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7 회: 가례(嘉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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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정정한 모습을 보니 보기 좋구나!”
“망극하옵니다. 황상! 이 모든 것이 황상의 은의가 아닌가 하옵니다!”
“하하하........! 미처 신경을 못 썼거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황제 이진의 말에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정옥빈이었다. 현 그녀의 나이 63세로 벌써 귀밑머리는 물론 머리까지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러나 얼굴만은 여전히 귀티가 났다. 한마디로 곱게 늙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황제 이진은 다시 시선을 돌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금란을 보고 물었다.
“너는 왜 오늘 보이지 않았더냐?”
“그것이........”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금란이었다. 금란은 황제 이진보다 세 살이 더 많아 이제 갓 마흔이었다.
“오늘이 그날이옵니다. 황상! 달거리! 달거리 때만 되면 꼭 유난을 떨지 않사옵니까? 지금까지 그것도 모르셨사옵니까? 너무 무심하옵니다. 황상!”
금란을 대변하듯 마구 쏟아내는 개똥이었다. 그녀의 거침없는 성정은 오십이 넘었어도 여전했다. 아니 남성호르몬의 분비가 많아지자, 머리카락도 굵어지고 더욱 기가 세어지는 개똥이었다.
“네가 꼭 금란의 대변인 같구나!”
“네?”
“아니다. 됐다!”
현대 용어를 그녀가 알 리 없었다. 무심코 뱉은 말을 취소하듯 금방 다른 데로 화제를 전환하는 황제 이진이었다.
“옥빈!”
“네, 황상!”
황제 이진의 다정한 부름에 금방 다시 눈물이 쏟아지는 정옥빈이었다.
“어디 특별히 아픈 데는 없고?”
“황상의 어진 은혜로 전혀 그런 곳은 없사옵니다. 단지 이제 무릎이 조금 아플 뿐이오나 이는 나이 든 여인들의 공통적 현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하옵니다. 황상!”
“허허, 그것 참! 짐이 내일 어의를 보낼 터이니 진맥을 받아보도록 하고, 각별히 몸을 보살피는데 유념하도록 하라!”
“네이, 황상!”
그녀의 눈에서 눈물 다시 쏟아지자 난처한 표정의 황제 이진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더듬는데, 사전에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바로 주안상 하나가 들어왔다.
“자, 모두 둘러앉아 짐이 하사하는 술을 한 잔씩 받는 것이야! 빼는 사람은 발개 벗겨 내 쫓을 참이니 그런 줄 알도록!”
황제 이진의 성적 농담에 늙으나 젊으나 볼이 달아오르는 가운데 황제 이진은 손수 술을 따라 세 여인에게 차례로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손수 술을 친 그가 술잔을 들고 말했다.
“자, 모두 들도록!”
“네이, 황상!”
황감한 두 여인이 고개 돌려 찔끔거리는데 반해 개똥은 술도 거침없이 들이켰다.
“아~! 하세요. 황상!”
개똥이 재빨리 안주 한 첨을 황제의 입에 넣어주고 나머지 두 여인은 아직도 상을 찡그린 채 그러고 있었다. 이를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개똥이 말했다.
“황상! 저희들이야 이미 다 늙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도, 금란만은 아직 회임이 가능할 것이니, 황자 아기씨 하나만 점지 해주시죠? 너무 말년이 적적할 것 같아 공동으로 기르고자 함입니다. 황상!”
“허 험! 너 말 한 번 잘했다. 황태후 또한 손이 없기는 마찬가지. 해서 황태후께서는 일찍이 어린 궁녀 하나를 들여, 요즈음은 그 아이를 키우는 재미로 사신다 했다. 답이 되었느냐? 특히 옥빈부터 그리 하도록!”
“네이, 황상! 꼭 그리 하도록 하겠사옵니다. 황상!”
“그래, 그래! 그래야만 딸같이 의지하고 말년이 적적하지 않음이야!”
“네이, 황상!”
개똥도 황제 이진의 말이 좋게 들리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일도 아닌데다, 마냥 조를 수 있는 일도 아닌지라 새침한 표정으로 황제의 빈 잔에 술을 치는 것으로 심사를 달랬다. 그러던 그녀가 돌연 딴에는 아양을 떠는 표정으로 말했다.
“황상,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는 데요.”
“말 해봐라!”
“옥빈 언니도 요즘 물이 나옵니까? 저도 머지않아 저렇게 흰머리가 될 터인데, 그것이 궁금해서.......”
과히 여간한 배짱 가지고는 물을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목숨을 걸고 현 황제를 옹립한 인물답게 정말 담대한 배짱의 소유자였다.
“하하하........! 참내 오늘 보자보자 하니, 네가 짐의 머리꼭대기까지 기어오르려 하는구나!”
황제 이진의 말에 급히 부복해 죄를 비는 개똥이였다.
“황상, 죽을죄를 졌나이다.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황상! 네?”
황망히 비는 개똥이 때문에 짐짓 노여움을 푸는 형용으로 이진이 말했다.
“고목이 되면 물기 걷히듯 사람 또한 마찬가지 이치. 하지만 방사의 재미는 마찬가지일지니....... 그렇지 않느냐? 옥빈!”
“.........!”
답을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는 정옥빈 이었다.
“자, 술이나 한 잔씩 더 들자!”
“네이, 황상!”
개똥이 제일 먼저 대답을 하고 두 여인에게도 자진하여 차례로 술을 쳤다. 그리고 제 잔에도 따르는 것을 황제 이진이 말없이 옥병을 빼앗아 그녀의 잔에도 한 잔을 따라주었다.
이렇게 춘희전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 *
춘희전에서 하룻밤을 유한 황제 이진은 다음 날 정무가 끝나자, 비 소생의 아들과 딸을 모두 자신의 침궁으로 불러들였다. 이번 호출에는 자녀들뿐만 아니라 그 어미는 물론 황후 허 씨까지 모두 해당되었다.
이번에 혼사가 결정된 황자들과 공주는 물론 그 어미까지 모두 부른 것이다. 여기에 황후는 덤이라면 덤이었다. 이들을 부르기 전에 일찍이 수라를 주문했으나 초겨울 햇살은 벌써 그 수명이 다하여 서산에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실내는 벌써 어두워져 붉고 노란 초들이 제 몸을 사르고 있는 가운데 황제 이진을 중심으로 부른 인물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러나 이진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실내는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매일 정무에 쫓겨 살다보니 너희들 얼굴을 언제 보았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하구나. 군왕의 사업이라는 것도 그 범위를 좁혀보면 일차적으로 내 식구가 편히 살자고 하는 짓이나, 이것이 범위가 넓어지면 모든 것이 여의치가 않느니라.”
여기서 모인 자식들과 정식으로는 귀비가 된 허엽의 딸 허 씨, 구사맹의 딸 구 씨, 신립의 딸 신 씨, 제주도 조참봉의 딸 조 씨 등, 네 귀비 및 황후 허 씨를 일견한 황제 이진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찌 됐든 장성하면 일가를 이루어 자손을 이어가는 것이 효(孝)의 근본이요, 자식의 도리 이니라! 하니 가문을 번성시키고 황자로써의 책무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니라. 알겠느냐?”
“네! 아바마마!‘
세 아들의 힘찬 대답에 이어 조 귀비의 딸 청연 공주의 뒤늦은 가녀린 음성마저 들려왔다.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갑자기 허국의 아들을 소리쳐 불렀다.
“첫째 인(仁)! 너는 요즈음 무엇을 하고 지내느냐?”
“공부에 매진하고 있사옵니다. 아바마마!”
“아니옵니다. 황상! 요즈음은 글공부보다 불교 경전에 심취하여 가끔 엉뚱한 질문만 하고 있사옵니다. 황상!”
어미 허 씨의 고변에 찔끔 하는 이 인이었다.
“허허! 것 참........! 내 일찍이 네가 어미를 담아 문재(文才)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헌데 공부는 다 마치고 불교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더냐?”
“네, 아바마마!”
자신 있게 대답하는 이 인과 반론을 않는 어미로 보아 웬만한 글은 다 깨우친 게 확실해 보였다. 그래서 이진이 말했다.
“여기 있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겠으나, 나이를 보아하니 모두 사춘기 험험.......! 성장통을 겪느라 예민한 시기이니라. 해서 사람은 어디서 나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 내지 회의? 이 모든 것을 궁구하고 싶을 때임도 잘 안다. 하지만 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독단하지는 마라. 주위의 스승들이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니니라. 선생(先生)이라는 말이 무엇이더냐? 먼저 살아보았다는 말이다. 너희들보다 먼저 그런 길을 갔던 사람들이니 의문이 들면 묻기도 하고, 답이 시원치 않으면 여러 서책에서 답을 찾아 매진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네, 아바마마!”
“녀석들 대답은 꼬박꼬박 잘한다마는 어디 두고 볼 일이고. 둘째 너, 의(義)!”
“네, 아바마마!”
아비 이진의 지적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구정녀의 아들 이 인이었다.
“너는 요즈음 무엇으로 소일하고 있지?”
“소자 또한 학문의 성취에 매진하고 있사옵니다. 아바마마!”
“너 또한 어미를 닮아 문재가 있음은 물론 행실이 돈후(敦厚)하다는 말을 들었다. 열심히 하거라!”
“네, 아바마마!”
“셋째, 예(禮)!”
“네, 아바마마!”
신립 장군의 딸 신청의 자식이 이진의 부름에 힘차게 대답했다.
“너는 외조부를 닮아 무예에 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문(文)을 등한히 하는 자는 대성하기 어렵나니, 이를 명심할 지어다!”
“아바마마의 말씀 뼈에 새겨 잊지 않겠나이다!”
“아무렴, 그래야지!”
흡족한 미소를 짓던 황제 이진의 안색이 공주 청연(靑燕)을 보는 순간 급격히 흐려졌다. 어미 조비연을 닮아 가냘프기 짝이 없고 심성마저 여린 딸이었다. 그런 딸을 이번에 함께 시집보내려 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아비 이진이었다.
슬하에 자식들이 많았지만 유독 정을 준 공주였다. 오죽하면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는 시집을 안 보낸다고 호언을 했겠는가! 그러나 다 때가 있는 법. 명년이면 이제 모두 정남이 되는 자식들과 같은 나이인 그녀인지라, 주변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함께 치운다하나, 차마 보내기 싫어 마냥 우울해지는 황제 이진이었다.
그래서 기껏 묻는다는 말이 이것이었다.
“밥은 잘 먹고 있고?”
“네, 아바마마!”
“우리 아기를 어찌 하누........?”
“다 때가 되면 성혼하여 일가를 이루는 것이, 남녀 구분 없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 황상께서는 너무 서운해 마세요!”
황후 허 씨의 말에도 안색이 펴지지 않던 그가 돌연 그녀를 가까이 불렀다.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네, 아바마마!”
일어서나 앉으나 결코 크지 않은 키에, 몸매는 너무 가냘퍼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금방 날아가게 생겼다. 그러나 이목구비 하나는 조각상을 보는 듯, 오밀조밀하니 미운 구석이 하나 없는 요정 같은 딸이었다.
허리 한 줌밖에 안 되는 딸을 번쩍 안아 무릎에 앉힌 황제 이진이 그녀를 그윽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 아비의 솔직한 속내로는 너를 보내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황후의 말대로 때가 되면 다 가야 하느니....... 이 아비 마음 찢어지지만, 부덕(婦德)을 쌓아 한 지어미로서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
“네, 아바마마! 흑흑흑........!‘
어릴 때는 시집 안 가고 아비와 살겠노라고 매달리던 녀석이, 이제는 그런 소리는 하지 않고 다만 눈물만 흘리니, 이진의 마음 더욱 괴로웠다. 그러나 군왕으로 지내며 수많은 풍파를 겪은 그답게 오연히 눈 들어 말을 했다.
“어른이 되기 전 아비로써 훈계를 좀 내리느라, 찬이 다 식었다. 자, 모두 반주도 한 잔씩 하면서 즐거운 식사 시간이 되길 바라겠노라! 청연은 아비 옆에서 식사를 하도록!”
“........!”
여전히 가늘게 어깨를 떨며 고개만 끄덕이는 청연공주였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진이 기어코 그녀를 무릎에서 내려 옆에 앉혔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차비들에게 눈짓을 해 모두의 잔에 술을 따르도록 했다.
“자, 식사를 하도록!”
“네, 황상!”
“네, 아바마마!”
부인과 자식들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 이진을 따라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이진은 쇠고기 무국을 단지 한 입 떠 넣고는 바로 따라놓은 술잔으로 손이 갔다.
“황상! 수라를 먼저 드신 후에........!”
“알았소, 알았어!”
황후의 잔소리에 대답은 그러 하나, 연이어 손은 술잔으로 향하고 있는 이진이었다. 또 한 잔의 술을 가볍게 비운 이진이 흘깃 청연공주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수저조차 들지 않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청연공주였다.
그런 청연 공주를 위해 말없이 그녀의 손에 수저를 들려주는 황제 이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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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