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8 회: 십년대계(十年大計) 부국강병(富國强兵) -- >
5
그날 오후였다.
이진이 최담령과의 술자리로 조금은 피곤함을 느껴 강녕전에서 쉬고 있는데, 광해가 급히 찾아들었다.
“전하!”
한마디 불러놓고는 이진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면을 보더니 미안한지 주저주저 말을 못하는 광해였다. 손에는 보자기를 하나 든 채였다. 이진이 그런 광해를 웃는 낯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중대 사안이 있어서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전하!”
“거 앉거라!”
“네, 전하!”
말과 함께 보료에서 비스듬히 몸을 일으킨 이진이 말하라는 뜻으로 눈썹을 위로 치켜뜨자 얼른 광해가 입을 열었다.
“해서여진의 합달부에서 누루하치에게 영토할양을 요구하며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겠다는 것이죠. 여기에는 그간 우리의 중재로 한편이 된 저들의 엽혁부 이하 다른 해서 여진 또한 한팔 거들고 있사옵니다. 전하!”
“하하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쳐대는 구나. 아직 누루하치의 진정한 실력을 몰라 설쳐대는 것이야. 해서 여진 네 부족이 연합해 덤벼도 누루하치에게는 상대가 안 될 것이다. 흐흠..........!”
이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응방안을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무기를 일부 지원받았다 하나 아직은 누루하치의 상대가 아니야.”
이 말은 이진에게 아직 뚜렷한 대응방안이 떠오르지 않자, 지나가는 말로 던진 말이었다.
“흐흠.........!”
잠시 더 고심하던 이진이 입을 열었다.
“저희들끼리 싸워 자신들의 역량을 감소시키는 것은 우리도 바라는 바지.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누구도 우위에 서서는 안 됨이야. 저희들끼리 비슷한 세력으로 오래 서로 싸우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주 좋아. 우리에게는 힘을 키울 시간이 필요하니까. 하면 대응방안이 서지 않겠나? 아우가 그 대응 방안을 내보도록.”
이진의 요구에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이진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광해였다. 이에 이진이 측근에서 군사(軍師), 부군사(副軍師)로 부리고 있는 송익필 형제와 도사 지함두, 아직 궐내에 남아 있는 최담령을 부르도록 대전내관에게 명했다.
그들이 올 때까지 잠시 시간이 있자, 광해가 남색 보따리를 풀어 보이며 이진에게 고했다.
“전하! 이것은 세작에 의해 명국에서 건너온 물건으로 도자기 안료로 쓰인다는데 소신으로는 전연 짐작할 수가 없사옵니다. 이것의 분말을 소량 첨가하면 명국 도자기의 특징 중 하나인 복숭아 색과, 밝은 노란색, 아주 밝은 흰색을 띤다고 전해온 물건입니다.”
“말과 함께 광해가 무릎걸음으로 두 덩어리의 괴를 이진에게 받쳐 올렸다.
“어디.........!”
무심코 받아들었던 이진이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웬 놈의 돌이 이렇게 무거우냐? 하마터면 떨어트릴 뻔했다! 철보다도 배는 무거운 것 같은데?”
“소신도 그렇게 느꼈사옵니다. 전하!”
광해의 말을 들으며 이진은 한 덩이씩 손으로 그 무게를 계속 가늠해보더니 말했다.
“이렇게 무거운 돌은 아마 중석(重石) 밖에 없을 것이다. 오죽 돌이 무거우면 무거울 중(重)자를 써서 이름을 붙였겠는가?”
광해에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천정을 보며 중얼거리던 이진이 또 한 명의 대전내관에게 명했다.
“가서 호조에 있을 과인의 장인을 들라 해라!”
“네, 전하!”
그가 명을 받고나자가 이진은 중석하면 떠오르는 대한중석(大韓重石)을 연상하고 자연스럽게 강원도 상동광산을 떠올렸다. 1950~60년대 우리나라 수출의 70%를 점했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광산이었다.
그런데 이진이 아는 상식으로는 중석(重石) 즉 텅스텐(W)을 생산해낸다 해도 이를 녹이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상당한 고온에서 녹는 것으로 아는데 지금의 백탄(白炭)의 열량으로는 어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진이었다.
천생 탄전도 개발해 더 고열을 얻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역청탄이면 좋은데 우리나라에서 이는 북한에 조금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일반 무연탄이라 해도 백탄보다는 열량이 나을 것이므로 아예 탄전까지 개발해 연료로도 쓰고.........
여기까지 생각을 한 이진의 머리에 불현듯 석탄을 연료로 해 움직이는 ‘증기기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나 증기기관에 대해서 이진이 아는 상식은 물을 오래 끓이면 그 수증기가 주전자 뚜껑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 힘을 이용해 기차며 선박이 달릴 수 있는 증기기관을 만든다는 정도의 원리 수준이었다.
과학과 기술에 재능이 있는 자들 모두 한군데 불러 모아 이 원리만 가르쳐 주고 증기기관을 발명해내면 좋고, 아니면 말고 라는 식으로 이를 연구시켜보고 싶은 충동이 드는 이진이었다. 생각이 나면 곧 움직이는 것이 이진의 큰 장점 중의 하나였다.
이진은 곧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김 내관을 불러 명했다.
“이판을 들라 해라!”
“네, 전하!”
그 마저 물러가자 깊은 생각에 잠기는 이진이었다. 이진이 긴 시간 침묵을 고수하자 광해가 불편한지 몸을 뒤챘다.
“편히 앉거라!”
“황송하옵니다. 전하!”
이진의 명에 비로소 편하게 양반다리로 앉는 광해였다.
잠시 후.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은 가장 먼저 또 가장 가까운 곳에 기거하고 있던 군사 사인방이었다.
“불러계시옵니까? 전하!”
“어서들 오오.”
그들이 들어오자 자리를 권하고 반듯하게 몸을 세운 이진이 여진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이런 상황이다. 군사들의 의견은 어떤지 각자 의견을 피력하라!”
이진의 명에 모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사인방이었다. 이때 살며시 눈을 뜬 송한필이 입을 열었다.
“소신이 만약 누루하치라면 연합 세력을 부수는 데는 그 족장부터 치는 것입니다. 하면 통솔자를 잃은 그들은 서로 단합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질 것인즉, 격퇴하기는 여반장일 것이옵니다. 전하!”
“흐흠........! 아주 좋은 방안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렇게 안 당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를 일러주어야 할 것 아니냐?”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때 모처럼 지함두가 눈을 반개하고 입을 떼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장백여진의 야류장 부족과 너연 부족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라.”
“네, 전하!”이진의 명에 한 번 고개를 조아린 지함두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만약 해서여진이 무너진다면 그 다음 누루하치의 창이 향할 곳은 어디겠습니까? 당연히 장백여진과 동해여진입니다. 이를 잘 설득해 이들로 하여금 누루하치의 뒤를 급습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면 누루하치로서는 한군데 전력을 집중할 수가 없어서 큰 낭패를 당할 것이옵니다. 전하!”
“옳거니!”
무릎을 탁 친 이진이 지함두를 상찬해 마지않았다.
“아주 좋은 안이다. 다른 의견은 없는가?”
“이 기회에 아예 여진을 정벌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전하!”
최담령의 말에 이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우리의 실력도 부족하고 여건이 무르익지 않았다. 왜의 재침이라는 산도 넘어야 하고, 여진을 기미정책으로 관리하는 명국의 산도 넘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명국의 군대가 산해관을 넘을 때는 아군 수군이 최소한 뱃길로 저들의 자금성으로 달려들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 함이야.”
“밝게 보셨습니다. 전하!”
송익필의 말에 씩 웃는 것으로 답변을 한 이진이 최종 결론을 내었다.
“꾀를 낸 사람이 그 실행방법은 누구보다도 잘 알 터. 각각 송한필 군사는 합달부에 합류해 저들이 전쟁에서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달래고, 지함두 부군사는 장백여진으로 가서 그들을 달래 누루하치의 뒤를 치도록 하라.”
“네, 전하!”
그들이 명을 받들자 이진은 곧 그들을 내보냈다. 이때는 이미 이조판서 김우옹이 등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러계시옵니까? 전하!”
“어서 오오. 일단 자리에 앉으시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김우옹이 자리를 잡는 것을 본 이진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태종 대왕 시절에 ‘도천법(道薦法)’ 이라는 것이 있질 않았소?”
“각 지방을 다스리는 관찰사가 추천한 지방의 우수한 인재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여 일하게 하는 제도 말이옵니까?”
“그렇소. 그 때와 마찬가지로 천인이 되었든 상민이 되었든 신분을 가리지 말고 재주 있는 자들은 모두 추천하라 이르시오. 특히 무엇을 잘 발명해 내거나 특별한 재주가 있는 자들은 전부 추천하라 이르시오. 만약 그들이 추천한 자들이 대공을 세우면 연계하여 포상한다고 이르도록 하고.”
“알겠사옵니다. 전하!”
“개중에 세종 대왕시절의 이천이나 장영실 같은 인재가 없다고 누가 단언 하리오?”
“옳으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전하의 뜻대로 좋은 인재들이 많이 추천되었으면 좋겠사옵니다. 전하!”
“하하하.........! 그야 추천자들의 마음을 얼마나 잘 움직이느냐에 달린 일, 이판께서 잘 해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진의 명에 의해 그가 곧 물러가자 잠시 후에는 이진의 장인인 허명(許銘)이 등대하였다.
“불러계시옵니까? 전하!”
“격조하였습니다. 장인어른!”
이진의 안부 인사에 덤덤한 표정의 허명이 답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했습니다. 전하! 전고의 예로 비춰볼 때 외척이 발호해서 나라가 잘 되는 꼴을 못 보았사옵니다. 지금 맡고 있는 직도 무거운 감이 있사옵니다. 굽어 살피시옵소서! 전하!”
“멀리도 그렇다고 가까이도 하지 않는 다라? 일견 맞는 말씀이긴 해도 제가 사저에 있을 때 드린 말씀이 있질 않사옵니까? 형세 외롭다고. 왕이 된들 나아진 게 없습니다. 여전히 외로운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이 나라 군주의 자리가 늘 외로워 ‘고(孤)’라 표현하는지 모르지만, 딱 고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 같습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다름이 아니라 이제 광산개발도 본 궤도에 올랐고, 누가 이제 과인에게 시비할 사람도 없으니, 광산에 관한한 양지로 옮겨도 이제는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명의 진상요구가 있을 것으로 사료되나, 구더기 무서워 장 안 담글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해서 드리는 말씀인바 광보사(鑛寶司)라 하여 별도의 관청을 하나 설립할까 합니다. 이 직의 중요성을 감안해 계속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장인어른!”
“전하의 명이오니 쫓아야 옳사오나, 종전에 말씀 드린 대로 외척이 정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사료되어.........”
“그것이 어찌 정치 전면에 나서는 일이겠습니까? 숨은 국부(國富)를 찾는 일이지요.”
“그래도 중요 관직에 앉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전하!”
“허허.........!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업무의 연속성 상 장인어른께서 꼭 맡아주셔야겠습니다.”
“거 참.........!”
입맛을 쩍쩍 다시던 장인 허명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미거하나마 전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고맙습니다. 장인어른! 편히 모셔야 하나, 나라의 일 갈 길 멀고, 남에서 북에서 적들은 수시로 준동하는 이때에, 외로운 고에게 장인어른은 큰 힘이 되어 주시고 계십니다.”
“너무 과한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전하!”
“기왕 맡으신 길에 큰 난제 몇 가지를 해결해야 되겠사옵니다. 장인어른!”
“말씀 하시죠. 전하!”
이진은 한 쪽 옆에 있던 돌을 넘겨주며 말했다.
“한 번 들어보세요. 쇠보다도 족히 배는 무겁습니다.”
이를 받아든 허명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무슨 돌이 이렇게 무겁사옵니까? 전하!”
“무거우니 중석(重石)이라 명명하지요.”
아직 서양에서도 텅스텐의 이름이 지어지기 전이라 그 존재도 모르는 시대에 이진은 이의 이름까지 짓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이 중석을 안료로 쓰긴 썼지만, 무언지도 모르고 그냥 쓰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중석이라? 제대로 지은 이름 같습니다. 허허허.........!”
“그것이 무엇에 쓰일 것이냐 하면.........”
여기서 잠시 뜸을 들이자 한 옆에 있던 광해의 눈도 빛나며 총기가 감돌았다.
“도자기의 안료로도 쓸 것이지만, 더 중요한 쓰임이 있습니다. 이를 미량 철에 섞으면 아주 강한 철 즉 강철(鋼鐵)이 탄생할 것입니다. 하면 이것으로 식칼이나 도검 등 무기를 만들면 아주 단단한 쇠붙이가 되지요. 또 이 돌 자체가 단단하기 짝이 없어서 쇠를 자르는데도 쓰일 수가 있습니다. 즉 절삭공구(切削工具)라 명명하면 되겠는데, 그런 용도로도 쓰일 수 있으니, 아주 귀한 돌이기도 합니다.”
이진의 말에 장인 허명은 물론 광해마저 해연이 놀라 입이 벌어진 채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기상천외한 말과 행동으로 가끔 놀라는 광해지만, 이런 분야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라 그 놀라움이 더 컸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흐뭇해지는 이진이었다. 말년에 소설을 연재하면서 얻은 지식이 이 순간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아, 스스로도 대견스러운 이진이었다.
------------------------------------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늘 좋은 날들 되세요!^^
후의에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