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4 회: 부족한 재정을 벌충하기 위한 묘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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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은 오늘도 오경삼점이 되자 어김없이 눈을 떴다.
이 시간이 되면 다른 무엇보다도 밤새 참았던 소피가 보고 싶어 자동으로 눈이 떠지는 것이다. 인체 시계 때문인지 생리현상 때문인지 이제 체질화 되었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자 밤새 옆방에서 번을 선 지밀상궁들이 이제는 알아서 요강을 가져다주었다. 소피를 보고 조금 정신을 차리니 문 밖에서 비 방울 듣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봐라!”
이진의 조용한 명에 지밀상궁 하나가 소리 죽여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과 후두둑, 후두둑 이제 연녹의 여린 생명의 잎사귀 사이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아늑하게 들려왔다. 백색소음이라던가. 어머니의 양수에 잠겨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듣는 듯 포근함이 밀려왔다.
이에 이진은 돌아보지도 않고 명했다.
“이부자리를 그냥 두어라! 오늘은 게으름을 좀 피우고 싶다.”
이진의 명에 멈칫한 지밀상궁이 다시 금침을 제대로 펴놓고 소리죽여 밖으로 사라졌다.
누울까 하다가 이진은 반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멍하니 뜰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부인과 방사를 끝내고 나니 너무 피곤했다. 육체적 피로보다도 대신들과 연일 설전을 벌이다시피하는 신경전에서 오는 정신적 피로였다.
그래서 이진은 그냥 부인의 방에서 하룻밤을 잘까하다가, 아침에 번거로울 것 같아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강녕전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달무리가 져있었다.
‘내일은 비가 오려나?’
혼자 중얼거리며 돌아오던 길이 새삼 기억에 남았다.
전에 선생이었을 때도 그렇고 말년 작가 생활을 했을 때도 일기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왔다. 특히 비에는. 그러나 이 조선에서 와서 보니 새삼 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농업 국가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지금껏 봄이 되고서 비다운 비가 오지 않아 은근히 속을 끓이고 있는데, 모처럼 제법 비다운 비가 오니, 이진의 졸이던 마음도 한결 풀어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행태를 연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이진의 생각은 끝 간데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진 자신의 요즘 솔직한 심정은 망망대해에 홀로 외롭게 떠있는 편주와 같았다. 성리학이 골수에 베인 자들과 연일 사투를 벌이다보면 그런 생각이 문득 문득 드는 그였다.
수많은 적이 진을 치고 있는 들판을 창 한 자루 꼬나 쥐고 필마단기로 질주하는 심정. 이것이 딱 이진의 현재 느끼는 심정이기도 했다. 이진이 이렇게 외로운 생각에 빠져 수부수와 소세를 안 해도 어김없이 초조반은 들어오고 있었다.
함부로 망연한 시간을 갖지도 못하는 신세. 이진은 말없이 여느 날과 다름없이 양치와 머리를 감고 세면을 했다. 그리고 지밀상궁들에 의해 상투가 틀려지고, 의관이 정제되었다. 이어 간단하게 무리죽 한 그릇을 비우고 이진은 또 빈전에 가서 위패에 대고 곡을 하고, 왕대비 문안을 하고나니, 이제 또 조강 시간이 돌아왔음을 알았다. 제일 지겨운 시간이 이 시간이었다. 요즈음은 신하들도 솔직히 이진의 식견에 놀라고 눌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 경연 즉 조강 시간만은 저희들이 왕이었다. 처음 며칠은 대학논의를 강하다니 이제는, 저들도 이진의 실력을 알았다. 이진이야 거창하게 제갈공명을 흉내 내어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문장 전체를 조망한다고 큰 소리 쳤지만, 평생을 학문에 매달려온 신하들이 보기에는 기가 차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이진에게 며칠 만에 강요된 학문(?)이 소학이었다. 제일 처음 학문에 입문하는 입문서 즉 기초부터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래도 경연관의 등살에 소학을 떼고 나니, 이제 두 번째로 효경을 요즈음은 가르치고 있었다.
“후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이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아니면 비가 와서 자신도 모르게 심란한 마음인지 몰라도, 오늘 따라 이상하게 더 경연이 싫어졌다.
그래서 이진은 스스로 문갑에서 송익필이 써준 문장을 읽어 보았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어진 사대부를 접대하는 때가 많고 환관과 후궁을 친근 하는 때가 적으면 유익하다’고 했다. 그러나 경연 때에 무상(無狀:함부로 행동해 버릇이 없음)한 무리들이 불령한 말을 많이 하니 경연에 나갈 것이 없다. 만약 깨우치지 못한 임금이라면 여러 신하와 더불어 마땅히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과인은 경연이 아니더라도 스스로가 정령(政令)을 출납할 수가 있다. 어찌 경연에만 나가야 학식을 더 하겠는가? 학문을 모른다 할지라도 어찌 장구하게 나라를 누리지 못하겠는가?>
“경연이 정말 싫다 옛날 선왕 중에 아예 경연을 폐하라 한 왕은 없었는가?”
“있었사옵니다. 전하!”
“누구인가?”
“연산군이옵니다.”
“그가 전교한 글도 알고 있는가?”
“네, 전하!”
“적어 놔라. 필요하면 과인이 써먹어야겠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렇게 해서 송익필에게 얻어 문갑에 넣어 놓고, 오늘은 유독 경연이 싫어 이를 만지작거리는 이진이었다. 이를 만지작거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조강까지 폐하면 정말 신하들과의 골이 깊어질 것 같아 망설여지는 이진이었다.
결국 다시 이를 문갑 안에 넣은 이진은 스스로 타협을 했다. 오늘만 경연에 빠지기로. 해서 이진은 곧 측근에 대기하고 있던 대전내관에게 명했다.
“과인이 오늘은 신열이 있어 경연에 참석할 수가 없다. 하니 이를 통보하도록 하라.”
“네 전하! 하옵시면 어의를 대령하오리까?”
“너마저 내 심정을 모르느냐?”
“알겠사옵니다. 전하!”
자신도 모르게 호통을 쳤지만 나이도 많지 않은 놈이 꾸부정하게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니 저 인간도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 이진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등 뒤에 소리치는 이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하고........”
“네 전하!”
“병문안을 올 것 없다고 해라. 만나지도 않겠다 하고.”
“네, 전하!”
그가 명을 받고 떠나자 이진은 다시 창밖으로 가 멍하니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섰다.
* * *
경연 시간이 끝나자 없던 힘도 나는 이진이었다.
이진은 꾀병이었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육 승지들을 사정전으로 불러들여 오늘도 승정원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오늘은 오 승지뿐이었다. 도승지 유성룡이 떠난 자리를 한백겸이 메워야 했으나, 현재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에 있는 상태라, 시간이 제법 걸려야 자리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보고할 것이 있으면 보고 하시오.”
“이앙법을 반대하는 자들의 연명차자(箚子:여럿이 연대하여 함께 서명한 간단한 약식 상소문)가 있사옵니다. 전하!”
이제 도승지가 빠져나가 좌승지에서 승차한 도승지 이항복이 먼저 아뢰었다. 이 항복의 보고에 약식상소라는 것이 소위 자신을 간보기 위한 꾀라는 것을 간파한 이진이 노성을 질렀다. 여기서 약하게 나가면 그때는 이제 정식으로 집단상소가 올라올 것을 예견한 이진의 노성이었다.
“어느 놈들이오. 잡아다가 주리를 틀기 전에 입 닥치고 조용히 있으라고 하시오.”
“전하! 언로를 막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전하!”
이항복의 점잖은 말에 이진이 여전히 고성으로 말했다.
“사사건건 뭔 놈의 말들이 그렇게 많소. 하라면 행하면 될 것이지. 아니면 저희들이 왕을 하든지..........”
“전하.........!”
이진의 말에 깜짝 놀란 승지들이 얼굴색들이 새파랗게 변색되어 부복하였다.
“과인의 말이 좀 지나쳤지만, 툭 하면 올리는 상소에 과인도 좀 짜증이 나서 과민반응을 보인 것이니 너무 개의치 마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그만들 두고 다음 보고할 것 있으면 어서 하시오.”
“평양의 정상국이라는 자가 아버지를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하였사온 즉 평양감사 김수를 체직시키시옵고, 정상국을 나국(拿鞠:붙잡아다 추국함)하고, 강상죄에 의거 평양도호부를 격하시켜야 된다는 헌부의 발고입니다. 전하!”
여전히 도승지 이항복의 발언에 눈살을 찌푸린 이진이 말했다.
“오늘 조회 시간은 이 문제로 시끄럽겠군.”
“그렇사옵니다. 전하!”
“도승지!”
“네, 전하!”
“오늘 과인의 심기가 편치 않으니 이 문제는 내일 조회시간에 거론하자고 전교하오.”
“네, 전하!”
“다른 문제는 없소?”
“네, 전하!”
“이따 조회 시간에 봅시다.”
“네, 전하!”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이진이었다.
* * *
조회시간.
오늘도 어김없이 사정전에 정3품 이상의 당상관들이 모여들었다. 좌중을 말없이 둘러보던 이진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과인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전비에 보탬이 될 방안을 하나 제시하겠소.”
이진의 말에 오늘은 또 무슨 묘수가 나오려나 하고 눈을 반짝이는 신하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자는 눈살부터 찌푸리는 자가 있었다.
이를 다 기억 속에 담아 두면 자신만 피곤할 것 같아 애써 외면한 이진이 말을 이었다.
“과인은 생산성 없는 자염(煮鹽:가마솥에 끓여 만든 소금)보다 천일염(天日鹽)을 생산하여 이를 전비에 보태고자 하오.”
“전하, 천일염이라 하옵시면 무엇을 이르는 말입니까?”
공조판서 김명원의 물음에 이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세상에 출현하지 않은 물건이니 용어부터가 낯설 것이오. 소금을 만드는 방법 중의 하나로 문자 그대로, 바닷물을 자연 태양광과 바람으로만 증발시켜 만든 소금을 이르는 말이오.”
“그것이 그럼 자염보다 수월케 더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단 말이옵니까?”
김명원의 물음에 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소.”
간단하게 답을 하고 잠시 뜸을 들이던 이진이 부차적인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진이 TV속에서 본 염전의 모습을 상상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소. 바닷가 부근에서 논처럼 정비된 염전에 해수를 끌어들여 이를 몇 차례 옮겨 가며 이를 자연 건조시켜 얻는 방법인데, 가마솥에 끓이는 방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양을 얻을 수 있소.”
“여기서 관건은 일기가 순조로워야 되고, 또 논처럼 만든 염전의 바닥에 바닷물이 스며들지 않게 황토 등으로 치밀하게 다져야 하는 것이오. 도자기 파편 등을 바닥에 깔 수도 있으나, 이것이 고르지 않으면 위험할 수가 있으니 황토로 다지는 것이 첩경인 것 같소.”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면 천상 뜨거운 여름, 장마철을 피해야만 생산이 가능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회의적입니다. 전하!”
김명원의 말에 이진이 답했다.
“정확히 요체는 파악했소만,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한 번 시험을 해본 후에 그 결과를 가지고 다시 논하는 것으로 합시다. 하지만 분명코 과인이 장담하건데 자염보다는 확실히 생산량이 많을 것이오. 과인은 이를 전매사업으로 해, 전비 마련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싶소.”
“전하의 뜻대로 되었으면 좋겠사옵니다. 전하!”
이 안은 사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니 쉽게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말이 나오는 제 신하들이었다.
내심 웃음이 나왔지만 그들의 속성을 이해한 이진이 가벼운 미소로 이를 흘리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지난번에 나왔던 대동법 문제는 여기서 또 왈가왈부 해봐야 시간만 소모할 테니, 일단 혁폐도감에 넘겨 일정한 안이 도출되거든 그때 다시 상의하는 것으로 합시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당장 거론 않는다는데 만족한 제 대신들이 감사의 예를 표하자 이를 웃음으로 넘긴 이진이 다음 안건을 상정하려 할 때였다. 대전내관이 도승지 이항복의 귀에 뭐라 소곤거리고 이항복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다..
이항복이 급히 부복하여 아뢰었다.
“북병사 원균의 장계이옵나이다. 전하!”
“읽어 보았소?”
“아직........!”
“다 같이 듣게 큰 소리로 한 번 읽어보오.”
“네, 전하!”
지난번에 북병사와 남병사의 자리가 비었기에 의논하여 상주하라 했더니, 북병사 자리에 천거한 인물이 원균이었다. 이 신하들이야 말로 원균이 임란 때 바다에서 활약(?)한 바를 모르고, 지금까지 그가 북방에서 떨쳐온 명성만 믿고 천거한 것을 이진은 알았다.
그러나 이진은 북방에서는 그가 어떻게 활약할지 모르고, 또 모처럼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윤허한 바가 있었다. 그런 원균에게서 온 장계이고 보면 분명 길조는 아닌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이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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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