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4화 (14/305)

10, 단지 한 번 봤을 분인데.

10, 단지 한 번 봤을 뿐인데.

남천휘는 황급히 초옥 안을 돌아봤다.

하나 눈과 비를 피하기 위해 지은 초옥이다.

비밀통로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와중에도 봉황곡의 무인은 건들거리며 초옥으로 다가왔다.

젠장, 봉황곡은 여자끼리 모여 산다며?

‘납치한 후에 세뇌라도 한 걸까?’

하기는 말하는 꼴을 보니 자의든, 타의든 봉황곡에 충성하는 건 틀림없다.

남천휘는 무인의 머리 위를 살폈다.

레벨은 10이다.

자신보다 높았지만, 딱히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섬영검의 기본자세를 잡아줬던 북풍대의 말단, 송겸의 레벨이 9였다.

하나 남천휘는 송겸과 비무를 할 때마다 두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무 횟수가 늘어날수록 승리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 때 깨달았다.

등급은 단지 수치에 불과하는 것을 말이다.

만약 등급이 절대적이었다면 백봉도 저런 꼴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등급을 올리는 것과 등급의 위력을 고스란히 끌어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확! 그어버려?’

문을 여는 순간 기습을 하면 한 놈 정도는 처리할 수 있으리라. 하나 초옥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무인들은 강했다.

무엇보다 등급이 확인되지 않았다.

다른 놈은 몰라도 대장은 조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건들거리는 놈을 처리해도, 결론은 파국이었다.

이것이 7레벨의 한계였다.

남천휘는 왼쪽 이마를 긁적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그건 아니야. 죽어. 아마 물렸을 때 이미 죽었을 걸? 지금 필요한 건 근성이나 열정이 아니라 힘이라고. 힘! 힘이 필요해!’

남천휘의 초점 없이 흔들리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힘은 필요하지.

그런데 굳이 내 힘일 필요는 없잖아?

‘그래, 네가 있었지.’

그는 백봉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녀는 누가 뭐라 해도 세 자리 레벨이다.

수십 명 분의 미혼약을 흡입하고도 이곳까지 홀로 도주한 고수였다.

게다가 봉황곡의 소곡주라지 않는가.

‘곡부남가의 소가주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한데 그런 그녀가 혼절한 까닭은 해독은 됐을지언정 지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천휘에게는 그녀를 단 시간 내에 회복시킬 묘안이 존재했다.

그것도 아주 쉽게.

‘적선단 사용.’

그것도 즉시!

인벤에 있던 다섯 개의 적선단 중 하나 사라졌다.

그 순간 백봉이 뒤척거리며 침음을 내뱉었다.

혼절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는 게다.

“으음.”

예상은 했지만, 효과가 정말 탁월했다.

남천휘는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눈을 뜬 백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데 장소도 바뀌고, 몸 상태도 달라졌으니 혼란스러워했다.

“쉿! 적이 찾아왔습니다.”

남천휘의 말에 백봉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확실히 보통 여인이 아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백봉은 자신의 입을 막은 남천휘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나 완력이나,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봉황곡?”

“네. 초옥 밖에 열 명. 모두 사내입니다.”

남천휘의 말에 백봉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매혹대로군요. 봉황곡에 영혼을 판 쓰레기 같은 새끼들입니다.”

순진하게 생긴 얼굴로 그런 말 쓰지 마.

“상대할 수 있습니까?”

한데 백봉의 표정이 어둡다.

정신은 차렸을지언정 내공은 여전히 바닥이다.

운기조식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좋아!’

지금부터 필요한 건 연기였다.

아마 백봉도 자신이 구해줬음을 눈치 챘을 게다.

하지만 선후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다시 보더라도 좋은 인상으로 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퀘스트 명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남천휘는 안타까운 듯 한 숨을 흘렸다.

“부끄럽지만 제가 시간을 끌 수가 없군요. 대신 내력을 넘기겠습니다. 연 소저가 직접 상대하세요.”

백봉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인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내공을 수련한다.

그렇기에 같은 심법을 익혀도 내공의 순수함이 달랐다. 하물며 생면부지의 상대라면 전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답은 정해져 있어.’

남천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연 소저가 나를 만난 게 불과 한 시진 전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자!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백봉은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전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는 건 남녀의 교합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미혼약을 없앴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호감이 담긴 말투로 말했다.

“당신은 대단한 의원이시군요.”

그렇지.

그 말을 듣고 싶었어.

하나 남천휘는 속내를 숨긴 채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의원이라 칭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나 지금은 제 뜻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

약한 것도, 의원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거짓말은 나쁜 거니까.

“아!”

그 사이 백봉은 미간을 좁혔다.

내공이 바닥났어도 고수는 고수다.

그렇기에 매혹대의 무인이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기척을 고스란히 느꼈을 터였다.

그녀는 더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부탁드립니다.”

남천휘는 백봉의 등 뒤로 돌아갔다.

누워 있었기 때문일까.

다른 곳과 달리 백봉의 등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그로 인해 몸의 굴곡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미치겠네.’

남천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백봉은 그것을 긴장한 것으로 여겼다.

“설령 잘못되더라도 은공의 탓이 아닙니다. 은공께서 살려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잘못됐어도 한참 잘못됐을 테니까요.”

은공이라는 말에 입꼬리가 절로 치솟았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이 몸은 은공(恩公) 남천휘시다.

‘크흠!’

남천휘는 손바닥이 아닌 손등을 백봉의 등에 붙였다. 손바닥을 댔다가는 코딱지만한 내력의 존재를 들킬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손등을 댄 채 소리 없이 읊조렸다.

‘벽선단 사용.’

솨아아아아아아아!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벽선단(碧仙丹)은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적선단이나, 독을 무력화하는 녹선단과 효과부터 달랐다. 백봉의 몸에서 한 순간 청량한 기운이 휘몰아친 것이다.

‘진짜 고수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나 백봉은 남천휘보다 훨씬 놀란 상태였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순수한 기운이 한순간에 명문혈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전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내력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뤘다.

대자연의 기운이 이런 것일까?

'마치 자연지기 같아!'

이런 내공을 지닌 사람이라면 미혼약 정도는 손쉽게 해독할 수 있었으리라.

그녀는 마지막 의심조차 지운 채 남천휘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더니 공수했다.

“은공은 소녀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남천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맞잡은 후 일으켰다.

“아직 위기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칼침이라도 맞기 전에 후딱 해치우라고!

미연시고 뭐고 간에 살아 있어야 레벨을 올리지.

한데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알림이 울렸다.

《연하연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연하연과의 관계가 은인으로 격상됐습니다.》

좋은 걸?

“제가 은공의 검이 되어 길을 뚫겠습니다.”

오호! 그건 더 좋아.

백봉은 문 쪽으로 향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이내 남천휘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한데 제가 연 씨인 건 어떻게 아셨지요?”

아, 이건 좋지 않은데.

*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혹대 소속의 장팔은 경계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어차피 백봉은 이곳에서 수십 리 떨어진 야운산에 있지 않은가. 그러니 초옥 안에 누가 있더라도 추위에 떨고 있는 약초꾼 정도일 것이라 여겼다.

‘기왕이면 여자가 있는 편이······.’

끼익-

야릇한 기대와 함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벼락처럼 튀어나온 손이 뱀처럼 휘어지더니 장팔의 목젖을 후려쳤다.

콰직!

외마디 비명조차 허락하지 않는 일격이다.

장팔의 머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기이하게 꺾였다.

“엇!”

매혹대의 무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공이 높은 자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다.

하나 백봉은 이미 장팔의 검을 쥔 채 빠르게 매혹대원들의 배후를 점했다.

퇴로(退路)가 끊겼다.

초옥은 작은 분지에 위치했다.

그러니 들어온 길을 제외하면 야트막한 둔덕을 올라가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나 등을 보이는 순간 백봉의 검을 피할 수 없으리라.

매혹대의 조장은 백봉의 예기치 못한 등장에 나직이 읊조렸다.

“백봉.”

휘리릭!

백봉은 검은 한 바퀴 휘돌린 후 스산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사냥개는 솥에 들어갈 시간이다.”

조장은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네 년이 정상이었다면 퇴로를 막지도 않았겠지. 흥! 쳐라!”

무인들은 부채꼴모양으로 퍼져서 백봉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봉은 조장의 예측이 무색할 만큼 정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아!’

남천휘는 탄성을 흘렸다.

백봉의 몸놀림은 번개 같았다.

눈 깜빡일 사이에 끝나버렸다.

그녀는 문이 열리는 순간 적을 쓰러트렸고, 어느새 적들을 우회하여 퇴로를 막아섰다.

머리 위에 뜬 레벨로 인해 고수인 것을 알았지만,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움직임이 아닌가.

‘조상보다 훨씬 빨라.’

애초에 조상과 비교하는 것부터가 무리였다.

게다가 그녀는 진중한 조상과 달리 말투가 너무 살벌했다.

‘나 이대로 괜찮은 건가?’

남천휘는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재이가 연하연이라고 입버릇처럼 반복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말해버리지 않았던가.

하여 백타선자를 핑계거리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백봉은 혼잣말로 자신의 이름을 아는 자가 없다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남천휘는 가슴을 부여 쥐고 죽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일단 적을 상대한 후에 다시 대화하자고 얼버무렸다.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지?’

그렇다고 미연시로 인해 알았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미친놈은 솥에 들어갈 시간이라고 하겠지.

채채채채챙!

남천휘는 귀를 찌를 듯한 쇳소리에 망상에서 벗어났다.

적은 개떼처럼 뭉쳐서 공격했다.

합격술이라도 익힌 듯 치고 빠지는 모양새가 더없이 위협적이다.

“다리부터 잘라!”

그 순간 서너 명이 땅을 굴렀다.

남천휘는 자신이 포위망에 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니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한데 그 순간 나비처럼 살랑이던 백봉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푸푹!

백봉의 검이 적의 가슴을 헤집었다.

소리는 한 번이었지만, 자상은 다섯 곳이다.

적은 다섯 부위에서 피를 쏟아내더니 흐느적거리며 주저앉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남천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불현 듯 고수의 싸움은 천금을 주고서라도 봐야 한다는 격언이 뇌리를 스쳤다.

‘보고 싶다.’

고수는 수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일례로 명가의 후예가 실전에서 손발이 꼬이거나, 또는 홀로 무공을 익힌 고수가 첫 싸움에서 하수에게 어처구니없이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아!’

남천휘는 황급히 인벤을 열었다.

오감증폭제(五感增幅劑).

오감 중 하나를 선택적으로 상승시켜주는 기물이 아닌가.

이것이라면 안계를 넓혀줄 것이다.

남천휘는 거리낌 없이 아이템을 활성화했다.

‘오감증폭제 사용. 시각.’

그 순간 얼음이 눈에 박힌 것처럼 시큰거렸다.

그러나 전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그림자만 번쩍이던 저들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릿하게 변했다.

된다. 보인다!

‘오감증폭제 사용. 청각.’

오감증폭제를 연이어 사용하자 수천 명이 동시에 소리치는 것처럼 귀가 울렸다. 하나 검이 바람을 가르고, 옷자락이 펄럭이는 사소한 소리마저 분류가 되어 들려왔다.

그 순간 재이의 경고성이 뇌리를 스쳤다.

◎ 오감증폭제의 중첩으로 인해 신체에 부하가 걸립니다. 더 이상의 사용을 중지하고, 휴식할 것을 권고합니다.

빌어먹을 몸뚱이.

하나 망설이지 않았다.

특급강호인승급체계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첫 퀘스트가 열릴 때 열변을 토하던 음성을 들었을 때 결심했다.

매일같이 반복하는 하루에서 벗어나자.

그래서 꿈도 희망도 없이 낙천적으로 사는 한량이 아닌 특급 강호인이 되고자 했다.

백봉 연하연은 현재 남천휘가 접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고수였다. 그런 고수의 싸움을 구경할 뿐 아니라 분석할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감증폭제. 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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