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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임해-43화 (43/210)

< -- 43 회: 부족한 재정을 벌충하기 위한 묘수 -- >

3

“잠시 쉬었다 합시다.”

호조판서 정탁과 신임 상평창 제조가 된 유성룡에게 말을 한 이진은 곧 전각 밖으로 나갔다. 그런 이진에게 홀가분한 휴식이란 없었다. 그림자 같이 따라 붙는 많은 수행원들 때문에 이진은 늘 남의 시선 하에 놓여 있어야 했다.

어차피 제대로 쉴 팔자가 못 된다면 그동안 업무라도 하나 처리하기 위해 이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송익필 형제 또한 그림자 군단에 속해 소리 없이 뒤에 시립해 있었다.

송익필을 보니 그동안 잊고 있던 지함두라는 도사가 생각났다. 정여립의 모사로 이진으로부터 장 100대를 선고받고, 송익필에 끌려간 후로는 못 본 것이다.

“지함두는 어떻게 됐소?”

“시늉만 요란했지 바지저고리에 솜도 두둑이 넣고 장을 쳐서, 장 100대라야 남 10대 맞은 폭도 안 될 텐데, 아무래도 꾀병 중인 것 같습니다.”

이진의 의중을 잘 알고 있는 송익필이기에 겁만 많이 주고 실질적 형 집행은 때리는 시늉만 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장 100대를 제대로 다 맞으면 열에 아홉은 죽어나간다. 그렇게 되면 유배 가서 살 사람이 몇 사람 없었다. 유배형에는 부가적으로 장 몇 대 하는 식으로 장형이 부가되기 때문이었다.

“흐흠........!”

“곧 모습을 보일 겁니다. 전하!”

“알겠소.”

가볍게 답한 이진이 이번에는 가주서 송한필을 돌아보고 말했다.

“가주서는 도승지 유성룡의 후임으로 임명될 승지로 음....... 한백겸을 보임한다는 첩지를 작성하여 띄우시오.”

“네, 전하!”

채 일 년도 안 된 이진의 왕 노릇이지만 대신들의 이론적 깐족에 벌써부터 물린 감이 있어, ‘동국지리지’ 등을 저술하는 등 훗날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한백겸을 승지로 특차시키기로 한 것이다.

사람됨이 단아하고 마음가짐이 관대하였으며, 지극히 효우(孝友)의 행실이 있을 뿐 아니라,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순리(循吏)로 칭해졌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으로 현  38세였다. 아무튼 잠시 주변을 산책하던 이진은 그들이 너무 오래 기다릴 것 같아 편전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를 상의하던 정탁과 유성룡이 이진의 등장에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둘을 은은한 미소로 바라보던 이진이 입을 열었다.

“둘이 무엇을 상의하였는지 몰라도 자, 이제 실무적인 것을 논해봅시다.”

“네, 전하!”

“우선 사람의 조직개편이 우선인데, 인사권은 신임 제조에게 줄 테니, 알아서 하시고. 음........! 조직을 크게 세 분야로 대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소. 아니 환곡업무까지 치면 네 분야가 되겠군요.”

“과인이 알기에 상평창이 춘궁기에는 구휼청이 되어 환곡제도를 운영하는 것으로 아는데 맞소?”

“네, 전하!”

“그렇다면 우선 주조소를 설치하여 과인이 말한 법정통화들을 주조하고, 또 한 부서는 은행의 업무 즉 돈의 예금과 대출을 맞고, 또 한 부서는 가을 수확 철에 쌀 등 농산물을 사들였다가, 곡가가 급등하는 춘궁기에 풀어 물가를 안정시키는 상시평준(常時平準) 정책을 써야겠지요? 여기에 환곡 대여와 수납 업무를 해야 하는데 너무 방만하니, 환곡 업무는 아예 은행의 업무에 통합시키도록 합시다.”

“네, 전하!”

“문제는 돈을 찍어서 보급하고 대여하려면 은행이 있어야 되는데, 이는 한양 등 큰 도시부터 시작해서 점차 작은 고을까지 확대하는 것으로 합시다. 하고 창고를 중점적으로 지어 지금보다 물가조절 기능을 보강하되, 창고와 은행창구는 한 건물에 몰아, 업무의 효율을 기하는 것으로 합시다.”

“알겠습니다. 전하!”

“하고 전비 마련을 위해서는 한시가 급하니 주조설비가 갖추어지는 대로 과인의 사저에 보관되어 있는 동부터 갖다 주조를 시작하시오. 물론 공짜는 아니오. 과인도 엄연히 사재가 있으니, 나중에 이자까지 톡톡히 받아 차감할 것이오.”

“네, 전하!”

“나의 구상은 이러한데 하실 말이 있으면 하세요.”

“은과 금은 어찌 합니까? 전하!”

유성룡의 물음에 이진이 신속히 답변했다.

“아, 그 문제도 있군요. 그것은 우선 내탕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금과 은으로 충당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것은 당분간 구리와 함께 수입하는 것으로 합시다. 하고 광산이 재 자리를 잡으면 나중에는 거기서 모두 충당하는 것으로 하고.”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제 큰 줄거리는 다 결정이 된 것 아니오?”

“그렇사옵니다. 전하!”

“세부적인 실무절차는 두 분이 상의해서 처리하시오. 군왕쯤 되어서 너무 시시콜콜 작은 것까지  참견하면, 그것도 재미없는 일이지요. 과인은 이만 일어나리다.”

“네, 전하!”

이진은 둘을 남겨두고 사정전을 물러나왔다.

강녕전에 돌아오니 점점 길어지는 해는 아직도 한 발은 남아 있었다. 정성(定省)이라고 왕대비께 문안인사를 드리긴 했지만, 요즈음은 아무래도 소홀한 감이 있었다. 사람이 참으로 간사해서 수렴첨정이 끝나자, 저녁 문안은 내관을 보내는 것으로 대체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이진이었다.

그래도 아침의 문안만은 빠트리지 않고 조알(朝謁)했으니 과히 정성이 부족한 편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 끝에 이진은 모처럼 왕대비께 저녁 문안을 드리기로 하고 차비를 하였다. 그가 움직이자 소리 없는 그림자 내각도 여일하게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상전하, 납시오!”

모처럼의 때 아닌 저녁문안에 왕대비를 모시는 궁녀들이 미처 준비가 안 되었는지 허둥거리며 이진을 맞아들였다.

“어마마마! 강녕하셨는지요?”

“주상도 옥체 미령하시었소?”

“어마마마 덕분에 편안하였사옵니다.”

“호호호........! 빈말이라도 고맙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모자지간이지만 서로 덕담을 하며 모처럼의 저녁문안 인사가 정다웠다.

“헌데, 이 어미가 듣기에 오늘 아주 중대한 회의가 열렸다고요?”

“어마마가 그걸 어찌 아십니까?”

“주상은 이 어미를 벌써부터 너무 퇴물취급하지 마세요. 이 어미도 아직 귀 안 먹고 눈 밝답니다.”

“하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이렇게 대답하고 얼버무리던 이진은 아무래도 왕대비도 알아야 될 것 같아, 간단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왜를 방문했던 통신사에 따르면 왜의 태합 풍신수길이 아주 간특한 자인데다, 전비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해서 침략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보고에, 화폐를 발행하여 그 차액으로 전비를 마련하고자 회의가 길어졌습니다.”

“영명하시오, 주상!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하셨소. 이 아낙은 전혀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데..........”

왕대비의 칭찬에 살짝 멋쩍은 웃음을 지었던 이진이 대답했다.

“자화자찬을 하자면 사저에 있을 때, 만약 이 나라 보위를 물려받게 된다면 어떻게 국정을 운영할까에 대한 생각으로, 많은 걱정을 한 덕이 아닌가 합니다. 어마마마!”

“그래서 이 어미가 가장 잘한 일이 주상을 보위에 올린일이라고 주변에 누누이 말하고 다닌 다오.”

“어찌 어마마마의 은혜를 잊으오리까? 백수 하시면서 소자가 증손을 볼 때까지 옆에서 든든히 지켜주세요. 어마마마!”

“호호호.........! 그렇게 오래 살라하는 것은 욕 이예요. 남들이 들을까 무섭소. 호호호........!”

오래 살라는 말이 즐거운지 왕대비 박 씨는 연신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마마마, 혹시 드시고 싶으신 것은 없으십니까?”

“상중이라 요새 통 비린 것을 못 먹었더니 좀 생각이 나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참으로 우리 조선은 너무 예법이 복잡해요. 좀 간소화 시켰으면 좋겠습니다만, 이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지면 아마 1년이 가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당체 엄두가 나지를 않아서요. 어마마마!”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이 어미가 입이 궁금해도 참듯이 주상도 참으셔야죠.”

“이건 못할 소지지만, 돌아가신 사람이 까딱하다가는 산 사람 잡게 생긴 것이 조선의 예법 이예요. 너무 복잡하고 기간도 너무 길어요.”

“주상, 남이 들을까 무섭소. 어미 앞이라 농으로 한 말로 듣겠소.”

이진의 말이 점점 과격해지자 일단 제동을 거는 왕대비였다.

“어마마마! 드시고 싶은 것을 소자가 몰래 챙길 수도 있사오나, 어마마마께서 드실 분도 아니시고,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이제 장례도 모셨고 봄이 되어 날씨도 따뜻해졌으니, 후원에 산책 정도는 하시죠? 너무 내부에만 계시니 답답하지 않사옵니까?”

“주상의 말을 듣고 보니 그건 그렀네요. 내일은 주상의 말대로 후원으로 산책이나 나가볼까 합니다.”

“그러세요. 걷는 것이 신상에도 아주 좋답니다. 어마마마! 대부분의 왕들이 운동부복으로 승하하지 않았나 소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마마마, 해서 소자는 웬만하면 걸어 다닙니다.”

“듣고 보니 상궁나인들의 말이 헛말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그렇게 바지런히 움직이신다니 이 어미가 듣기에도 훌륭하다고 생각되네요. 아주 좋은 일이예요.”

이후에도 이진은 소소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강녕전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이진은 나흘 만에 허 부인의 침소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전하!”

중전 허 씨가 반가운 얼굴로 이진을 맞아들였다.

“오늘은 무엇을 하고 지냈소?”

“네, 전하! 모처럼 날이 청명하기에 후원으로 산보를 나갔나이다. 전하!”

“그래요?”

“그나저나, 천비의 얼굴의 새까맣게 타지는 않았나요?”

중전의 말에 이진이 새삼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니 별로 탄 것 같지가 않았다.

“전혀 타지를 않았는데?”

“장옷을 써서 그런가?”

“과인이 좀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이오?”

이진의 말에 안색이 변하는 허 부인이었다. 갑자기 이진의 말에 표정이 어두워진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요즘 처남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구료 혹시 서신이라도 온 것이 있소?”

“네, 전하!”

이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고 몰아쉬나 이진의 눈에는 그것이 다 보였다. 정말 왜 회임이 안 되는지 알 수 없는 허 부인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직 자신과 접한 사람치고 아무도 임신이 된 사람이 없었다.

‘혹 내가 씨 없는 수박인가? 설마?’

의혹이 깃들었지만 아직 젊으니 지금 이 문제로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 자위하고, 생각을 접는 이진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아니오.”

이진의 부인에 더 이상 추궁(?)을 않고 허 부인이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과거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올 봄에 시행하기로 한 과거시험 날짜가 며칠 안 남았구나! 유생들은 지금쯤 코피가 터지겠군.’

“구황작물의 씨앗은 심었는지 모르겠구료.”

“파종 직전이라고 했고요. 아! 이제 금광에서 금이 나오기 시작한다고 했어요.”

“거, 참으로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료. 참, 장인어르신은 여전히 건강하신가?”

이진의 물음에 곱게 눈을 흘긴 허 부인이 말했다.

“참으로 일찍도 물어보시네요.”

“어머니 아버지 모두 강건하시다니 염려 말아요.”

“다행이구료.”

“요즘 대신들은 어때요?”

“여전히 꼬장꼬장하지. 하지만 당신 부군이 누구요? 요즈음은 과인이 꽉 잡고 흔든다고.........”

“설마 요?”

“어? 못 믿겠소?”

“산전수전 다 겪어 능구렁이가 다 되신 분들이, 이제 보령 열여섯인 분께 잡힐 라고요.”

“정사는 보령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오. 그들의 예상 질문과 답변만 꿰고 있으면 꼼짝 마라지.”

“못 믿겠어요.”

“허! 부군을 뭐로 보고. 어디 과인이 믿게 해주지.”

“어머나!”

이진의 기습공격에 중전 허 부인이 이진의 몸무게를 못 이겨, 함께 뒤로 꽈당 쓰러지며 지르는 비명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밖에서만 춘풍(春風)이 부는 것이 아니라, 구중심처 은밀한 곳에서도 춘풍이 불기 시작했다. 봄밤의 향연이었다. 비록 술은 없지만 향기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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