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허허, 무덤을 파네?
40, 허허, 무덤을 파네?
뭐랄까?
요즘은 좋은 일만 생기는 듯하다.
무적자로 전직도 했고, 무쌍의 힘을 빌렸지만 도기도 발산했다. 그 중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은 당연 형과의 관계였다.
지난 십 년 간 소 닭 보듯 하며 지내지 않았던가.
속내야 어땠든 마음이 편할 리 만무 했다.
하나 이틀 전의 술자리를 통해 상당부분 벽을 허물고, 골을 메웠다.
남천홍은 남천휘보다 그 애틋함이 더했다.
십 년 간 못해줬던 걸 하루아침에 해주려고 애쓰는 모습은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등도 내줬고, 이렇게 이른 아침 함께 별채를 찾아온 것이다.
한데 좋았던 마음은 한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아직 기침 전이신가?”
삭막한 인상의 청년은 대충 고개를 꾸벅이더니 대꾸했다.
“사부께서는 늦은 시간까지 수련을 하셨습니다. 제가 소가주의 방문을 알렸으니 금세 의관을 정비하시고 나오실 겁니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수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핑계를 대려면 술병이라도 치워놓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자 근처에는 즉묵노주가 담겼을 술병이 십여 개나 나뒹굴고 있었다.
“고맙네. 그럼 잠시 기다리도록 하지.”
남천홍은 사람 좋은 웃음을 남긴 후 천휘를 이끌고 정자로 향했다.
“형, 뭐 저런 것들을.”
“어허. 귀하게 모신 분이야. 너를 위해 신공부로 가던 걸 겨우 초빙해서 모셔왔단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보자.”
“내가 형 보고 참는다.”
남천휘가 한 숨을 흘리자, 남천홍은 그게 또 그리 좋았나 보다. 남천홍은 시동이 가져온 다구를 직접 사용해서 찻물을 내어줬다.
“마셔라.”
남천휘는 마다하지 않았다.
냉기 저항이 제법 쌓였기에 추위의 영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 십 년 동안 묵혀둔 호의를 처리하려면 한 시도 놀릴 틈이 없다.
남천홍은 찻물을 홀짝이는 동생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구워진 편육을 마주할 때나 보였던 훈훈한 미소였다.
“일양도 왕 대협은 산동성 동부에서 명성을 떨치신 분이야. 일문을 꾸려도 될 만큼 인정받은 고수지. 그분에게 작은 가르침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기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게야.”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형의 말이 옳다.
어린 시절 절정의 고수에게 추궁과혈을 받는 비용이 은자 서른 냥이었다. 기초를 잡아주는 건 수백 냥이었을 테고, 무공을 전수받으려면 몇 배의 돈을 더 내야 했으리라.
그만큼 절정의 고수는 대단했다.
그들의 깨달음을 조금이나마 얻는 것만으로도 기연이라 칭할 정도였다. 아마 남천홍이 일양도를 하루 재우기 위해 소모한 비용은 은자 천 냥을 훌쩍 넘겼으리라.
그것만 했을까?
밥도 주고, 술도 주고, 제일 좋은 방도 줬겠지.
어떤 곳은 기녀를 불러 방에 넣어주기도 한다더라.
어처구니없지만, 그런 게 당연했다.
절정의 무인은 주먹으로 돌을 쪼개고, 쇠를 우그러트리며 한 걸음에 담장을 넘었다.
범인이 보기에는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런 줄 알았지.’
하나 재이를 얻고 조금이나마 강호를 엿보니 그런 것도 아니더라.
은신처로 향하기 전 만났던 비공회와 살류방의 낭인들 중에도 절정이 있었다.
하나 남천휘는 그들을 손쉽게 쓰러트렸다.
재이의 힘이었다.
한데 우습게도 그들보다 레벨이 낮은 조상은 만만치 않았다. 조상의 현재 레벨은 36, 하나 여전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왠지 꺼려졌다.
어제 《28대 1》 퀘스트를 끝내고 잠시 조상과 대화를 나눴다.
남천휘는 ‘절정이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물었다.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절정이라고 해서 다 같은 절정이 아니란다.
좋은 스승과 좋은 무공, 거기에 영약이 더해진다면 대부분 절정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조상은 그 모든 것을 편법이라 칭했다.
남의 도움을 받아 절정에 오를 수는 있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 단정 지었다.
- 절정의 반열에만 오르면 어디를 가든 대접을 받을 수 있지요. 하나 강호에서 절정이란 하나의 기준점에 불과합니다. 이제 뭘 해도 되겠구나. 어디 한 번 해보렴. 이런 느낌이지요. 하나 그 다음이라고 알려진 초절정은 어떠할까요?
남천휘로서는 가보지 못한 경지였다.
심지어 무쌍 모드로 인해 능력수치의 총합이 8천을 넘겼을 때에도 초절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상 또한 가보지 못했기에 가늠하여 말할 뿐이라 했다.
- 강호의 알려진 무인 중 대부분은 여전히 절정에 머뭅니다. 오롯이 초절정의 고수라 하면 신공부와 황보세가, 청도문을 통틀어도 열 명이 채 되지 않을 겁니다.
산동성의 인구만 해도 수십만이다.
아니, 어쩌면 백 만을 넘길 수도 있으리라.
관원이 아닌 이상 호구를 온전히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찌됐든 그 많은 사람 중 초절정의 무인은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단다.
남천휘로서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일양도는 조 대주보다 나을까?’
밤새 술을 마신 후 기어 나올 일양도에 대한 기대감은 높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천휘가 봤을 때 조상은 진짜였다.
여가 시간을 모조리 수련에 투자했다.
심지어 자면서도 초식을 궁리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일체의 편법 없이 고된 수련을 통해 차근차근 경지를 밟아나간 끝에 절정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조상이야 말로 40레벨이 아니라 50레벨의 무인과도 대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랑은 성장 과정도 완전하게 다르지.’
조상을 자신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남천휘는 재이를 통해 빠르게 성장했다.
연주와 표식이 그 증거였다.
하나 조상은 처음부터 연주와 표식 없이 수련을 한 셈이다. 그렇기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들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끝끝내 나아갔고, 이제는 연주와 표식 없이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였다.
그렇기에 진짜라고 여겼다.
그런 사람 밑에서 배운 벽추도 그러했다.
북풍대는 서로의 깨달음을 아낌없이 공유하지 않던가. 그러니 북풍대 내에서 절정의 무인이 나온다면 그 또한 만만치 않은 존재이리라.
‘그러고 보면 북풍대는 단 한 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구나. 그런 사람들만 모으는 것도 다 조 대주의 대단함이겠지.’
그리고 그만큼 곡부남가가 옳은 길을 걷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형.”
남천홍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확실히 살이 쪄서 그럴 뿐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시비들이 살만 빼면 천하제일의 미남자가 될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 대주, 아니 북풍대의 월봉을 좀 올려주는 건 어때?”
남천휘는 형의 눈치를 봤다.
가문의 재정과 관계된 일이니 이러한 제안은 월권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남천홍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되물었다.
“얼마나?”
남천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폈다.
“두 배?”
그 순간 잠자코 있던 재이가 알렸다.
◎ 성인이 마땅히 지녀야할 경제관념에 비해 뒤처지는 부분이 발견됐습니다. 지속적으로 지식의 부족함을 드러낸다면 지혜 수치가 소폭 하락합니다.
뭐라고? 이게 미쳤나.
능력 수치가 하락하는 경우도 있더냐?
그나저나 이제는 경고도 해주고, 재이 많이 착해졌네. 일단 두 배라고 던지기는 했으나, 돌이켜보니 재이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월봉의 두 배는 비단 북풍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월봉을 건드리는 순간 곡부남가에 속한 모든 가솔들에게 지급되는 금액을 수정해야 했다.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줄 수도 없지 않은가.
하여 남천휘는 자신의 말을 철회하려 했다.
그러나 남천홍은 남천휘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자한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되물을 뿐이다.
“왜?”
남천휘는 눈을 깜빡였다.
형을 보고 있자니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으면 제대로 기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형이라면 무슨 대답을 해도 비웃거나, 탓하지 않을 듯했다.
“강하니까, 그리고 믿을 수 있으니까.”
남천홍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총관에게 전하마. 그리고 북풍대에는 내 이름으로 술과 고기를 내리고, 비운고의 재료도 양껏 가져갈 수 있도록 전하겠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저 조상과 북풍대가 고생하는 듯하여 했던 말이다. 한데 남천홍은 자신의 말은 마치 군사가 오랜 숙고 끝에 제안한 것처럼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그 동안 북풍대와 가장 많이 어울렸던 게 너다. 그런 네가 그렇다면 두 배를 주는 것이 마땅하지. 하나 나는 소가주잖아. 그럼 너보다 더한 배포를 보여야 형 노릇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진지한 대답의 마무리는 농담이다.
남천휘는 키득거리며 되물었다.
“크크큭, 겨우 그런 이유로? 우리 집에 돈이 그렇게 많아?
남천홍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늘 식사량은 평소의 오분지 일이었어. 앞으로도 소식할 거다. 그럼 충분해.”
이건 왠지 농담 같지 않다.
설득력이.
‘있어!’
남천휘는 목적을 이뤘기에 다시 별채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안 나왔네?’
남천홍은 소가주로서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였다. 그리고 이제 형으로서도 충분히 멋있고, 따르고 싶었다. 그뿐 아니라 향후 혼인을 한다면 좋은 남편이 될 것이고, 자식을 낳으면 좋은 아빠가 되기에 충분한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 돈도 주고, 밥도 주고, 술도 줬는데.
예의가 없는 건지, 거만한 건지.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몰라도 형은 좀 추울 텐데.’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짜증 섞인 눈빛이 향한 건 별채의 입구에 앉아 있는 청년이었다.
‘제자라고 했던가?’
머리 위에 레벨은 27.
그걸 제외하면 딱히 눈에 띌 것이 없는 자였다.
북풍대에서 20레벨 중반의 대원을 데리고 와도 저보다는 나을 듯했다.
일양도에 대한 기대치는 바닥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남천휘는 반 각 후 처소의 문을 열고 나타난 일양도를 보고 자신의 예상이 옳았음을 직감했다.
“크흠! 소가주. 미안하게 됐네. 지난밤에 생각하던 것이 있어서 말이야.”
남천휘는 미간을 찡그렸다.
‘술을 많이 마셔서 혀가 녹았나? 왜 반토막이야.’
하나 남천홍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일양도와 대화를 나눴다. 반면 남천휘는 냉담한 눈빛으로 일양도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레벨은 61인데 더럽게 거만하네.’
일양도 왕대만은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헛기침을 하는 게 버릇인가 보다. 거만함이 줄줄 흐르는 언행에 복색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다.
곡부남가는 물론이고, 소가주조차 눈 아래로 보는 것이 분명했다.
“크흠, 이 아이인가?”
일양도의 눈빛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다.
그 때 제자가 슬그머니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남천휘의 무례한 행동을 고자질하는 듯하다.
하나 일양도는 헛웃음을 지으며 나직이 한 마디를 읊조렸다.
“크흠, 딱히 자질이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말은 보통 속으로 하지 않던가?
밥값 말고 돈값부터 해라.
이 욕심 많고, 거만한 늙은이야!
남천홍이 슬쩍 끼어들었다.
“수련 기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하나 본가의 대주가 평가하기로 근래에 보기 드문 자질을 지녔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왕 대협께 지도편달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부디 신경 써서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하나 일양도 왕대만은 남천홍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클클, 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지. 강호의 신성이란 늘 존재해. 하나 며칠만 지나면 기억에서 지워지는 게 부지기수란 말이지. 자! 정오에는 출발해야 하니 일단 보자고.”
남천휘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일양도가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정오까지 남은 시간은 반 시진 남짓이다. 그야말로 흉내만 내다가 떠나겠다는 말이 아닌가.
하나 남천홍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천휘야. 인사드려라.”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들이받고 싶었다.
하지만 형의 극진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그가 무례하게 굴면 비난은 소가주에게 향할 것이 분명했다.
“남천휘라고 합니다.”
“그래. 뭘 익혔느냐?”
다짜고짜 하대.
하나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미 충분히 나빴고, 더러웠다.
“비천무상도와 오행군림보를 익혔습니다.”
그 순간 일양도가 박장대소를 했다.
“크하하하! 비천 뭐? 광오하구나. 광오해. 겉멋을 추구할 나이라고는 하나 똥인지, 된장인지는 알고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무천아. 지난 번 표국주의 자식은 뭘 배웠다고 했지?”
무천이라 불린 제자는 조소를 흘렸다.
“천지무적검을 익혔다고 했지요.”
“클클, 그래도 그 놈보다는 조금 겸손하구나. 어디 실력도 그런가 보자고. 아이야, 어디 한 번 그 대단한 도법을 구경이나 해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