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173화 (17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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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4월15일.

이날은 황태후 의인황후 박 씨가 56세 생일을 맞는 날이었다.

황태후의 생신을 맞기 전 황제 이진은 황태후 박 씨에게 청이 있으면 하라 했다. 하니 황태후 박 씨는 조선에 돌아가 생일을 맞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녀로 보면 북경의 자금성이 곧 외국이었으니 조선을 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간 향수병에 시달리던 그녀의 강력한 청에, 황제 이진은 할 수 없이 대거 인력을 동원하여, 조선 나들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향수병에는 약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곳을 다시 들리는 길 밖에는. 해서 이진은 황태후의 청에 따라 조선의 궁성을 다시 방문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모처럼 사정전에서 정무를 보던 이진이 하명했다. 오늘 저녁 유시에 가족만의 연회를 경회루에서 개최할 것이니, 전원 참석토록 한 것이다. 오늘 미리 가족끼리 모여 전야제를 갖자는 뜻이었다.

석양이 물들기 시작하는 황혼 무렵의 경회루.

이진의 근친이라 할 수 있는 황족과 이순신을 비롯한 사돈들 그리고 멀고 가까운 종친까지 참여하니 그 연회가 자못 성대하였다.

모두 일찍 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가운데 황제 이진이 황태후 박 씨를 모시고 경회루에 등장하였다.

“황상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이진의 등장에 모두 부복하여 예를 표하는 가운데 넉넉한 웃음을 머금은 이진이 명했다.

“모두 예를 거두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이진이 황태후를 모시고 한 가운데에 마련된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바로 우측에 황태후 박 씨를 모셨고, 좌로는 황후 허 씨를 비롯한 네 명의 비 및 영창공주와 고륜동과공주까지 참석하였다. 우로는 계모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또한 바로 단 아래에는 황태자 이흔과 태자비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황태손마저도 유모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들을 기준으로 우로는 왜에서 일시 귀국한 일왕 광해를 비롯해  순화군 등 이복동생들이 자리를 잡았다. 또 좌로는 황태자의 이복동생들인 네 명의 황자들도 참석하였다.

이들은 각각 허균의 누이, 신립의 딸, 구사맹의 딸 그리고 비연 등의 몸에서 난 자식들이었다. 그리고 단하에는 이순신을 비롯한 사돈 및 종친부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여 경회루가 비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튼 모든 사람을 근엄한 안색으로 둘러본 이진이 입을 열었다.

“내일이 황태후 마마의 56세 생신인 것은 모두 잘 알 터. 해서 짐이 오늘 특별히 명해, 미리 이를 경축하는 자리를 마련했도다. 하니 오늘만큼은 모든 근심 내려놓고 함께 즐길지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무희들은 와서 술을 치고 악공들은 풍악을 울리도록 하라!”

“네이, 황상!”

비로소 시끌벅적해지는 가운데 이진은 손수 옥병을 들어 황태후 박 씨의 잔에 따랐다. 원 역사에서는 벌써 죽었을 그녀였다. 임진란 중에 외롭게 모진 고생을 하는 바람에 수(壽)가 짧았으나, 그런 고통이 없었던 데다 이진이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니, 오늘 날 이렇게 좋은 날을 맞은 것이다.

아무튼 반백이 다 된 황태후에게 잔을 올리니, 황태후 박 씨가 눈물 머금은 눈으로 말했다.

“근 한 갑자를 사는 이 그 얼마나 되던가? 열에 아홉은 그 안에 수를 달리하는데, 이 주책맞은 늙은이 오래는 살아 황상을 괴롭히는 구료.”

대경한 이진이 펄쩍 뛰었다.

“어마마마, 어인 말씀이옵니까? 고희 아니 백수 하시어, 이 나라의 번성을 오래 오래 지켜봐주시옵소서!”

“호호호........! 황상은 이 늙은이 보고 죽으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욕을 하고 있어요. 노인네가 그렇게 오래 살아서 뭣에다 쓰겠소?”

“어마마가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늘 가슴 한 편이 따뜻하고 든든하옵니다. 하오니 만수무강하시어, 자손들의 번성도 지켜봐주시옵소서.”

“그래요. 황상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이 어미가 일찍 죽자한다면 그 또한 황상을 욕 뵈는 일, 내 천세 할 테니, 박대나 마세요.”

“하하하.........! 오래 오래나 사십시오. 박대가 아니라 소자가 조석으로 모시고 다니면서, 풍광 좋은 곳을 함께 즐길 것이니까요.”

“늙어지면 기운이 없어 걷지도 못하거니와, 다 짐만 되는 게요. 그러니 너무 오래 살라고 축원 말고, 황상이나 만세 하시어 우리 조선을 더욱 번성시켜주세요.”

“하하하.........! 알겠사옵니다. 어마마마! 팔 떨어지옵니다.”

“호호호.........! 알았어요. 이 어미가 마시고 한 잔 따를 테니 기다리세요.”

“네, 어마마마! 얼마든지요.”

“호호호.........!”

기분 좋게 웃은 황태후가 몇 번에 걸쳐 한 잔을 비우고는 이진에게 술 한 잔을 쳤다. 이를 받아 단숨에 비운 이진이 빈 잔을 들고 이순신에게로 향했다.

이순신 역시 벌써 66세의 나이. 백발이 성성했으나, 아직 기력은 정정했다.

“사돈! 한 잔 받으시지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상!”

이진이 따라 준 잔을 받은 이순신이 고개 돌려 급히 잔을 비우고는 말했다.

“감히 소신이 황상께 한 잔 올리겠나이다.”

“하하하.........! 고맙소. 헌데 요즘 온양에 계신다고요?”

“그렇사옵니다. 황상! 황상의 은혜로 노년을 아주 넉넉하게 잘 보내고 있사옵니다. 황상!”

“그렇다니 다행이오. 아직 기력이 정정하신 것 같은데, 백수 하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급히 답례를 한 이순신이 황제 이진에게 한 잔을 따라 올렸다.

이를 받아 단숨에 잔을 비운 이진이 이번에는 잔을 들고 광해를 찾아갔다.

“그래? 왜 땅을 다스리는데 고충은 없는 게냐?”

“그간 일부 저항이 있긴 했으나 모두 진압되었고, 지금은 이곳마냥 전국에 소학교를 열어 한글과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사옵니다. 머지않아 그들도 우리의 충실한 신민이 될 것이옵니다. 황상!”

“그래, 잘 하고 있다. 그렇게 서서히 동화시켜 저항의지를 근원적으로 꺾어놔야 해. 정 말 안 듣는 자들은 모두 노예로 만들어 저 추운 북방이나 호주 땅으로 보내도록 하고.”

“알겠사옵니다. 황상!”

이어 이진은 그에게도 어주 한 잔을 하사하고 그가 따라 올리는 잔도 한 잔을 받아 마셨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이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술잔을 모두 채우시오. 그리고 황태후마마의 백세를 축원하고, 대 조선 제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우리 모두 건배 한 번 합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잠시 후.

“자, 건배!”

“건배!”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하하하.........! 악공들은 크게 풍악을 올려라!”

“네이, 황상!”

이때부터 본격적인 황태후의 56세 생신을 축하하는 경축연이 성대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황제 이진은 봄빛 속에서 후원 뜰을 거닐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황후 허 씨와 태자 이흔 그리고 태자비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황태손이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이때 이진이 황후 허 씨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황후, 벌써 어마마마가 56세 생신을 맞으셨고, 우리도 어느덧 사십 줄에 들어섰소 그려.”

“그래요. 세월이 너무 빠른 것 같아요. 지나고 나니 잠깐이네요.”

“그렇소. 하니 남은 세월 동안이라도 우리 멋지게 살다 갑시다.”

“동감 이예요. 그리고 너무 고마워요. 황상!”

“뭔 말이 그러하오?”

“황상께옵서 이 못난 소첩을 사랑하시어, 저렇게 장성한 아들이라도 두었으니 소박맞지 않고 오늘날 이 부귀영화를.........”

“허허........! 그것 참.........!”

목이 메어 말을 못하는 허 황후를 다독인 이진이 뒤따르는 황태자 이흔을 보고 말했다.

그의 나이도 어언 열여섯 살의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짐이 네게 어렸을 때부터 유시한 바와 같이 국궁진췌하여 정사에 한 점, 어그러짐이 있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명심하고 있사옵니다. 황상!”

“또 문무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도 안 되느니........”

“네, 아바마마!”

이때였다. 품에 앉고 있던 손자 수(守)가 잠에서 깨어나 칭얼거렸다.

“그놈 참.........! 배가 고픈 모양이오.”

여느 할아버지처럼 황태손을 어르며 하는 말이었다.

이진 또한 여느 할아버지와 다름없었다. 아들은 귀여운 줄 모르고 키웠는데 손자만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마냥 귀엽기만 한 것이다. 아무튼 한동안 껄껄 웃던 이진이 손자를 멀찍이 따르던 유모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그놈 갈수록 무거워지네.”

“당신이 늙은 게지요.”

“뭐.........?”

황후 허 씨의 말에 눈을 부릅뜨는 이진이었다.

“아니옵니다. 요즘 부쩍 더 자랐고 몸무게도 많이 늘었사옵니다.”

시아버지를 역성드는 며느리였다. 시집 온 이래 한결같이 자신을 아껴주심에 오늘 말로라도 은혜 갚음을 하는 그녀였다.

“들었소?”

“글쎄요?”

고개를 외로 꼬는 황후를 향해 결정타를 날리는 황제 이진이었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비연을 찾아가야 하려나........?”

그리고 먼 산을 바라보는 황제 이진 때문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황태자와 태자비였다. 그런 이진에게 역공을 가하는 허 황후였다.

“하옵시면 오늘은 소첩이 손자 꼭 껴안고 자야겠네요.”

“그건 안 되지.”

“호호호.........!

펄쩍 뛰는 이진이었다.

때로 손자가 마냥 귀여워 밤에 함께 끼고 자기도 하는 이진이었다. 이런 둘의 모습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황태자 부처였다.

이때 멀리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어 바라보니 정보부장 송익필이었다. 이를 본 이진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오늘은 좀 조용하려나 했더니, 또 뭔 일이 터진 모양이군.”

그의 중얼거림대로 이제 대 제국을 건설한 그이다보니,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곳곳에서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니 이진 또한 마음 편히 하루를 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봄볕 따스하고, 먼 산에 뻐꾸기 울어 절정의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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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고맙고 감사합니다!^^

늘 기쁜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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