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5화 (15/305)

10, 단지 한 번 봤을 뿐인데. (2)

그 순간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마치 수백 개의 바늘이 몸을 찌르는 듯한 고통 때문이다.

그러나 보였고, 들렸으며, 느껴졌다.

‘내가 잘못 봤구나.’

적은 남천휘의 예상보다 강했다.

처음 당한 자가 약했을 뿐 다른 자들은 조상보다 윗줄이었다.

봉황곡은 강호칠대금문에 손꼽힐 만 했다.

남천휘는 백봉의 표홀한 움직임과 세밀한 수법을 모조리 눈에 담았다. 그녀는 적의 변칙적인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더니 곧장 빈틈을 파고들었다.

쉬이이익!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위력을 발휘했다.

단순히 빠른 것이 아니야.

푹푹!

단순히 강한 것이 아니야.

푹!

마치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듯 더없이 자연스러운 광경이 연이었다. 그럴 때마다 적은 피를 흩뿌리며 튕겨나갔다.

‘엄청나다!’

물론 남천휘가 그녀의 움직임에 담긴 묘리를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천휘는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아들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저런 것이 가능하구나.’

‘될까?’와 ‘된다!’

이것이 지닌 의미는 하늘과 땅차이다.

한 마디로 바다를 보지 못한 자는 바다를 설명할 수 없는 법이다.

남천휘는 지금 망망대해를 마주한 상태였다.

“아······.”

눈은 어느새 새빨갛게 충혈 됐고, 피부는 추위에 시달린 사람처럼 닭살이 가득했다. 게다가 귓불은 쉴 새 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었다.

‘단지 한 번 봤을 뿐인데······.’

세상이 달리 보였다.

그야말로 안계(眼界)를 넓히는 기연(奇緣)이었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안계를 넓힘으로써 사고의 깊이가 달라졌습니다.》

《지혜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지혜가 +1 올랐습니다.》

《지혜가 +1 올랐습니다.》

《지혜가 +1 올랐습니다.》

《지혜가 +1 올랐습니다.》

《지혜가 +1 올랐습니다.》

..

.

*

지혜(智慧)가 올랐다는 알림은 서른 번이나 반복된 후에야 멈췄다. 그리고 알림이 끝났을 때 백봉의 검이 매혹대 조장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촤악!

백봉은 적을 모조리 쓰러트린 후에야 남천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적을 상대함으로써 몸이 풀린 듯 오히려 활력이 넘쳤다.

반면 남천휘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안색은 하얗게 질렸고, 연방 거친 숨을 흘렸다.

하나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싸움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기에 오감증폭제를 중첩 사용한 여파도 작았다.

“크흑.”

남천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가슴을 움켜쥔 채 기둥에 몸을 기댔다.

“가슴이. 가슴이.”

백봉은 가볍게 몸을 날려 남천휘를 부축했다.

“은공! 괜찮으신가요?”

남천휘는 팔꿈치를 찌르는 뭉클한 감촉에 더욱 미간을 좁혔다.

‘빨개지면 안 돼!’

여기서 얼굴을 붉혔다가는 연기한 보람이 없다.

한데 백봉이 슬쩍 몸을 떼는 것이 아닌가.

‘걸렸나?’

남천휘가 슬쩍 눈치를 보는 순간 백봉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은공의 옷에 피를 묻히다니······. 죄송합니다.”

괜찮은데.

다행히 그녀의 눈빛은 애절했다.

눈시울까지 붉히는 것을 보아 미안해하는 마음이 여실히 전해졌다. 아무래도 남천휘가 생각보다 크게 무리를 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잠시 운기행공을 하면 괜찮습니다.”

싸움을 지켜보면서 하도 침을 삼켜서 그런지 목이 바짝 마른 상태였다.

덕분에 꽤 멋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은공.”

남천휘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가야 할 곳이 있지요?”

백봉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걸 어떻게?”

백타선자는 백봉을 야운산에서 발견했다는 소식에 그럴 줄 알았다며 달려 나가지 않았던가. 백봉은 어딘가로 향하던 중이고, 봉황곡은 그 뒤를 쫓는 것이 분명했다.

지혜 수치가 30이나 오른 덕분에 찾아낸 핑계였다.

‘머리가 좋아지니까 기억력도 살아나는구나!’

한데 이 여자, 은근히 귀가 얇다.

남천휘는 두루뭉술하게 대꾸했다.

“전대의 인연이라고 합시다. 그것보다 봉황곡을 되돌려 놓으세요. 그게 우선입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소곡주가 장로한테 쫓기고 있는 데 정상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귀만 얇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빗장도 허술하다.

사업이나 도박은 하지 마.

‘넌 분명 패가망신할 거야.’

남천휘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백봉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홀로 쫓기던 중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감회가 새롭기도 할 터였다.

“은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봉황곡은 변질됐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몰래 키우시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게 배신자들과 함께 했겠지요.”

그랬냐?

이거 너무 큰 비사에 엮이는 것 같은데.

“연 소저.”

이렇게 된 이상 아예 대놓고 불렀다.

“네.”

“내 몸은 추스를 수 있으니 어서 가세요.”

“하나 은공을 두고 어찌······.”

남천휘는 한결 나아진 호흡으로 대꾸했다.

“적은 내 존재를 모릅니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을 하세요.”

백봉은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고 망설였다.

남천휘는 아쉬움을 무릅쓰고 백봉의 품에서 벗어났다.

“우리의 인연은 이제 시작입니다.”

백봉은 남천휘가 벗어났음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쪽 무릎을 꿇더니 검을 거꾸로 쥔 채 포권을 했다.

“제 이름은 연하연입니다.”

이쯤 되면 통성명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남천휘입니다.”

연하연은 남천휘를 뚫어져라 응시한 채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은공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다시 돌아와 은공께서 말씀하신 인연의 끈을 이어가겠나이다.”

너무 거창하게 다짐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결연한 눈빛을 번뜩이는 연하연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기다릴게요.”

그 순간 재이의 경쾌한 알림이 울렸다.

《연하연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연하연의 기척 탐지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응? 그러고 보니 얼굴이 살짝 빨개진 듯도.

기척 탐지 기능은 또 뭐람?

◎ 미연시에 등록된 이성과의 거리가 백장 이내로 좁혀졌을 때 알림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음성 안내를 원하시면 1 번.

->지도 표시를 원하시면 2 번.

미연시라더니 별의 별 것이 다 되는구나.

응, 2 번.

연하연은 헛기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은공,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남천휘를 응시한 채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미연시 모드가 해제됩니다.》

시야가 잠시 흐릿하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을 때에는 이미 특급강호인승급체계에 대한 화면이 가득했다.

오른쪽 상단에 보이는 지도가 어찌나 반가운지.

“아!”

남천휘는 탄성을 흘렸다.

지도에는 흰 점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점멸(點滅)을 거듭할수록 멀어지더니 이내 지도에서 사라졌다.

연하연(燕夏燕)의 신호는 꺼졌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연이라······.”

여름 제비(夏燕)니까 여름에 다시 날아오렴.

대신 봉황곡의 일은 다 끝내고 오렴.

아! 꼬리는 짧을수록 좋단다.

*

벌써 사위가 어둑하다.

지도가 있으니 밤이라도 상관없다.

하나 밤은 위험했다.

‘자칫하면 형한테 된통 깨지겠는 걸.’

남천휘는 큰형인 남천홍을 떠올리며 속도를 올렸다. 외부에 알려진 남천홍의 성격은 대인대덕한 호인이었다.

하나 그의 실체는 그렇지 않았다.

지도에 의지하니 금세 곡부남가의 전경이 보였다.

남천휘는 마을 어귀에서 예기치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공자님!”

소혜다.

개구리를 닮아 슬픈 소혜야.

예상했던 대로 미연시는 활성화되지 않는구나.

“공자님! 어디 가셨던 거예요?”

그녀는 호롱불에 의지한 채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남천휘는 농담이라도 할까 했다.

하나 소혜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추성현에 다녀왔지. 웅도랑 차 마시러 간다고 했잖아. 그런데 너는 그 꼴로 돌아다닌 거야?”

“저는 괜찮아요. 너무 늦으셔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요.”

그러면서 콧물을 훌쩍거리니 안쓰럽기만 했다.

“됐다. 어서 들어가자. 고뿔에라도 걸리면 내 수발은 누가 들어줘?”

남천휘의 투덜대는 말투에도 소혜는 헤죽 웃으며 소매를 걷어부쳤다.

“저 의외로 통뼈라고요!”

퍽도 그렇겠다.

앙상한 팔만 보면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 같다.

조만간 날을 잡아서 다시 토끼 탕을 끓여야겠다.

“헤헤, 어서 가요.”

소혜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방실방실 웃으며 앞장을 섰다.

한데 예기치 못한 만남은 소혜로 끝나지 않았다.

“공자! 오셨군요.”

북풍대의 대주인 조상이 별 일 아니라는 듯 목례를 했다. 하나 발목까지 젖은 것을 보면 눈밭을 한참 헤맨 듯보였다.

‘지혜가 올랐더니 눈썰미도 좋아졌네.’

괜히 미안하게끔.

“밤이 늦었습니다. 이만 쉬시지요.”

그러더니 원래부터 순찰을 돌던 사람처럼 느긋하게 방향을 바꿔 사라졌다. 잠시 후 곳곳에서 북풍대의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하나둘씩 처소로 향했다.

아마 북풍대 전원이 곡부남가 주변을 수색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공자님, 저 추워요. 어서 들어가요!”

남천휘는 애꿎은 소혜를 향해 혀를 찼다.

“쯧쯧, 통뼈라며?”

그러자 소혜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제 가냘픈 팔을 보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만약 미연시 모드가 활성화됐다면 호감도 하락이라는 알림이 울렸으리라.

남천휘는 피식 웃으며 소혜와 함께 곡부남가로 들어섰다.

“안채에 얘기해놓을 테니까 뜨뜻한 국이라도 마셔.”

소혜는 두 팔을 번쩍 들고 좋아했다.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 입맛을 다시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소혜야, 그렇게 먹을 걸 밝히다가는 두꺼비가 될지도 몰라.’

남천휘는 자신의 처소로 향하던 중 걸음을 멈췄다.

때마침 환하게 켜져 있던 가주전의 불이 꺼졌다.

‘형님, 그냥 쉽게 쉽게 삽시다.’

남천홍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남천휘는 침상에 몸을 던진 후 투덜거렸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아! VIP상자.”

적이 난입하는 바람에 상자를 열어보지도 못했다.

그 후에는 곧장 귀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디 보자!”

인벤을 열자 화려하게 치장된 상자가 보였다.

알아보지 못할 세 글자가 VIP를 의미하리라.

“확인.”

그 순간 화려한 상자가 인벤을 벗어나 허공에 떴다. 동시에 새카만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온 세상이 암전됐다.

잠시 후 상자에서 형형색색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찌이이이이이이잉!

뭐가 이리 현란해?

이래놓고 잡다한 거라도 주면 큰일 날 줄 알아!

경고와 함께 상자가 폭발했다.

쩡!

파편이 흩어지는 가운데 시퍼런 광채를 쏟아내는 물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

남천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하하! 이런 게 나올 줄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