

“아! 소름 돋아.”

남천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 이거 뭐야? 네가 꾸민 거냐?”

제아무리 남천휘가 운이 좋다고 해도 이처럼 맞아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데 이번에도 재이는 침묵했다.

남천휘는 심호흡을 하며 글귀 앞에 섰다.

‘일단 성소라도 먹어보자.’

하나 알림 대신 경고가 울렸다.

◎ 현보동은 공백지가 아닙니다.

- 성소의 동조화가 불가능합니다.

남천휘는 인상을 썼다.

‘여기 주인이 있다고?’

협곡에 들어서면서부터 느꼈지만, 이곳은 수십 년 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듯했다. 먼지는 곳곳에 가득했고, 넝쿨과 이끼는 제 세상인양 널리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하나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남천휘는 다시 한 번 벽에 새겨진 글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일진이라는 두 글자가 뇌리에 새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대두동에서 봤을 때와 달리 이제는 일진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다.

‘설마 그게 튀어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

일진과 팔진, 삼교일치, 공야청.

몇 가지 단서를 끊임없이 파고든 결과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전진교(全眞敎).

중양자가 창시한 도가의 일맥으로 유불도(儒佛道)는 물론이고, 강호에도 큰 영향을 끼친 문파였다. 속설에 의하면 화산과 무당은 물론이고, 아미파에도 맥이 전해졌다고 하지 않던가.

그 중양자가 전진교의 교세를 넓힌 곳이 바로 산동성이고, 일곱 명의 제자를 거둬 칠진(七眞)이라 칭했다.

‘역사에 팔진은 존재하지 않았거늘······.’

그리고 눈앞의 글귀가 사실이라면 이곳, 현보동의 옛 주인은 중양자의 대제자이자, 전진교의 이대종사인 단양자의 비처가 틀림없을 터였다.

‘할아버지, 도대체 뭐하고 다니신 거예요?’

차라리 산적이었다면 수습하기는 편했으리라.

남천휘는 아직도 ‘VR 모드’ 안에서 남추가 했던 말을 잊지 못했다.

「나는 뜻으로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칼로 사람을 구해야 하네. 오히려 부끄러움은 내 몫일세.」

그 순간 남천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두동에서 남추는 공야청과 모든 것을 나눴다. 한쪽은 교리를 전했고, 다른 쪽은 도법을 전하지 않았던가.

두 사람의 관계는 전진교의 법통일 터였다.

그렇다면 일진과 팔진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 상대를 스승으로 청하고, 스스로 제자를 칭한다.

퀘스트 《천릉곡의 비밀》의 사연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남천휘가 돌아섰다.

그는 뒤늦게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동굴에 발을 들였을 때 피어오른 흙먼지가 여전히 자욱하지 않은가. 마치 경계를 나누듯 벽을 친 모습이다.

퀘스트의 마지막 구절을 읊조렸다.

- 그곳에 있다.

그리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흙먼지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솨아아아아-

흙먼지가 살아있는 것처럼 몸을 휘감았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삐이이이이이이.》

《히든 모드의 연계 특기가 활성화됩니다.》

《백파도 남추의 강렬한 의지가 더해집니다.》

《지정 장소에 남추의 후손이 존재합니다.》

《천릉곡의 비밀에 접속합니다.》

《보조 설정에 대한 접속 권한을 부여합니다.》

《한시적으로 히든 모드 ‘VR’이 해금됩니다.》

흙먼지 속에서 맞이한 두 번째 ‘VR’이었다.

한데 뒤이은 알림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추의 두 번째 생전 영상이 재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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