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2 회: 간신들을 모셔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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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은 한동안 침묵을 고수하며 발언을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모든 이목이 주상 이진에게 집중되며, 장내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이때 이진이 진중한 안색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 안에 들어가기 전에 과인은 제 대신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소. 과연 이 조선이 누구의 나라이냐 하는 것이오? 어디 답해보시오.”
“의당 주상전하의 것이옵나이다. 전하!”
“망극 하옵나이다. 전하!”
소인배 이이첨의 대답에 이어 일제히 부복해 그런 질문을 들었다는데 대해 황공함을 표시하는 제 대신들이었다. 그런 장내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이진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오? 어찌 이 조선이 과인 한 사람의 것이리오. 온 백성의 것이고,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의 것이기도 하오. 단지 과인이나 여러분들도 여러 백성들 중에서, 이 나라를 잘 이끌어달라고 선임된 것이라고 생각을 해야 할 것이오.”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주권재민론에 모두 이진이 겸허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황송해 하는 제 대신들이었다. 그러나 현대에서 살다온 이진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인지도 모를 이 사상에, 이들은 참으로 덕이 뛰어난 군주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진의 이 발언에 장내가 숙연해진 가운데 그의 발언이 이어졌다.
“과인이 진실로 말 하건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만약 과인의 정무를 대리할 자가 있다면 과인부터라도 직접 농한기에 들판에 나가 훈련을 받고 싶고, 혹여 전쟁이라도 나면 일선에 나가 싸우고 싶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이진이었다. 꿈에서라도 두 번 다시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솔직한 속내였다.
“전하! 아니 될 말이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무비사 낭청 박승종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도 전혀 표정 변화 없이 손을 저어 만류한 이진의 발언이 이어졌다.
“또 그 연장선상에서 만약 과인에게 정남(丁男:16~60세의 남자)에 해당하는 세자가 있다면 그 역시 일정기간 수졸이라도 시키고 싶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흑흑흑..........!”
온 대신들이 부복해 고하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이를 묵묵히 지켜보던 이진이 장내가 다소 진정되자 말을 이었다.
“과인의 말과 같이 이 나라가 어느 한 사람의 나라가 아니기에, 과인부터 여기에 있는 제 공경대부는 물론 천역 천출의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라를 지킬 의무가 있는 것이오. 하지만 각자의 위치가 다르니, 마음만은 이렇게 간절해도 역에 맞게, 각자의 그 자리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정한 몫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소? 과인의 생각이 어떻소?”
“옳사옵니다. 전하!”
새로 비변사 구성원들이 된 자들이 일제히 엎드려 동의하는데, 기존의 대신들은 누구는 동의하고, 누구는 눈만 껌벅껌벅, 누구는 벌써부터 누런 이빨을 보이는 자도 있었다. 뭔가 엮인다는 느낌을 가진 자이리라.
“해서 하는 말 이오만, 응당 전 구성원이 떨쳐 일어나 국가 보위에 나서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우니, 각자의 처한 입장에 맞게 군역을 집시다. 지난번 과인이 제안한 바와 같이 양반에서 천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군역을 질 의무가 있되, 이것이 가능치 않은 자는 양반층에 한해 면포 2필로 징집을 면케하되, 이것이 가능치 않은 자는 사노비라도 내어야 할 것이고, 이것도 불가능하다면 본인 스스로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지는 것이오. 과인의 말이 결코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오. 힘없는 백성들은 스스로 먹을 것 싸와, 자신의 몸뚱이 지킬 연장 마련 해와, 훈련에 임하는데, 그들의 모습 가여워서라도 맨몸뚱이로 나서지 않게, 그깟 면포 2필 지원하는 것도 인색하게 군다면, 이 어찌 나라의 구성원이라 할 수 있겠소? 그야말로 어려운 백성들과 천역들에 올라타, 기생하자는 것 아니오. 아니 그렇소?”
“옳사옵니다. 전하! 백 번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이이첨부터가 눈물 흥건한 눈으로 지 이마 깨지는 줄 모르고, 마루에 고두를 행한답시고 이마를 찧고 있었다. 그 또한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해 더 그런지도 몰랐다. 그러나 차가운 눈의 소유자들도 있으니, 곧 반론을 제기했다.
“국초 개국 이래 양반들에게 그런 군역을 지운 예가 전고에 없었음입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예판 정철의 말에 이어 상당수 기존 대신들이 엎드려 재고를 요청했다.
열심히 주워 지껄였건만 결국 씨도 먹히지 않은 일이라, 은근히 화가 난 이진이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여전히 기생하자는 생각들이오?”
“그것은 기생이 아니라 당연히 양반이 향유할 권리이옵니다. 전하!”
이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소리 지르는 이 있으니 유사당상에 임명된 김천일이었다. 처음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로 출발하여, 지평(持平) 때 소를 올려 시폐(時弊:이 시대의 폐단)를 적극 논하다가 좌천되기도 했고, 선조의 서행(西行) 소식에 애통해 하며, 의병을 일으켰던 자답게 발끈한 것이다.
“만약 전쟁이 터진다면 왜놈들이 양반은 가려서 살려주고, 천역과 일반 백성들만 골라 죽인다고 지금 생각하는 거요. 뭐요? 권리 운운하는 것도 사직이 있고 난 다음이지, 딴 나라에 사는 사람들처럼 안일한 생각 말고, 주상전하의 말씀에 따르시오. 허허, 그것 참........!”
분연히 자리에 앉는 김천일을 보고 말빨 센 정철과 정인홍도 잠시 잠깐 벙쪄 할 말을 잊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술 더 뜨는 이 있으니 말단 참봉 이이첨이었다.
“유사당상의 말이 가한 줄 아뢰옵고, 주상의 옥음 또한 사대부들을 많이 봐준 제안인 줄 아뢰옵나이다. 헌데도 된장인지 똥인지도 모르고 설쳐대는 자들은, 일벌백계로 당장 내쳐야 할 줄 아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행동대장인 윤인, 이인경, 한찬남까지 일제히 엎드려 한팔 거든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여기에 지변사재상 셋이 일제히 가세하고, 손에 든 비상을 굴리고 있던 박승종 여타 군문에 발을 담그고 있거나, 백면이었다가 황공한 은혜를 입을 자들이 또한 잇따라 부복하니, 기존 대신들이 멍하니 할 말을 잃었다.
그것도 잠시 잠깐 발분한 정철이 제 이마 깨지거나 말거나 고두하며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전하! 전고에 없는 예를 행하시면 전 양반들의 집단 반발을 초래하여 상소가 산더미를 이루고, 상경하여 대궐 앞에 읍소하는 자들로 정사가 마비될 것이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기존 대신들이 하나가 되어 모두 또 부복했다.
“그런 자들이 있다면 일일이 찾아내어 그런 자들부터 저 육진에 배치하던지, 아니면 왜구와 가까운 곳에 수자리를 시키시옵소서. 하옵시면 그런 작태가 쏙 들어갈 것이옵니다. 전하!”
역시 이이첨이었다. 외양도 그럴 듯해 비분강개하여 침까지 튀겨가며 광분(?)하는데, 그 피해는 옆에 있는 박승종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에 얼른 더러운 침을 훔친 무비사낭청 박승종이 또 부복하여 아뢰었다. 무비사(武備司)가 무엇 하는 곳인가? 병조에 속하여 군적, 마적, 병기, 전함, 점열, 군사 훈련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낭청도 겸하고 있는 박승종이었다. 그런 자답게 나랏일을 근심하는 그의 발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하! 전고의 예라는 것도 그렇사옵니다. 모든 법이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하거늘, 왜구의 침입이 코앞이라는데, 구태의연하게 전고의 예만 고집하는 것은 시대의 추이를 모르는 청맹과니(靑盲+과니: 눈 뜬 장님)짓이 아닌가 하옵니다. 하옵고 언제부터 우리 조선조가 숭무(崇武)의 기풍을 버리고, 이렇게 천시했습니까? 전하! 저 고려시대만 해도 고토를 회복하고자 노심초사하지 않았사옵니까? 전하! 물론 그 폐해 때문에 이렇게 된 줄은 잘 압니다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옵니다. 나라가 백척간두에 선 지금, 시류를 모르고 안일만 추구하는 자들은, 녹봉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 아닌가 합니다. 군왕이시여! 굽어 살피시어, 만난이 있더라도 이 법은 꼭 통과시켜 눈앞에 닥친 재앙을 막아야 합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일제히 엎드리는 신입들 위로 또 한 사람 분연히 일어서는 자 있으니, 비교적 합리적인 좌부승지 이원익이었다.
“전하! 방금 낭청의 말이 지극히 합당하옵나이다. 사직을 위해서는 더 이상 재론할 가치가 없는 일 줄 아뢰옵나이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이에 더욱 힘을 얻은 신입들이 또 다시 일제히 부복하는데, 기존 대신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었다. 일시 전열이 흐트러진 것이다. 이에 이진이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직분이 낮다고 해서 그 생각마저 낮은 것은 절대 아니오. 방금 박승종 무비사 낭청의 말대로 법이라는 것도 그 시대에 맞게 개정되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오. 해서 과인의 제안이 옳다고 생각해, 이 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재론을 금하겠소. 각 실무부서는 좀 전에 제안한 과인의 말을 잘 새겨, 시행하는데 한 점 흐트러짐이 있어서는 안 되겠소. 이상으로 이 안을 통과시키는 바이오.”
쾅! 쾅! 쾅!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또 다시 부복해 재심의를 요구하는 기존의 대신들을 싸늘히 노려본 이진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왕의 전용 출구인 뒷문으로 향했다. 이에 지변사재상들이 벌떡 일어나 그 뒤를 바삐 따르는데, 노 재상 김귀영만은 명아주 지팡이를 앞세워 세발로 엉금엉금 기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그래도 한 번 더 이마를 바닥에 찧는 제 대신들을 싸늘히 노려보며 조소하는 자들이 있으니, 감히 맡은 업무가 있는지라 함께 따르지 못하는 유사당상 이하 낭청들이었다. 괜히 애꿎은 문서나 힐끔힐끔 보며 문서 너머로 그런 그들을 조소하고 있었다.
어느새 육 승지들과 왕의 수행인들마저 떠난 자리에는 고루한 옛 법에 매몰된 자들만 남아, 점점 흔들리는 양반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아직도 고개를 마룻바닥에 묻고 있었다.
사실 속오군이 편성되는 임란 때만해도 양반까지 군에 적을 두게 되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전시였으므로 한 번 호되게 당했고, 당하고 있는지라 별 무리 없이 이 법이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것이 또 평화가 찾아오니 나중에는 사노비들만으로 편성되니, 그 때를 잊었음이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양반의 손에 있던 사노비를 중앙정부에서 통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으니, 영 정조에는 양반의 국가 지배력이 커진 측면도 있었다.
아무튼 이로써 최소한의 전란 대비는 하게 된 이진이었다. 홀가분함을 느낀 이진이 뒤를 돌아보았는데, 의당 따라야할 훈련도감의 지사 신립이 안 보였다.
“신 지사는 어디 간 것인가?”
“일을 하러 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전하!”
김 상선의 보고에 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전내관에게 지시를 했다.
“그를 사정전으로 들라 해라!”
“네, 전하!”
후속조치를 취하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이진이 사정전에 당도하여 채 일각이 지나지 않아 신립이 등대하였다.
“전하.........!”
“거 앉으시오.”
신립을 자리에 앉힌 이진이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1차로 선무군관 이하, 각개 병을 훈련시킬 전담영장을 빠른 시일 내에 훈련시켜, 각 진관(鎭管)에 배치하는 것이 급선무요. 그래야 그들을 통해 제대로 된 훈련을 시킬 수 있을 것 아니오? 해서 과인은 한꺼번에 많은 영장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시설도 확충하고, 그 기간도 3개월로 단축시켰으면 좋겠소. 장군의 생각은 어떠하오?”
“합당하옵니다. 전하!”
“필요한 지원은 요청하도록 하고, 과인의 말대로 속히 시행하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상의 대화로 신립이 물러가자 이진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산보를 나갔다. 이제 꽃들 다투어 피어 방향(芳香) 향기로운데, 더는 이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피에 젖지 않도록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또 다시 분주해지는 이진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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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