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2 회: (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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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황제 이진이 모처럼만에 침전에 앉아 독서로 소일을 하고 있는데,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대전내관이 고했다.
“황상, 권율 장군이 등대하였나이다!”
“뭣이! 북미 정벌사업에 뛰어들어야할 그가 왜 이곳으로 왔단 말이냐? 혼자더냐?”
“네, 황상! 많이 수척하고 이제는 허리조차 굽는 것 같사옵니다. 황상!”
“어허........! 이런 일이........! 미처 그의 나이를 헤아리지 못했구나!”
나는 탄식을 금치 못하며 그의 나이를 대충 헤아려 보았다. 벌써 칠십을 넘어 칠십하고도 서넛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허리가 굽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문신 같았으면 벌써 기로소 행을 청해도 몇 번을 청했을 나이였다.
“어서 정중히 모셔라!”
“이곳으로 말입니까?”
“그래!”
나는 정무를 보는 곳보다 보다 나은 친밀감을 표시하기 위해 내 개인 사생활 공간인 침전으로 그를 불러들이도록 한 것이다.
잠시 후.
대전내관의 부축을 거절한 권율이 억지로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나의 면전에 나타났다.
“황상.........!”
나를 보자마자 급히 부복한 그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 있었다.
나 또한 그의 늙은 모습이 너무 비감해져 한동안 말을 못하고 그를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내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잘 오셨소!”
“불충을 저질렀나이다! 황상!”
“아, 아니오! 짐이 미처 장군의 나이를 헤아리지 못했소!”
“남미까지 가려했으나 허리 점점 굽어들고, 운신 또한 자유롭지 못하여 황상의 명을 어기게 되었나이다.”
“아오! 암 그렇고말고.”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엎드려 있는 그의 쪼글쪼글한 손을 잡아갔다.
“짐이 더 미안하구려. 미처 장군의 연치를 헤아리지 못했음이야.”
다정한 나의 말에 급기야 맺혔던 눈물이 방울져 흐르기 시작했다.
“황상! 흑흑흑.........!”
“이런, 이런........!”
나는 노장군의 눈물에 어찌 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다만 그의 거친 손등을 두드리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나는 크게 명을 내렸다.
“여봐라! 어서 가서 급히 주안상을 푸짐하게 봐오너라!”
“네이, 황상!”
내가 당황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나는 내가 내린 명에 어폐가 있는 줄도 몰랐다. 급히 봐오는 주안상이 어찌 푸짐할 수가 있겠는가.
아무튼 내 큰 목소리에 권율 또한 진정이 되었는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노구 이제 좀 쉬어도 되겠는지요? 황상!”
“암요. 그렇다마다요.”
나는 강하게 긍정하며 그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또 하나 급히 생각나는 것이 있어 나는 허리 굽히고 서 있는 대전내관에게 명했다.
“사위 이항복도 들라 해라!”
“네이, 황상!”
그가 물러가자 내가 말했다.
“이 참에 사위도 한 번 만나보도록 하죠. 서로 뵌 지 오래 되었지요?”
“북방을 떠돌다보니.........”
말끝을 흐리는 권율의 노구를 보고 있노라니 공연히 내 가슴마저 먹먹해져왔다.
“짐의 불찰로 충성만 요구했지, 짐이 노장군에게는 하나 베푼 게 없구려.”
“소신에게 베푼 황상의 변함없는 성총이 있었거늘 어이 더 무엇을 바라오리까?”
“하하하........! 역시 장군이시오!”
나는 그의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진심과 충성심에 가슴이 벅차올라 대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잠시 힐끗 바라 본 권율이 다시 백두(白頭:흰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황상께서 근심할까 여쭈옵니다만, 북미 정벌전에 참여한 제 수하 장수들 또한 이제 백전의 명장이 되어, 어느 하나 전장을 그르칠 이 없으니, 황상께서는 마음을 놓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짐의 마음마저 헤아리니 이는 필시 충성심의 발로. 짐으로써는 더욱 기꺼워지는 구려.”
나는 그를 크게 칭찬하고 아직 소식이 없는 주안상을 재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더딘 것이냐?”
내 마음이 그만큼 그와 함께 급히 술잔을 나누고 싶은 것은 헤아리지 않고, 애꿎은 아래 것들만 재촉하니, 멀찍이 서서 허리 굽히고 있던 상궁나인들 중 몇 간이, 급히 전각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한 때의 추억에 빠져 과거의 일을 회상하고 있는데, 주안상과 함께 이항복마저 등대하였다.
“황상.........!”
“여기 있는 분이 누구인지 자세히 보오!”
“오......! 장인어른!”
권율을 발견한 이항복이 급히 내게 예를 올리고, 한걸음에 달려가 또 급히 그에게도 절을 올리며 말했다.
“너무 예를 차리지 못했사옵니다. 용서하십시오. 장인어른!”
“어허........!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라의 녹을 먹는 선비로서 어찌 사정을 황상이 계시는 앞에서 논하다니, 이것 아직 멀었군.”
“하하하.........!”
한껏 허리를 펴고 일국의 재상을 꾸짖는 노장군을 보니, 나 또한 기분이 좋아져 또 한 번 대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이런 나에 비해 이항복은 쩔쩔 매며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어서 주안상 앞으로 모시게.”
“네, 황상!”
“감히 소신이..........”
겸양하는 권율을 보고 있노라니 무언가 답답해져와 나는 나도 모르게 노성을 질렀다.
“장군의 충성심과 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한다면, 술 백 잔을 내려도 부족할 터인데, 너무 꺼리는 것이 많소!”
“송구하옵니다. 황상!”
다시 부복하는 노장군을 보니 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내가 얼른 이항복에게 눈짓을 하니 이항복이 만류하며 주안상 앞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되어 우리 셋은 제법 큰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빙 둘러앉았다. 나는 곧 손수 술병을 들어 권율과 이항복의 잔에 한 잔씩을 따르며 말했다.
“짐이 내리는 이 잔은 경들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기리는 것이니, 사양하면 안 될 것이오.”
“망극 하옵나이다, 황상!”
다시 한 번 부복하여 아뢰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그들의 잔을 채워주고, 나 또한 시종하고 있는 상궁에게 눈짓을 하여 그녀로 하여금 술잔을 채우도록 했다.
“자, 자! 노장군의 그간의 충성심과 백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한 잔씩 쭉 듭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황상!”
“하하하........!”
두 사람이 또 내게 사의를 표하고 고개를 돌려 천천히 잔을 비워나갔다. 나 또한 대소하며 천천히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렇게 시작된 술이 서너 순배 돌자 내가 돌연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말로만이 아니라 짐이 노장군의 충성심을 기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청 하나를 들어 줄 터,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장군!”
“소신 이날 이때까지 성상의 은혜로 많은 영화를 누려왔거늘 더 이상 무슨 청이 있겠사옵니까? 다만 소신 이제 무거운 직을 벗어놓고 야학이 되어 전원을 거닐고 싶사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황상!”
“그것은 이미 짐이 허락한 일이고 다른 청을 말해보오.”
“없사옵니다. 황상!”
굳은 입매로 딱 부러지게 말하는 그를 보니 전장을 질타하던 그의 모습이 되살아난 듯 해, 나로서는 기분이 한껏 좋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조용히 말했다.
“좋은 말 한 필에 비단 백 필, 이 외에 은자 오천 냥을 짐이 내릴 터이니, 더는 사양 마오.”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황상! 국록을 알뜰히 모아 이미 소신의 집 기와를 올렸고, 전답의 소출 또한 자식들과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니, 더 이상은 황상의 은혜를 감당할 수 없나이다!”
“허허........! 이런 변이 있나!”
나는 또 한 번 그의 올곧은 충성심에 심지어 개탄을 금치 못했다. 해서 나는 큰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황명이니 더는 사양 마오. 더 이상 사양한다함은 이 또한 황명을 거역하는 일, 그런지 아오!”
“그, 그게.........!”
나의 엄숙한 말에 차마 사양을 못하고 더듬는 백발 노구를 보니 참으로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기꺼워진 내가 분위기를 추슬렀다.
“자, 자, 그러지 말고 한 잔 더 합시다.”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나이다. 황상!”
또 한 번 내게 감사를 표하는데 노안에 맺혔던 눈물이 어느새 또 또르르 구르고 있었다. 이에 당황한 이항복이 얼른 부복하려는 장인을 붙들어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오늘 따라 황상이 매우 기꺼워하시니 모시는 신하로서는 이 보다 더 기쁜 일이 없는가 하옵니다.”
기꺼워하는 황상 앞에서 더 이상 눈물 보이지 말라는 사위의 간접 충고에 권율이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고개 돌려 외면한 채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렇게 권율과 이항복 나 또한 모두 잔이 비워지자, 나는 급히 또 한 번 그들의 잔을 채워주고,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권율에게 말했다.
“어서 일어나 보오. 장군!”
“무슨 일이옵니까? 황상!”
영문을 몰라 두꺼비 마냥 눈만 껌벅거리는 그를 나는 손수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서슴없이 용포를 벗어 그에게 입혀 주며 말했다.
“짐이 벗어 준 용포를 대대손손 잘 간직하도록 하오. 이는 대역죄를 짓지 않는 한 자손들 또한 죄를 한 번쯤은 면하게 될 것이니, 노장군이 그간 짐과 나라에 베푼 충의를 기리는 것이니, 더는 사양 마오!”
“황상......! 흑흑흑.........!”
외마디 부르짖음과 함께 급히 대전바닥에 엎어지는 권율 앞에는, 어느새 그가 떨어트린 눈물로 바닥이 흥건했다.
* * *
권율과 이항복을 보내고 나니 나는 또 한명의 늙은 장군이 생각났다. 바로 이순신 대 제독이었다. 이번 왜의 정벌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청한 그의 소청도 생각나 나는 지금쯤 귀국해 있을 대 제독 이순신 또한 급히 궁성으로 불러들이도록 명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황제의 명을 받은 이순신이 급히 자금성으로 찾아들었다. 그의 등대 소식에 황제 이진은 새로운 정보부 수장으로 등극한 전 비서실장 송익필만을 배석시킨 채 그와 마주앉았다.
주안상을 마주하고 이진의 침전에서 마주 앉은 세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기애애했다.
“하하하........! 역시 대 제독이시오. 왜왕이 대 제독의 인품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이다.”
“이미 지난 일 이옵고, 응당 소신이 취할 도리였습니다. 황상!”
황제 이진의 칭찬에 겸연쩍은 얼굴로 겸양하는 이순신이었다.
“그 보다도 짐은 공에게 왕의 칭호를 하사할까 하는데........?”
“아, 아닙니다. 황상! 소신 맡은 일에 충실했을 뿐 그런 공적도 없거니와, 설령 황상께서 어여삐 보시어 그런 공적이 있다 하여도, 절대 왕의 자리는 사양입니다. 황상!”
“아니, 왕의 자리를 사양하다니 남들 같았으면 금방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하며 부복했을 텐데 말이오.”
“지위가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이 정치의 세계입니다. 소신 그런 주변머리도 없거니와 후손들도 그런 자리에 앉아 부귀를 탐하는 것도 싫사옵니다. 오로지 일선에서 나라를 지키는 일이 더 바람직하고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황상.”
숨이 찬지 이미 따라놓은 술을 입가심용으로 조금 든 이순신의 말이 이어졌다.
“소신 외람되나 이제 나이가 들어 모든 것을 잊고, 손자 손녀들을 안고 노년을 즐기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옵니다. 헌데 왕위를 제수하신다 함은 소신을 높은 지붕 위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우는 격이 아니면, 높은 나무에 올려놓고 흔드는 것과 진배없는 일로, 소신을 죽이는 일이오니, 절대 사양이옵니다. 황상!”
“허허........! 천하에 왕위를 사양하는 분은 아마 대 제독이 유일할 것이오. 정녕 싫으신 것이오?”
“틀림없는 소신의 진실이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사옵니다. 황상!”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둘의 대화를 들으며 놀랍다는 얼굴로 입맛을 쩍쩍 다시는 송익필이었다.
“그렇다 라........?”
주석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서성이던 황제 이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이순신에게 말했다.
“정 왕위도 싫다면 재물을 좀 내리겠으니, 이것은 절대 사양하면 안 되오. 음........! 은 일만 냥을 하사할 테니, 전답도 사고해서 노년을 편안히 보내도록 하오.”
“너무 많사옵니다. 황상! 소신 알뜰히 절약한 결과 지금은 충분한 재산도 모았거니와........”
“허허......! 이는 황명이니 더는 사양 마오. 어찌 그대 일신만 생각하시오? 자손들도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소? 그 돈으로 땅마지기라도 장만해서 후손에게 물려준다면, 나라를 구하고 부흥시킨 대 제독 이순신의 후손들이 자자손손 배는 곯지 않고 살게 아니겠소?”
노한 얼굴의 황제 이진의 표정을 보아하니 더 사양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이순신은 얼른 부복해 아뢰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뭘, 그 작은 일을 가지고........!”
중얼거리듯 가볍게 답한 이진이 돌연 용포를 벗더니 이순신에게 말했다.
“이는 짐이 그대 가문에 하사하는 것으로, 대역죄를 짓지 않는 한, 절대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니, 잘 간직하오.”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폐하!”
부복한 이순신의 눈에 어느덧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 누가 있어 황제 이진에게 이런 극진한 사랑을 받았겠는가? 아마 그런 이 몇 안 될 것이다.
변치 않는 황제의 사랑에 감격한 이순신이 한동안 그러고 있는데 이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술, 초 다 되겠소?”
“마, 마시겠사옵니다. 황상!”
“하하하........!”
얼른 눈물을 훔치고 말을 하는데, 그나마 눈물이 코로 흘러들어가 코맹맹이 소리를 하니, 영 대 제독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에 이진이 대소를 터트리고, 송익필은 입을 막고 웃고 있었다. 황제 앞이기도 했지만, 대 제독 이순신 앞에서는 그도 함부로 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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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매일이 행복한 날 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