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 회: 왕으로서의 고단한 하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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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국가인 조선은 이래저래 왕 노릇 해먹기도 골치가 아팠다. 국상 기간이라고 고기를 제외한 나물류 중심의 소선(素膳)으로 12첩 반상이 꾸며져 있었다. 각 상궁들의 시중을 받으며 복잡한 예절에 따라 식사를 마친 이진은 잠시 휴식을 가졌다.
그렇게 이각 정도 쉬었을까 김 상선이 와서 고했다.
“편전에 승지들이 보고를 하기 위해 주상전하를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이것들은 사람을 쉬지를 못하게 하는구나!’
이진의 내심이었지만 이를 그대로 토로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간단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알았다!”
이진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제조상궁과 시녀상궁 하나 그리고 상선이 곧 움직일 채비를 갖췄다. 어쩔 수 없이 의관을 정제하고 이진은 강녕전에서 다시 편전으로 나갔다. 그가 편전에 들어서자 승지들이 일제히 허리 굽혀 문안인사를 했다.
“강녕하셨사옵니까? 주상 전하!”
“다들 자리에 앉으시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모두 이진 앞에 자리를 잡자 이진이 차례로 승지들을 둘러보았다. 승지의 우두머리인 도승지 유성룡은 경연 시간에 본 바가 있고, 다음 차례로 좌승지 정언지, 우승지 이항복 또한 본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좌부승지 홍인서, 우부승지 이덕형, 동부승지 황섬이 차례로 보였다.
이 승지들이야말로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장 및 비서관인 셈으로 모두 당상관 이상이었으며, 보좌를 위해 부수적으로 이, 호, 예, 병, 형, 공조의 일을 분장하고 있었다.
“진언할 일이 있으면 하시오.”
이진이 가볍지 않은 언사로 명하자 얼굴이 익은 도승지 유성룡이 대표로 보고를 하였다.
“선대왕이 승하하시기 전날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진헌 방물의 표피 한 장이 없어져 제용감 정안한의 파직을 청하고 있사옵고, 사간원의 주청에 의하면 기생을 데리고 산 황해 도사 김익현과, 몸단속을 못한 해주 목사 이응기의 파직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이를 어찌 처리할 런지요.”
“명국에 진상할 방물에 손을 대다니 괘씸하도다.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모름지기 관리는 청빈을 으뜸으로 삼아야하거늘, 본을 보이기 위해서도 제용감 정안한은 파직을 명하는 게 좋겠소. 또 수신제가를 못한 두 사람 역시 파직을 하는 게 좋겠소.”
“알겠사옵니다. 주상 전하!”
“다음 안건이 또 있소?”
이진의 하문에 우승지 이항복이 아뢰었다.
“아무래도 오늘 조회에서는 선대왕의 갑작스러운 승하와 이를 막지 못한 어의들의 문책에 대한 공론이 오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리 이 문제에 대해 숙고해두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알겠소.”
고맙다는 뜻으로 가벼운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곧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오늘 처음으로 상견례를 하오만, 과인이 국정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경들만큼 중대차한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들이 없소. 해서 이르는 말이니 과인과 경들 사이에는 숨김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고, 논의치 못할 사안이 없다할 것이오. 하니 앞으로는 어떠한 사안이라도 흉금을 터놓고 서로 논하고, 이를 바탕으로 좋은 결말을 짓도록 합시다.”
“네, 전하!”
육 승지가 모두 부복하여 뜻을 받들자 이진은 흔쾌한 얼굴이 되어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이진이 휴식을 취하고 나니, 어느덧 사시 정(巳時 正: 오전 10시)이 되어 근정전에서 이진의 즉위 처음으로 조참(朝參)이 열리게 되었다.
조회에는 지금 말한 조참과 상참(常參)이라는 것이 있는데, 조참은 매 아일(衙日:조회 날) 열리는 것으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 5일에 한 번씩, 전 문무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대 조회를 말하는 것이고, 조참이라는 것은 매일 열리되, 당상관 이상의 고위관료들만 참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은 대조회가 열리는 날이므로 이진은 법가(法駕:공식 가마)를 타고 가야하나 번거로운 일인지라, 이를 배제하고 단순히 금위(禁衛: 경호원)들만 데리고 근정전으로 향하였다.
옛날의 많은 임금들이 운동부족으로 죽은 생각도 떠올라서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진이 법가를 타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어좌에 정좌하니 임석한 문무 대소 신료들이 일제히 부복하여 경하했다.
“성왕의 등극을 감축 드리옵니다! 주상 전하!”
‘이쯤 되면 아부가 지나쳐 ‘폭군이나 되지 말라’는 비아냥으로 들리는데.’
자신의 나이 어려 수렴첨정을 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 때문에 꼬인 심사를 이렇게 풀어보는 이진이었다.
잠시 후.“왕대비마마, 입시옵니다!”
대전 내관의 외침과 함께 소복 차림의 대비 박 씨가 주렴이 쳐진 어좌 뒤에 정좌했다.
자리를 잡자마자 대비 박 씨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작하시오!”
“대사간 이성중이 주상 즉위 첫 조회에 가름하여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이렇게 입을 뗀 그의 발언이 시작되었다.
“대개의 왕은 구중궁궐 심처에 앉아 팔짱만 높이 끼고 있어서, 여러 가지 작은 일을 알지 못하므로, 반드시 누군가를 인견(引見)하고 물어보아서 득실을 알게 된 뒤에야, 민정(民政)이 막히지 않고 정사에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잠시 목청을 가다듬은 이성중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해서 우리 조정에서 한 달에 6번씩 조회하는 법은 한갓 신하들의 조알만 받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정사를 들어 결정하려는 것입니다. 하오니 전하께옵서는 매 아일(衙日)마다 예로써 대신을 접하시고, 치도를 강론하심은 참으로 정사하는 요긴한 일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하니 매 아일 조회를 거르는 일이 없도록 하시옵소서!”
새로운 왕 즉위 첫 조회라고, 조회의 중요성을 대사간 이성중이 간하고 자라에 앉자, 이진은 묵묵히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음 발언 하실 분, 계시면 하세요.”
대비 박 씨의 분부가 떨어지자 좌의정 정유길이 발언에 나섰다.
“신 좌의정 정유길 아뢰옵나이다.”
“.........”
대비와 이진 모두 아무 말이 없자 정유길이 창백한 안색으로 고했다.
“선대왕께옵서는 승하하신 날 전날까지도 옥체 만강 하셨사온데 갑자기 흉서를 당한 일에 의혹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겠사옵고, 백번 양보한다하여도 급서를 막지 못한 어의들에 대해서만은 처벌이 가한 줄 아뢰옵나이다.”
이진이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려고 아무 말이 없자, 대비 박 씨가 입을 열어 답변을 했다.
“선대왕의 천붕이야 여기 있는 모두와 같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이지만, 어의들이 흉서를 겪은 당일의 보고로는 곽란에 의한 심통이라는 것인즉, 더 이상 이에 대해 논해, 피로를 가중시키지 말라. 하고 어의들에 대한 처벌은 전고의 예가 있을 것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라.”
“통촉하시옵소서! 대비마마!”
좌상 정유길이 자신의 의견이 반만 받아들여지자 거듭 재론하길 바라나, 대비 박 씨가 아무 말이 없자, 정유길이 계속해서 발언을 했다.
“전고에 따르면 주상의 붕어를 막지 못한 자들은 모두 유배를 보냈습니다. 전례에 따르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
대비 박 씨가 역시 말이 없는 가운데 이번에는 이진이 발언을 했다.
“그 날 임한 어의가 모두 다섯 명이오. 과인이 보건데 하나 같이 명의들인데, 모두 유배를 보낸다면 만약 조정에 급한 환우가 생긴다면 누가 과연 이들을 치료한단 말이오.”
“그렇다 해도 전고의 예에 따르는 것이 옳사옵니다.”
좌상 정유길의 발언이었다.
이진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과인이 볼 때 좌상 영감부터 내의들의 진맥을 받아야 하시겠소. 어째 병색이 완연해보입니다 그려. 상선은 지금 듣고 있느냐?”
“네, 주상 전하!”
옆에 시립하고 있던 김 상선이 얼른 허리를 굽혀 복명했다.
“어의 허준을 들라해 좌상대감이 퇴청하는 즉시 보살피도록 하고, 나머지 어의들은 가까운 교동도(현 강화도)로 전원 유배를 보내도록 하라. 어떻사옵니까? 대비마마!”
“주상의 뜻대로 하세요.”
대비의 윤허가 떨어지자 모든 것이 그대로 결정이 되었다. 이 외에도 자잘한 사안들로 조회는 근 반 시진을 끌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곧 조회가 파할 시간이 되자 이진이 입을 열어 말했다.
“아직 과인의 보령 유치하여 국정을 돌봄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제 경들은 특별히 치안과 국방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북방의 야인들의 준동은 없는지? 왜구나 왜국의 침탈은 없을 것인지? 사전 경계와 준비를 철저히 하여,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백성들이 수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미리 힘 써야 할 것이오.”
이진의 말에 대비 박 씨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 가운데 제 신하들이 엎드려 명을 받들었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말로만?’
내심 임란이 걱정이 된 이진으로서는 립 서비스만 하는 늙고 젊은 신하들이 얄미워 비틀린 심사가 되었다.
* * *
곧 정오가 되자 중식을 먹은 이진이 잠시 쉬고 있는데, 상선내관이 와서 아뢰었다.
“여러 대신들이 주강(晝講)을 하고자 청하옵니다.”
짜증이 와락 치민 이진이 소리를 질렀다.
“밀린 업무가 많아 불가하다고 모두 돌려보내라!”
“네, 주상전하!”
나이 어리다고 만만히 보는 것인지, 처음부터 길을 잘 들이자는 것인지, 이제 조강, 주강, 석강까지 시답잖은 강의만 듣다가 하루해가 뜨고 질 판이었다.
이에 화를 내어 그들을 물린 이진은 자신이 뱉은 말이 있어 육 승지를 편전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계획 일부를 실현하기로 했다. 이진이 보류 위에 앉아 육 승지를 바라보니, 모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오늘 아침부터 주상의 하는 말과 행동을 보니 소문과 달리 기대 이상이라, 이들도 좋은 감정을 품고 이진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그들을 일별한 이진이 은근한 미소를 띠고 도승지 유성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순신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네?”
너무 갑작스런 물음에 깜짝 놀란 유성룡이 황망이 부복하여 물었다.
“주상 전하께옵서 어찌 이순신을 아시옵니까?”
그의 물음에는 가타부타 말없이 여전히 은은한 미소로 그를 주시하고 있다가 이진이 다시 물었다.
“그를 전라좌수사로 봉하려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하오?”
“신이야 그의 인품과 실력을 믿지만, 관작의 남용이 심하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우실 것 같
사옵니다. 그는 금년 1월 여진족을 정벌한 공을 인정받아 백의종군에서 벗어나 현재 아산에 낙향해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는 너무 파격적인 승진이라 대신들과 삼사가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높사옵니다. 전하!”
“흐흠........! 전에 그가 만호(萬戶)를 지낸 경력이 있는가?”
“정확히 8년 전 7월에 발포(鉢浦: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를 지낸 적이 있사옵니다. 전하!”
“그래요? 잘 됐군. 그럼 내 방법이 있으니 일단 어전으로 등대하라 이르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비록 유성룡이 이순신보다는 세 살 위지만 어릴 때 한 동네에 산 인연으로 친구같이 느끼는 유성룡으로서는, 친구가 다시 관직을 얻을 듯하자, 누구보다 기뻐하며 진심으로 이진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를 보고 빙긋이 웃던 이진의 시선이 이제는 이항복에게 향하여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의 장인은 안녕하신가?”
“황공하옵니다. 주상 전하!”
“황공할 것까지야? 지금 예조정랑으로 재임 중이지?”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항복은 주상의 묻는 의도가 궁금하여 계속 편치 않은 얼굴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기별을 하여 내일 퇴청을 하면 바로 과인을 보러 오라고 이르시오.”
“알겠사옵니다. 주상 전하!”
왜 장인을 부르는지 궁금했지만 감히 묻지 못하고 얼굴을 묻는 이항복의 삼사는 편치 않아보였다. 참고로 그의 장인은 권율이었다.
이진이 다음으로 시선이 향한 사람은 좌승지 정언지였다.
“동생 정언신이 지금 우찬성으로 재직 중이지요?”
“그렇사옵니다. 주상 전하!”
“과인이 믿고 있으니 중히 쓰일 날이 있으리라고 전해주시오.”
“망극하옵니다. 주상 전하!”
미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이는 이진이었다.
지금 이진의 머리에는 신립, 이순신, 김시민, 이억기 등의 명장들을 거느리고 니탕개의 난을 소탕하던 정언신의 침착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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