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영혼의 이끌림.
20, 영혼의 이끌림.
남천휘는 부끄러움을 당당함으로 포장했다.
‘퀘스트 완료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다!’
그 덕에 이미 오십 합을 넘겼다.
“후우.”
벽추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호흡을 조절했다.
남천휘는 그런 벽추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역시 벽추의 공세를 버틸 뿐 이겨내지 못했다.
연계 퀘스트까지 성공하려면 승리는 필수였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채챙!
그 사이 벽추가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왔다.
남천휘는 황급히 직도를 사선으로 눕혀 받아쳤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직도의 내구도가 심각하게 하락했습니다.
◎ 내구도가 바닥나면 무기는 산산조각이 납니다.
‘빌어먹을!’
그러고 보니 수련용 직도의 내구도 3이었던가.
황급히 장비창을 열어 직도를 확인했다.
남천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구도는 1까지 떨어졌고, 작은 그림처럼 존재하던 직도의 색이 새빨갛게 물든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깨지겠는 걸.’
퀘스트 시간에 좇기다보니 병장기 관리는 생각지도 못했다. 마치 군졸이 전쟁터에 창도 없이 나간 꼴이 아닌가.
전쟁터였으면 아마 즉결 처분 당했겠지.
그 순간 남천휘의 뇌리에 한 가지 계책이 떠올랐다.
‘산산조각이 난다고?’
만약 재이의 경고가 없었다면 대경실색했으리라.
벽추도 놀라겠지만, 당사자에 비할까.
하나 남천휘는 알고, 벽추는 모른다.
이 작은 차이가 기회를 만들어주리라.
‘산산조각 날 때 반격하자.’
채채챙!
남천휘의 공세가 조금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래야 직도가 깨졌을 때 벽추에게 접근하는 것이 용이하리라.
벽추 또한 여력을 남기지 않았다.
그 역시 끝낼 시기가 찾아왔음을 직감한 게다.
그리고 마침내 직도와 검이 부딪치는 순간 기회가 생겼다.
쩌저적-
널찍하던 도신(刀身)에 거미줄처럼 균열이 일어났다.
그 순간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도편(刀片)이 비산했다.
째쟁!
벽추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며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남천휘가 상체를 잔뜩 낮춘 채 벽추의 가슴쪽으로 접근했다.
권장법을 익힌 적은 없다.
하나 팔꿈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흉기가 아니던가.
‘됐다!’
남천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벽추는 절정을 앞둔 고수가 아니던가.
그는 언제 놀랐냐는 듯 상체를 비틀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남천휘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무기를 잃은 이상 이 기회를 놓치면 남은 것은 패배뿐이다.
‘빌어먹을!’
그 순간 천상의 선녀가 노래하는 듯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13레벨이 됐다.
북풍대 부대주인 벽추와 비교하면 절반에 불과했다.
잘 춰져야 이류 무인쯤 될 터였다.
하나 남천휘에게 있어서 12가 13이 되는 건 단순한 레벨 업에 그치지 않았다.
레벨 업 알림이 울리는 순간 지쳤던 몸에 활력이 생겼다.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청량한 기운이 전신을 장악했다.
마치 고수가 한 시진에 걸쳐 열심히 추궁과혈을 해줬을 때에나 느낄 법한 쾌감이다. 그 효과는 2할의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적선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헉!”
벽추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천휘는 마치 이제 시작이라는 것처럼 가속했다.
기껏 벌려놨던 거리가 한 순간에 좁혀졌다.
‘아직도 이런 힘이!’
이번만은 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벽추는 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무릅쓰고 상체를 비틀었다.
콰직!
하나 남천휘의 팔꿈치가 이미 벽추의 늑골을 두들긴 후였다.
“크흑!”
벽추는 신음을 흘리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세 걸음이나 밀려난 그는 오만상을 지은 채 상체를 웅크렸다.
“늑골에 금이 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남천휘가 당황했다.
자신의 기습이 이처럼 효과를 볼 줄은 몰랐다.
뿌듯한 마음도 잠시였다.
“제가 힘 조절을 못했네요.”
벽추는 남천휘의 사과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제가 삼공자를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는 이내 허리를 펴고 심호흡을 했다.
“제가 졌습니다. 그간 중양칠도에 관해 의문이 많았는데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군요.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아닌데. 약 빨고 이긴 건데요.
하나 벽추는 패배의 그림자를 금세 벗어던졌다.
“잠시 운기조식을 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지요.”
어차피 생사투를 벌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무가 끝났으니 복기를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벽추는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남천휘 역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어차피 레벨 업을 통해 대부분의 수치가 회복된 상태였다. 하나 퀘스트 완료로 인한 보상을 확인할 차례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운기조식을 하는 척하며 상태창을 열었다.
현재 스텟은 지혜를 제외하면 모두 100이다.
남천휘는 레벨 업 보상으로 지급받은 추가능력치를 통해 지혜를 상승시켰다.
‘100이 됐을 때 뭐 하나만 주라.’
지혜 수치가 올라갈수록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리고 지혜 100을 찍는 순간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띠링-
됐다! 예상대로야.
◎ 모든 스텟 100, 누적 스텟 500을 돌파했습니다.
- 특기 모드 1차 조건이 충족됐습니다.
- 레벨 15 달성 시 2차 조건이 충족됩니다.
특기(特技)라고?
어디서 본 듯하다 했더니 상태창 하단에 위치한 하위 목록이 아닌가.
▼ 능력(有) ▼ 장비(有) ▼ 무공(有)
▼ 특기(無) ▼ 비책(無) ▼ 인맥(有)
남천휘는 여섯 개의 하위 목록 중 지금껏 위쪽의 세 가지만 활용했다. 인맥은 가족이 전부였고, 특기와 비책은 모두 잠겨 있었다.
한데 그 특기가 열린다는 것이다.
‘특기가 뭐하는 거지?’
현재 레벨에 허용되는 정보가 아니라는 말이 돌아왔다.
하나 남천휘는 실망하는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재이의 평소 습성을 돌이켜봤을 때 별 것 아니었다면 설명을 해줬으리라.
‘숨길 만큼 대단하겠군.’
게다가 2차조건 또한 달성이 코앞이다.
보상이 좋다.
남천휘는 기분 좋게 퀘스트 보상을 확인했다.
‘맙소사!’
‘위험해져볼까?’의 보상은 세 가지였다.
가장 먼저 회복제가 추가됐다.
‘때마침 적선단과 벽선단이 나오네.’
이제 인벤에는 적선단과 벽선단이 다섯 개였고, 녹선단은 그대로 두개였다.
이미 적선단과 벽선단을 통해 몇 번의 위기를 넘기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회복제의 추가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두 번째는 무기강화주문서였다.
‘그림의 떡이라더니······.’
무기가 있어야 강화라도 하지 않겠는가.
세 번째 보상은 숫돌이다.
남천휘는 미간을 찡그렸다.
뜬금없이 숫돌이라니.
《정제된 숫돌.》
- 무기의 내구도 30을 즉시 회복합니다.
즉시라는 표현은 마음에 든다.
하나 아쉬움만 커졌다.
이 역시 제대로 된 무기가 있어야 쓸모가 있는 아이템이 아니던가.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인벤을 확인했다.
- 무기강화주문서x3
- 갑옷강화주문서x1
- 적선단x5
- 벽선단x5
- 녹선단x2
- 축복받은 확인서x4
- 숫돌x3
예전보다 인벤이 풍부해졌다.
하나 지금 당장 쓸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나마 두 번째 퀘스트 보상이 낫군.’
‘어쩐지 이기고 싶은 오늘’의 보상은 말 그대로 경험치 획득을 상승시켰다.
《중급 경험치 물약》
- 하루 동안 수련에 대한 경험치가 200% 상승.
남천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물약을 쓰고 하루 종일 돌리면 15도 찍겠는 걸?’
그래, 좋게 생각하자.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은 셈이다.
‘아! 그러고 보니 비운고에서 무기나 골라야겠네.’
남천휘는 싱글벙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치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부족하면 채워지고, 없으면 떡하니 나타난다.
재이의 등장으로 인해 삶의 질이 변했다.
‘아주 칭찬해.’
잠시 후 벽추가 다가왔다.
그는 비무를 잊은 듯 평소의 표정을 보였다.
“이제 비운고에 들어가시겠습니까?”
“기꺼이!”
남천휘는 싱글벙글 웃으며 벽추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남천휘는 비운고에 들어올 때 장부를 받았다.
비운고에 존재하는 물건을 품목 별로 정리해놓은 장부였다.
입구에는 약초를 쌓아놓았다.
온갖 약재가 뿜어내는 향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익숙한 약재가 눈에 들어왔다.
황기(黃耆)다.
고기를 먹을 때 첨가하는 약재다.
남천휘는 토끼탕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고기에는 무조건 황기라고 외치던 녀석이 있었지.’
제 딴에는 재밌으라고 한 듯 고기를 구울 때마다 황기를 들고 달려와 ‘황기 주문하신 분?’이라고 외치곤 했다. 녀석은 심지어 개구리나 메뚜기를 구워먹을 때에도 황기를 가져왔을 정도였다.
지금은 뭐하고 있으려나?
‘절권인가 무슨 권법을 배우러 간다더니······.’
너 또한 무소식이 희소속이리라.
건강하게 살고 있으렴.
인연이 닿는 다면 언젠가 다시 보자고. 친구.
약초 너머에는 돈이 궤짝으로 쌓여 있다.
하나 힐끔 쳐다본 후 그대로 지나쳤다.
‘1점짜리는 통과!’
금원보나 은자는 VIP 포인트로 적립해봤자 1점 밖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쓸모없는 물품이다.
남천휘의 곁을 지키던 벽추는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만금이나 되는 재화를 길 가의 돌처럼 여기는 사내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조상이나 자신조차 비운고에 들어왔을 때 금은(金銀)을 보고 넋을 놓지 않았던가.
‘삼공자의 평정심이 대단하군.’
과연 겉보기와 다른 훌륭한 사내인 듯했다.
벽추는 공손한 자세로 남천휘의 뒤를 따랐다.
‘멋진 남자야.’
이제야 막 총관과 조 대주가 왜 남천휘를 높이 사는지 알 듯했다.
그 다음 공간은 꽤 널찍한 장소였다.
병풍과 자기, 비단이나 그림과 같은 물건들이 목록 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남천휘는 가장 비싸 보이는 몇 가지를 확인한 후 탄성을 흘렸다.
‘호오! 가치 150이라.’
이걸 포인트로 적립하면 몇 점이나 나올까?
하나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무기였다.
결국 남천휘는 무기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십팔반 병기를 비롯해 수십 자루의 직도를 보고 있자니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렇지! 여기가 천국이로구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제대로 된 무기를 고르는 거다. 이야기책만 봐도 주인공과 무기의 교감은 좋은 소재가 아니던가. ‘겉은 낡았지만, 실제로는 명검이었다.’라는 거다.
영혼의 이끌림.
그 정도는 되어야 무기강화주문서를 아낌없이 도배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데 그 순간 남천휘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기가 있었다.
“아······.”
평범한 직도(直刀)였다.
하나 평범함과 비범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대나무처럼 곧게 뻗은 도신(刀身)이.
호롱불에 따라 예기(銳氣)를 번쩍이는 날이.
보도(寶刀)보다 더 큰 화려함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손잡이의 붉은 가죽이 손짓을 하는 것처럼.
사정없이 놈을 잡아 뽑았다.
‘스릉’소리를 내며, ‘스르릉’소리를 내며.
‘이거다.’
직도의 손잡이부터 도신의 끝까지,
아찔한 시선이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내 도였다.
남천휘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확인.’
띠링-
◎ 해당 무기의 가치는 7입니다.
아씨, 영혼의 이끌림은 개뿔.
남천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직도를 내팽개쳤다.
내 감을 믿지 말고, 내가 믿는 재이의 감을 믿자.
잠시 후 한결 겸손해진 목소리로 병장기의 가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