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허허, 무덤을 파네? (2)
사람이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더라.
당장이라도 어의를 불러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탕약이라도 조제하라고 해야 할 듯했다.
하나 남천휘에게는 천하제일의 탕약이 있지 않던가.
◎ 특기 ‘불굴’이 발동했습니다.
- 평정심과 투쟁심이 소폭 상승합니다.
맙소사!
죽은 사람을 보거나, 수많은 적을 마주할 때나 발동하던 불굴이 떠버렸다.
남천휘는 일양도 왕대만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왕대만은 그걸 보고 긴장했다고 여겼는지 코웃음을 쳤다.
“걱정하지 마라. 나정도 되는 고수에게는 다 보이는 법! 네가 아무리 어설퍼도 길 정도는 잡아줄 수 있느니라.”
남천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됐든 왕대만의 레벨은 61이 아니더냐.
만에 하나 작은 실마리라도 풀어줄 수 있다면 놈의 거만함 정도는 받아줄 용의가 충분했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표식도 없다. 연주도 없다.
하나 하루 전 정확도 50을 넘기지 않았던가.
게다가 북풍이십팔진을 상대하며 훨씬 더 능숙해진 상태였다.
“후우.”
가늘고 긴 숨이 끊기는 순간 앞발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동시에 두 자루의 직도가 교차하듯 전방을 베었다.
초식이 이어질수록 도풍이 몰아쳤다.
남천홍은 그 모습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무공을 등한시 했다고 해도 이미 중양칠도를 대성한 상태였다. 물론 곡부남가에 전해지는 중양칠도였지만, 꾸준히 수련한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중양칠도의 상위 도법이라는 파격도와 진위십이도식 중 전자를 익혔다.
파격도의 성취는 오 성.
그는 둔중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일류급 무인이었다. 하나 그런 그가 봤을 때에도 동생의 무위는 범상치 않았다. 이미 절정에 근접했다는 조상의 말이 진짜였던 것이다.
말로 듣는 것과 직접 보는 차이는 명백했다.
‘절정을 넘어섰을지도.’
그는 슬쩍 왕대만을 쳐다봤다.
왕대만은 처음의 조소를 지운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 대협도 놀랐겠군.’
남천홍은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그가 초빙하고 싶은 무인은 따로 있었다.
하나 그런 무인들은 곡부남가의 초빙을 단칼에 거절했다. 무가도 아니고, 상가로 중흥한 곡부남가의 초대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 중 유일하게 응답한 것이 왕대만이었다.
돈을 밝히는 것이 못마땅하기는 했으나, 절정의 무인인 것은 사실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부디 남천휘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그러던 중 남천휘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동시에 상체를 눕히고, 허리를 비트는 장면이 연속됐다. 두 자루의 직도가 장창처럼 거대한 원을 그리며 주변을 쓸어버렸다.
‘멋지다!’
남천홍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천휘는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무를 이어가고 있지 않던가.
‘나도 참자. 버틸 수 있어!’
이깟 허기 따위에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
남천휘는 전력을 다해 도법과 보법을 펼쳤다.
저런 거만한 자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은 물론이고, 남추와 재이까지 욕보이는 짓이 아니겠는가.
‘이래도 무시할 수 있겠어?’
남천휘는 전력을 다해 직도를 내리쳤다.
촤아아아악!
그 순간 강맹한 도풍이 일었다.
바닥의 눈과 모래가 좌우로 비산했고, 일 장 밖의 나무에 걸린 잎사귀가 흔들렸을 정도였다.
‘나쁘지 않았어.’
그만의 생각이 아니다.
재이 또한 채점표로 남천휘를 인정했다.
◎ 오행군림보 ‘난해’가 완료되었습니다.
◎ 성공률 : 88%. 정확도 : 73%
◎ 합계 등급은 ‘A’ 등급입니다.
페널티 이후 최고점이다.
비천무상도 역시 무공총람(武功總覽)에 등록됐기에 채점이 이어졌다.
◎ 비천무상도 ‘비상’이 완료되었습니다.
◎ 성공률 : 44%. 정확도 : 57%
◎ 합계 등급은 ‘C’ 등급입니다.
자! 이제 별 의미 없는 당신의 평가를 들어볼까?
남천휘는 직도를 거두고 왕대만을 바라봤다.
사제(師弟)의 표정은 극과 극이다.
제자인 무천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평가하는 법이다. 북풍대원보다 못한 그로서는 남천휘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반면 왕대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입까지 슬쩍 벌린 것으로 보아 경악을 금치 못한 듯했다. 근엄한 척하더니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보라. 그냥 두면 침이라도 흘릴 기세가 아닌가.
‘크큭, 그럴 만도 하지.’
하나 이 몸은 61레벨이 감당할 존재가 아니다.
자! 이제 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들어볼까?
“크흠, 나쁘지 않군.”
뭐라고요?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쁘지 않다는 건 그저 그렇다는 말이지?’
재이는 표면적 해석이 그렇다고 확답을 줬다.
남천휘가 어이없어 하는 사이 왕대만은 정신을 차린 듯 말을 이었다.
“혼자 수련한 것 치고는 제법이야. 산에서 만난 노인이 가르쳐줬다고? 사기꾼은 아닌 것 같아. 하나 도의 끝이 너무 지저분해. 초식의 형과 의는 정확해야 해. 그래야 자기가 뭘 하는지 알 수 있거든. 한데 너는 빠름에 집착하여 정확도를 잃었구나. 하긴 어린 아이들은 뭐든 빠르면 좋다고 여기지.”
왕대만은 혀를 찼다.
이제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지도 않다.
놈은 제 평가에 심취한 듯 헛기침을 섞어서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이 새끼, 인정하기 싫구만.’
왕대만의 속내는 뻔했다.
장사꾼 집안의 아들이 몇 달 동안 수련해봤자 얼마나 했을까 싶었으리라. 그저 빤히 보이는 단점 몇 개를 지적하면서 거드름이나 피우면 될 것이라고 여겼겠지. 한데 자신의 예상보다 뛰어난 무위에 배알이 꼴린 것이리라. 거만한 줄은 알았지만, 저처럼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울 줄이야.
“겉모습의 화려함보다 내실을 길러야지. 무공이란 길게 봐야 하는 법.”
남천홍도 이쯤 되자 미간을 좁혔다.
왕대만의 속내야 어찌됐든 남천휘의 무위는 이처럼 과소평가당할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반면 남천휘는 말을 아꼈다.
눈으로는 왕대만을 봤지만, 속으로는 재이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남천휘는 《28대 1》 퀘스트 보상인 특기 1회 승급권에 관하여 질문했다.
‘네 추천은 어때?’
◎ 신안과 쌍수는 ‘A’급 특기입니다.
재이의 추천은 신안을 4레벨까지 올리는 것이다.
하나 남천휘가 특기 1회 승급권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불굴’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부정적인 감정이 섞여드는 것을 방지해주는 대단한 특기였다. 심지어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만큼 신비한 특기이기도 했다.
하나 ‘불굴(不屈)’은 승급할 수 없단다.
◎ 특기 ‘불굴’은 S급 특기입니다.
- 특정 조건을 만족할 시 특정 아이템으로 승급이 가능합니다.
등급 ‘S'라는 말에 모든 의문이 사라졌다.
지금껏 그가 획득한 특기 중 에스 등급은 불굴이 유일했다. 가장 유용하게 상용했던 신안이 ‘A’였고, 그 외에는 모두 ‘B’급 이하였다.
‘지금은 신안부터 올리자.’
남천휘가 신안의 레벨이 올리는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신안이 4레벨로 승급했습니다.
- 상세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 축복받은 확인서 1장 소모.
축복받은 확인서라.
남천휘는 주절주절 떠는 왕대만을 보며 혀를 찼다.
‘저런 놈에게 쓰기는 아깝지만.’
본때를 보여주려면 최소한의 투자는 필요하리라.
일단 왕대만의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 대처법을 떠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
‘확인.’
그 순간 왕대만의 머리 위에 존재하던 정보가 늘어났다.
이름 : 왕대만 (Lv:61)
별호 : 일양도.
총합 : 1440(근력 위주 성장)
이럴 수가!
왕대만의 똥 냄새 나는 주절거림이 상쾌해질 만큼 충격적이다.
능력 수치의 총합을 볼 수 있다니.
게다가 왕대만의 총합이 낮았기에 더욱 충격적이다.
남천휘는 황급히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가상현실에서 비천무상도라는 기연을 얻었다.
그로 인해 내공 수치는 700을 상회했다.
그 때 얻었던 추가 능력치는 고르게 분배한 상태였다. 그렇게 모든 수치를 300으로 맞췄고, 내력 수치는 현재 750이다.
그 결과 총합은 1950.
‘왕대만의 싸가지 없는 언행과는 별개로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지?’
◎ 레벨 업 추가 포인트는 대상자에게만 허락된 보상입니다. 일반인은 각자의 수련 정도와 깨달음으로 인한 능력 수치를 지닙니다.
듣고 보니 이해가 간다.
이해가 갔을 뿐 미안한 마음은 코딱지만큼도 들지 않았다. 만약 북풍대주인 조상의 수치를 봤다면 조금은 미안했을 수도 있겠다. 어찌됐든 그가 이십 년 간 수련한 것을 백일 만에 따라잡은 건 사실이 아니던가.
하지만 왕대만이라면 차라리 잘됐다.
게다가 이 정도 격차라면 두 사람 사이의 우열은 자명했다.
‘그냥 조져도 되겠어.’
자신을 무시한 건 괜찮았다.
하나 곡부남가와 소가주를 무시하고, 비천무상도와 오행군림보를 하찮게 여기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나를 무시한 것도 기분 나쁘네.’
왕대만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남천휘의 마음속에서.
이제 남은 건 무대 아래에서 젠체하는 왕대만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건 쉬웠다.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자존심을 챙기는 작자가 아니던가. 슬슬 긁기만 해도 제 분에 못 이겨 사고를 쳐버릴 터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혜 수치 300으로 짜낸 선방이다.
왕대만은 선수필승이라는 말이 무색할만큼 빠르게 반응했다.
“뭐라?”
하나 남천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 무공이 그렇게 부족한 겁니까?”
“허허!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제 생각에는 아닌 것 같은데요.”
왕대만이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제자를 향해 곡괭이를 건네며 땅을 더 깊이 파라고 시키는 것이 아닌가.
“무천아! 내가 누구더냐?”
제자 무천이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호통을 쳤다.
“삼공자! 정신 차리시오. 사부는 일양 땅에서 군림하다시피하신 고수요. 일양의 모든 대소사를 처리하고, 만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명숙이란 말이외다.”
일양도의 유례가 그거였냐?
‘나는 또 무슨 양기 충만한 도법이라도 익혔다고.’
남천휘가 혀를 차는 사이 무천이 말을 이었다.
“한데 고작 몇 달의 수련으로 뭐라도 된 듯싶으시오? 잘 못 생각해도 한참을 잘못 생각하셨소. 사부는 신공부의 초빙을 받은 고인이거늘! 소가주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내방한 사부에게 이 어찌 무례한 언사요?”
손 안대고 코푸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모든 건 계획대로다.
그런데 사부보다 제자 놈이 더 밉살스럽네.
그러고 보면 소가주를 밖에 세워놓은 것도 저 놈이 아니던가.
‘사제라면 묻힐 때도 함께여야지.’
남천휘는 속내를 숨긴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 대협의 고명함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나 제게도 무공을 가르쳐주신 분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생각 같아서야 다짜고짜 두들겨 패고 싶다.
하지만 소가주가 직접 나서서 초빙한 상대가 아닌가. 자칫 꼬투리를 줬다가는 곡부남가와 소가주의 평판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다.
“제가 익힌 비천무상도법은 왕 대협의 그······.”
남천휘가 말끝을 흐리자, 왕대만은 부르르 떨며 얼굴을 붉혔다.
눈치 빠른 무천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곡부에 살면서 광풍신도를 모르다니. 견식이 짧아도 저리 짧을 수가 있나.”
다른 곳에서는 충분히 통했으리라.
하지만 이곳은 곡부남가였고, 마주한 것은 남천휘다.
게다가 남천휘로서는 뺨을 내밀고 때려달라고 용을 쓰는 형국이 아니던가.
“하룻밤 재워줬더니 감사할 줄은 모르고, 너무 무례하군. 아까는 소가주를 무시하더니, 이제는 나까지 얕보려는 건가? 이건 완전히 뒷골목······.”
남천휘는 목소리를 낮춘 채 읊조렸다.
“무뢰배가 아닌가.”
목소리를 한껏 낮췄지만, 왕대만이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기꺼이 무대 위에 올라 남천휘를 향해 외쳤다.
“어린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구나! 감히 장사치 주제에 나를 욕보이려 해? 좋아! 솔직히 말해주마. 네 놈의 무공은 쓸 만하다. 아주 괜찮아 보여. 하나! 보검은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 법, 네 꼴은 돼지 목의 진주와 다를 바가 없다.”
“말씀이 과하시군요.”
왕대만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겁이라도 나느냐?”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도를 뽑았다.
“하나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 오늘 내가 네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마!”
남천휘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왕대만을 무대 위로 올리기 위해 많은 방책을 마련했다. 그것을 차근차근 실행하려는데 저쪽에서 알아서 올라온 게다.
“말씀하셨다시피 제 도는 아직 영글지 못했습니다.”
남천휘의 말은 겸손한 듯하나 매번 왕대만의 심기를 자극했다.
“크하하하! 네 놈이 내게 눈 먼 칼을 논해? 좋다! 내가 네 칼에 피를 본다면 형님이라 부르마! 기꺼이 동생을 자처하겠어.”
솨아아아아-
그 순간 왕대만의 곡도가 푸르스름한 도기(刀氣)로 휘감겼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기 때문이 아니라 왕대만의 호언장담이 원인이었다.
“진심이십니까?”
“나 정도의 고수가 빈 말을 할 듯싶으냐? 하나 내가 칼을 뽑았으니 네 놈의 팔 한 짝 정도는 가져가야겠다. 선처를 베푸는 의미로 왼팔을 자르도록 하마!”
와! 이거 도발했다고 팔을 자른다네.
아이고, 감사해라.
있지도 않았던 죄책감 대신 승부욕이 불타오르네.
“저 역시 가문의 명예가 달린 일이니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특기 변설과 지혜 수치가 어우러지니 혀에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러운 언사가 끊이지 않았다.
왕대만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채 읊조렸다.
“크흑! 삼 초를 양보해주마.”
이런 상황에서도 거만함을 지우지 않는 모습에 기가 찰 따름이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남천휘는 가볍게 땅을 박찼다.
‘기선제압이지!’
일수에 전력을 다했다.
왕대만은 정면으로 공격하는 남천휘를 보며 조소를 흘렸다. 하나 두 사람의 도가 충돌하는 순간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다.
“컥!”
남천휘의 상체는 앞으로 기울었고, 직도의 끝은 바닥을 가리켰다. 그리고 왕대만은 세 걸음이나 밀려난 채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삼 초 버틸 수 있겠어?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