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1 회: (신규) -- >
3
수만 직속 부하들의 옹위 속에 체고 높은 백마에 올라 흰 수염을 나부끼며 에도 성으로 향하는 신립이었다. 금년 64세로 이순신보다 한 살 적은 대원수 신립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그런 신립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길 안내를 자처하는 일단의 인물들이 있었다. 히데타다는 물론 히데요리를 비롯한 측근 가신들이었다. 최고위직은 물론 전 군사, 백성 어느 하나 다치지 않겠다는 신립의 말에, 무조건 신립 진영에 고개를 조아린 그들이 알아서 성으로 신립 군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신립 군단이 에도 성문 밖에 이르자, 언제 전쟁을 치렀냐는 듯 성문 밖이 티끌 한 점 없이 깨끗이 쓸려 있었다. 또한 이들이 진군하는 길 양편에는 조선군을 환영하는 일반 백성들이 향불을 피운 채 신불에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마치 승전군에 대한 예우인 듯하나 기실 이들 백성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가족 누구 하나 해침 당하지 않고 재산 또한 강탈당하지 않기를 점령군, 아니 신불에게 빌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한두 번 해보는가?
신립으로서는 이런 백성들의 바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미소는 푸근했고, 이를 훔쳐본 연도의 백성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가늘게 안도의 한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이런 일반 백성들의 숲을 헤쳐 나가길 얼마.
마침내 신립 군단은 사각 담장에 에워싸인 쇼군 정무소(政務所)에 이르렀다. 이쯤 되자 부하장령들이 알아서 수하 군사들을 지휘하여 정무소는 물론 요소, 요소로 흩어져 삼엄한 경비태세를 갖추었다.
커다란 대문을 통과한 신립 일행이 마침내 정청에 이르는 길을 통과하는데, 어느 곳에서인지 향 내음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실려 온 것이다. 이에 신립이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측근에게 명했다.
“어찌 된 연유인지 알아봐라!”
“네, 대원수님!”
곧 복명한 측근 호위무사들 중 일부가 사방의 전각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때 히데타다의 가신 중 하나가 신립에게 고개 조아려 읊조렸다.
“아마도 영전(靈殿:조상의 신주를 모신 건물)에 피운 향연(香煙) 때문일 것이옵니다.”
“희생당한 군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겠다는 마음이야 익히 알겠지만 굳이 내 앞에서까지 냄새를 피워야겠느냐?”
“그도 그지만 극락왕생하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님의 명복을 비는 향불이옵니다. 대원수님!”
“어찌 안 보인다 했더니 자결이라도 했더란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허허.........! 거 안됐구나!”
그야말로 승자의 아량을 넉넉히 보이는 신립 대원수의 말이었다. 신립의 말에 새삼 슬픔이 복받치는지 열중에 있던 헤데타다는 물론 측근 가신들이 일제히 얼굴을 감싸 쥐는데, 신립은 말없이 가던 길을 다시 재촉했다.
이윽고 그가 정청에 이르니 그곳 또한 깨끗이 소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곧 집무실 태사의에 자리를 잡은 신립은 그 무엇보다 우선해, 스스로 황제에게 올릴 장계부터 작성하기 시작했다.
* * *
“하하하........! 통쾌 하도다, 통쾌해! 핫핫핫.........!”
전 각료들이 모여든 조양궁에서 들려오는 황제 이진의 유쾌하면서도 거침없는 웃음소리였다.
“하하하........!”
여전히 크게 소리 내어 웃던 이진이 웃음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필경 그 놈들이 조선을 넘보더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음이야!”
“맞사옵니다. 황상! 그 죄를 톡톡히 받는 것이죠.”
내각 수보 유성룡의 말에 더욱 기꺼워진 황제 이진이 다시 말했다.
“공 있는 자들에게 크게 상을 내리고 특히 히데타다를 생포했다는 여진족장은 장군의 반열에 올리도록 하오!”
“네, 황상!”
총무처장관 이항복과 국방부장관 강홍립이 동시에 복명을 했다.
“자, 이제 그만 즐거워하고 전후 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소. 하니 이에 대한 대책을 면밀히 세워 하달하도록 하고, 또 왜가 안정되는 대로 차례로 군을 귀국시키도록 하오.”
“네, 황상!”
전 각료들이 고개 숙여 복명하는 것을 바라보며 황제 이진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밤에는 왜의 점령을 기리는 경축연을 개최하겠으니 제 경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도록 하오!”
“네, 폐하!”
일시에 답하는 공경백관들을 흐뭇한 웃음으로 바라보던 황제 이진이 서서히 용상에서 멀어져 갔다.
* * *
황제 이진으로부터 내려온 전후지침에 따라 왜에 파견된 전 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도로 돌아온 해군 편에 히데요리는 물론 히데타다가 보유하고 있던 병력 모두가 인계되기 시작했다. 이어 60만 대군이 일제히 할당된 지역으로 각각 퍼져나갔다. 오사카 성은 물론 교토, 나고야, 규슈 등 전국 각지로 60만 병력이 흩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각 곳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일제히 성을 허무는 일이었다. 전 왜의 백성들을 일제히 동원하여 성곽이란 성곽은 모두 허무는데 동원한 것이다. 이는 에도성과 오사카 성도 예외가 아니어서, 성은 헐리고 해자는 매워졌다.
방어 수단을 없애 사전에 농성하는 것을 방지하고, 이차적으로는 잔존하는 무사들의 무기를 반납 받는 일이 진행되었다. 또 무사라는 신분도 차제에 없애버리고 만민평등을 선언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일부 무사들의 저항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이는 한갓 불나방이 불을 보고 덤비는 꼴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차례로 이들 또한 모두 잡혀 처형되고 왜의 전토가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러는 동안 왜왕이 북경 성에 도착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일왕으로 명받은 광해 또한 일왕성에 도착하여 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물론 통치의 기반이 되는 것은 현지에 주둔 중인 제 군사들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흐르는 세월 속에 다시 봄을 맞은 어느 날이었다. 자금성에서 새로운 명이 떨어졌다. 지금의 북미 및 남미 일대를 점령하라는 명령이었다. 또 이 명에는 히데타다, 히데요리 및 주요 영주들 또한 함께 자금성으로 압송해오라는 밀명도 전해졌다. 또한 이 칙서에는 각 장수들에 대한 배치 또한 함께 전해졌다.
이에 따르면 권율 부대 및 충순, 충의왕 군단은 북미로 향하게 되었고, 신립은 여진 기병 5만 도합 15만 병력으로 일본 전토를 지배하에 두도록 했다. 또 곽재우 군단은 귀국을 명받았다. 여기에 해군은 이억기를 총대장으로 하여 북미 정벌에 20만이 참여하도록 했다. 나머지 10만과 이순신은 귀국을 명받았다.
그리고 금번에 항복한 왜병들 또한 남미 및 북미지역 전투 참여시키도록 하라는 명도 있었다. 말썽을 소지를 근원적으로 없애기 위해 아예 왜에 남겨두지 않고 전부 남미 쪽 정벌 사업에 동원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조치를 취해도 왜병들은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무기를 빼앗긴데다 조선 해군의 집중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실려 가는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무튼 이들 왜병 외에 최소 한 번 이상 조선을 배신한, 이여송 및 저력토의 군사들 모두가 북미 정벌 사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렇게 황제 이진의 명이 속속 시행되던 어느 날 마침내 왜의 귀국 1진이 황성에 도착했다. 그 속에는 히데타다 및 히데요리는 물론 왜의 각 지방 영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보고 받은 이진이 대전내관을 불러 명했다.
“경양궁(景陽宮)에 머물고 있는 왜왕 고요우제이(後陽成)는 물론 전 대신들을 집합시키도록 하라. 또한 압송되어온 왜의 주요 인물 모두를 여기에 포함시키도록!”
“네이, 황상!”
대전내관이 명을 받고 물러나자 황제 이진은 무언가 마음이 편치 않은지 이마에 주름을 잡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렇게 채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아 정보부장으로 발령 난 송익필을 대신해 새롭게 비서실장에 임명된 송한필이 와서 고했다.
“황상! 어전 회의가 준비되었사옵니다.”
“알겠소.”
황제 이진이 자리에서 뻘떡 일어나 조양궁으로 향했다.
황제 이진이 조양궁에 드니 전 공경대신들은 물론 왜왕을 필두로 왜에서 잡혀온 인물들이 무리지어 뒷열에 무릎 꿇려져 있었다. 이를 일별한 이진이 근엄한 표정으로 용상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 짐으로써는 만부득이 염치없는 짓을 해야겠소.”
황제 이진의 말에 모두 의아한 시선으로 황제의 용안을 훔쳐보는데, 유독 흑 빛이 되는 자가 있었다. 왜왕 고요우제이(後陽成)였다. 혹시 자신을 처형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것이다.
그렇게 입을 뗀 후로도 황제 이진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거운 중압감이 전내에 자욱하게 깔렸다. 그러고도 한참을 그렇게 침묵을 유지하던 황제 이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금번에 잡혀온 왜의 떨거지들을 모두 처형하려 하오.”
“황상! 그것은........”
차마 더 이상을 말을 잇지 못하는 내각수보 유성룡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선 장수들이 한 약속을 어기게 됨은 잘 알고 있소. 허나 저자들로 말하면 임금에게 반기를 든 역신들 아니냐 말이오. 엄연히 저들 나라의 왕이 있는데 저희들끼리 작당하여 땅을 갈라 갖고 군사를 길러 불충을 자행했으니 한 나라를 통지하는 위치에서 보면 분명 역신들이 맞지요?”
“하오나 황상! 저들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것이오니........”
다시 한 번 간하려다 주춤하는 내각수보 유성룡이었다.
“좀 전에 짐이 말한 것이 대의명분이라면 이제부터 그럼 실리적으로 접근합시다. 만약 말이오. 저들을 살려준다 칩시다. 하면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오? 전혀 이로움이 없음입니다. 저들은 혹시 모를 왜 땅에서 준동할 무리들의 깃발에 쓰일 대의명분만 제공하게 되니, 차라리 없애치움이 나을 것이오.”
“저들이 있으나 없으나 반란무리들은 어떠한 대의명분이라도 가져다 붙일 것이니........”
이번에는 이항복이 한마디 하려 했으나 중간에 치고 들어오는 황제 이진 때문에 말을 다 이를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소. 하지만 만약 저들이 변심하여 집단탈주라도 하여 왜에 스며드는 날이면 큰 변고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소. 하니 왜 짐이 그런 후환을 남겨두어야 하오. 뒤는 깨끗이 해두는 게 나으니 더 이상은 아무 말들 마오.”
황제 이진의 말이 이에 이르니 신하들 모두 조개 입이 되어 서로의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통역을 통해 이를 전해들은 이들 모두 분개하는 가운데 히데타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일갈했다.
“일국의 제왕이라는 놈이 정말 신의 없기로는 일개 필부만도 못하구나. 하하하........!”
히데타다의 말에 전 대신들이 전전긍긍하는데 황제 이진만은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맞다! 그래도 짐은 행해야겠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고 후환을 남겨 제대로 발 못 뻗고 자느니, 차라리 짐은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길을 택하겠다.”
“정녕 후안무치한 놈이로고!”
히데타다의 욕설에 노한 눈을 부릅뜬 황제 이진이 큰 소리로 명했다.
“데리고 나가 모두 처형하라!”
황제 이진의 명에 많은 신하들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두려움에 떨었다.
이렇게 일국의 군주자리는 때로 모진 면도 있어야 유지되는 것이다. 보살 같은 마음만 먹고 행한다고 한 나라가 유지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아무튼 일왕을 제외한 전 왜의 무장들을 처형시킨 황제 이진의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자연스럽게 찾은 것은 새롭게 대불당(大佛堂)이라 명명된 정 귀비 아니 망아 비구의 처소였다. 황제 이진이 아무 말 없이 경내를 거닐자 소식을 접한 망아가 급히 이진을 찾아뵙고 말했다.
“황상께서 친림하심은 지극한 광영이오나 용안에 수심이 깊사옵니다.”
“오늘 그런 일이 좀 있었소.”
“차라도 한 잔 들며 근심을 내려놓으시죠?”
“그럽시다!”
황제 이진은 앞장서서 대불이 모셔진 법당 안으로 향했다. 돌아보며 이진이 물었다.
“부족한 것은 없소?”
“없사옵니다. 황상! 황상의 보살핌에 만사가 봄이옵니다. 황상!”
“그렇다면 다행이고........”
끝말을 얼버무린 이진이 곧 법당에 좌정하자 망아가 급히 국화차를 내왔다.
“드셔보시옵소서! 심신을 가라앉히는 데는 탁월한 효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황상!”
“고맙소!”
“어인 말씀을........!”
황제 이진의 사례에 비구의 신분임에도 가볍게 볼에 홍조를 띠는 망아스님이었다.
망아가 권하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넣고 잠시 그 맛을 음미하던 이진이 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욕심은 끝 간 데 없이 일고........ 참으로 다 부질없는 짓이거늘. 알면서도 오늘 행하는 일은 탐욕에 가득 찬 행위이니........”
“황상 전에 드릴 말씀은 아니나 덕분에 소승은 요즘 더 행복해졌사옵니다. 좀 전에 말씀하신 욕심을 내려놓은 탓이 아닌가 하옵니다.”
“좋은 현상이오.”
가볍게 받은 이진이 돌연 허공에 시선을 두고 한동안 자잘한 천정의 문양을 더듬었다.
그러길 일 다 경 다시 식은 차를 한 모금 입에 댄 그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또 찾아오도록 하지요.”
“더 쉬셨다 가시지 않으시고요?”
“항상 일이 밀려 있다오.”
이렇게 말하며 다시 분주한 일상으로 빠져드는 황제 이진이었다.
------------------------
============================ 작품 후기 ============================
고맙습니다!^^
늘 행복한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