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18화 (18/210)

< -- 18 회: 왕으로서의 고단한 하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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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이연이 승하한지 다섯째 날.

이진의 명대로 즉위식이 창경궁 인정전에서 거행되게 되었다.

성복을 마친 이진은 관면(冠冕)으로 면류관에 길복(吉服)인 화려한 곤룡포를 입고, 규(圭:홀)를 쥐고, 여차(廬次:상주가 머무는 장소)로부터 곡을 하면서 걸어 나갔다. 내시 2명이 좌우에서 시종하는 가운데, 선정전 동쪽 뜰에 나가 빈소에 네 번 절하는 예를 거행했다.

이어 이진은 섬돌에 올라가 선정전 안의 향안(香案) 앞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고 내려와, 이전 자리로 돌아와 또 절하고 동쪽 행랑의 막차(幕次: 상주가 머무는 곳)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이진은 선정문에서 걸어 나와, 연영문을 따라 가서 숙장문을 나와 인정전에 이르니, 승지와 사관이 따라 나갔다.

이진은 서쪽을 향해 어좌 앞에 서서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소리 내어 슬피 울었다. 승지와 예조판서가 잇따라 어좌에 오를 것을 권했다. 그래도 이진이 어좌에 오르지 앉자 삼정승과 도승지가 더불어 나가 이진을 부축하면서 번갈아 가며 극진히 권했다.

이진이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우니, 이날 뜰에 있던 백관과 군병치고 소리 내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얼마나 슬피 우는지 이튿날은 모두 목이 쉴 정도였다. 그래도 이진이 어좌에 오르지 않자, 영의정 노수신이 종종 걸음으로 나와 또 두세 번 간곡히 어좌에 오를 것을 청했다.

비로소 남쪽을 향해 바라보고 선 이진이 말했다.

“이 자리에 까지 왔으면 오른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이진의 이 말에 다시 흐느낌 소리 진동하며, 좌우가 차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영의정 노수신이 굳이 의식대로 할 것을 간곡히 청하자 이진은 비로소 어좌에 올라 만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만 백관들이 어좌에 오른 이진에게 네 번 절을 하고, 만세(천세)를 불렀다.

곧 이진이 모든 의식을 마치고 여차로 돌아오는데, 밖에서는 아직도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비로소 중전 박 씨는 왕대비가 되었고, 부인 허 씨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이어 즉위교서가 발표되었고, 전국에는 대대적인 사면령이 내려졌다.

* * *

심신이 피곤한 가운데 이진은 즉위 둘째 날을 맞았다. 국장을 맞았다고 왕의 취침과 기상시간이 변하지는 않았다.

종루에 물시계와 함께 큰 종과 쇠북을 걸어놓고 밤 10시경에 종을 스물여덟 번 쳐서 인정(人定)을 알리면 도성의 8문이 닫히고, 통행금지가 시작되었다. 또한 이때부터가 왕의 취침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새벽 4시경인 오경 삼 점(五更 三 點)에 종을 서른세 번 쳐서 파루(罷漏)를 알리면 도성 8문이 열림과 동시에 통행금지가 해제됐다. 또한 이 시간이 왕의 기상시간이기도 했다. 선조 이연의 빈전이 만추전에 설치되어졌으므로, 이진은 왕의 침소인 강녕전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진이 파루 소리에 기침을 하자 바로 옆방에 기거하고 있던 지밀상궁 세 명이 동시에 들어와 이부자리를 정돈했다. 이때 시녀상궁 중의 하나로 왕의 수부수와 소세를 책임진 차비(差備:담당자)가 들어와 고했다.

“수부수와 소세 듭실 준비가 되었사옵니다. 전하!”

“알았다.”

이진은 말없이 시녀상궁을 따라가 버드나무 가지를 이쑤시개처럼 깎아 만든 양치목으로 이를 쑤시고 소금물로 헹궈내었다.

그리고 곧 소세 즉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기웠다. 그러고 나니 요의와 함께 용변이 보고 싶어졌다. 궐내는 화장실이 없으므로 용변이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진이 말했다.

“용변이 보고 싶다.”

“네?”

“똥이 마렵다는 말이다.”

왕의 거친 인사에 놀란 차비 중의 하나가 신속히 어디론가 가더니 매화틀이라는 것을 들고 왔다.

‘젠장........!’

휘장이 쳐진 곳으로 들어가 쪼그려 앉아 대변을 보는데 이게 영 익숙지가 않아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임해군 시절에는 사가에 푸세식 일망정 변소가 있어 좋았는데, 영 찝찝한 게 대변이 잘 보아지지 않았다.

힘을 주니 다만 용수(龍水:임금의 소변)만이 찔끔거릴 뿐이었다. 한참을 끙끙거리고 나서야 이진이 간신히 한 덩이 빠추고 나니 어떻게 용케 알았는지 면포를 든 차비 하나가 얼른 다가와 말했다.

“엎드리싶시옵소서!”

‘허! 이제 밑까지 닦아주는구나!’

그녀의 저의를 알아들은 이진의 얼굴이 붉어지고 또한 같이 얼굴을 붉히며 서있는 나이 든 시녀상궁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뒤처리를 안 할 수도 없어서 이진이 말했다.

“이 정도는 과인이 해도 된다.”

“아니옵니다. 주상전하! 전하께서 거부하옵시면 제가 치도곤을 당하옵니다.”

“그것 참.........!”

어쩔 수 없이 시녀상궁에게 똥구멍까지 내맡기고 있는 이진으로서는 기가 차지도 않았다.

이진이 어렵게 용변을 보고 나니 이번에는 의복을 책임진 차비가 다가와 의복을 입히기 시작했다. 상중이므로 백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이진이 말했다.

“대비마마께 문안을 드릴 테니 차비하라. 하고 중전도 문안준비가 되었으면 이쪽으로 오도록 하고.”

“네, 주상전하!”

시녀상궁 하나가 달려가는 것을 보고, 허리를 굽히고 서있는 내시를 바라보며 이진이 말했다.

“오늘 경연이 있는가?”

“네, 전하! 사경(四更)에 편전에서 거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곡도 해야 하고 하니 조금 늦는 것으로 전하도록 해라.”

“네, 전하!”

잠시 후 이진이 지체를 하고 있는데 함께 문안 인사를 여쭐 중전 허 씨가 웬일인지 나타나지를 않았다. 걱정이 되기도 하고, 지루함에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인데, 궁녀들을 거느린 허 씨가 마침내 나타났다.

그녀의 안색부터 살피니 안색이 매우 파리했다.

“어디가 편찮소?”

“아니옵니다. 주상 전하!”

“내가 아니 과인이 볼 때는 흉서를 당해 그간 잠 한 번 제대로 못자고, 즉위식이다 뭐다 해서 피곤해서 그런 것 같소. 하니 내 어의를 보내줄 터이니 진맥을 받아보고 문안과 곡이 끝나면 푹 쉬는 것으로 하오.”

“감음하옵니다. 전하!”

“됐소. 어서 갑시다.”

이진은 곧 왕대비 박 씨가 이주해 기거하고 있는 창경궁 통명전으로 향하였다.

곧 전각 안으로 든 이진이 문후 인사를 여쭈었다.

“밤새 편안하셨습니까? 왕대비마마!”

이진은 왕위에 올려준 보답으로 대비 박 씨에게 극경의 예를 올렸다.

“주상도 밤새 편안하셨습니까?”

“네, 어마마마!”

“호호호........! 역시 주상은 이 어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소. 대비보다는 ‘어마마마’라 불러주는 것이 이 어미는 더욱 좋소.”

“앞으로는 죽 그렇게 불러드리도록 하겠사옵니다. 어마마마!”

“아니오. 책잡히기 전에 법도대로 대비로 부르다가, 간혹 주상으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으면 족하겠소.”

“알겠사옵니다. 어마마마!”

이로부터 잠시 더 대화를 나눈 이진은 곧 문안 인사를 마치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문안인사를 정성(定省)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밤에는 부모의 이부자리를 정해드리고(昏定) 새벽에는 안부를 살핀다(晨省)’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줄임말이었다.

아무튼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중전 허 씨가 이진에게 물었다.

“옥란은 제가 데리고 있사오나, 금란은 어찌 하오리까?”

“우선 종9품 주우(奏羽)로 임명할 테니 중전이 데리고 있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중전 허 씨의 말에 생각나는 것이 있어 이진은 곧 송익필과 김체건 등에게 벼슬을 주어 궁 안으로 들일 궁리를 했다.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온 이진은 곧 빈전이 차려진 만추전으로 가서 잠시 곡을 하고 다시 강녕전으로 돌아왔다. 강녕전으로 돌아오니 이미 초조반(初早飯)이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타락죽과 무리죽이었다.

무리죽이라는 것은 흰무리나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 찐 떡을 말려, 가루로 하여 끓인 죽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타락죽을 보니 이진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곧 자신이 선조 이연을 시해할 때 이 타락죽에 복어 독을 탄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의 시행은 개똥이가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를 보니 먹을 마음이 뚝 떨어진 이진이 양수거지(兩手据地) 하고 있는 세 명의 상궁 중 기미 상궁에게 말했다.

“내 알기로 다섯 주발의 타락죽을 얻기 위해서는 열여덟 마리의 송아지가 젖을 굶는다 했다. 이는 절대 어진 정치가 아니니 당분간 과인의 명이 있을 때까지는, 타락죽은 금하도록 해라!”

“네, 전하!”

기쁜 빛으로 대답하는 궁녀들이었다. 세상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진이 자신의 한 행위가 있어서 타락죽을 거절한 일이, 졸지에 어진 정사를 펴는 임금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튼 잠시 무리죽을 바라 본 이진이 기미상궁에게 물었다.

“기미(氣味)는 했느냐?”

“네, 주상전하!”

“알았다.”

이진의 말이 끝나자 수라상궁이 곧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무리죽 한 그릇을 비운 이진이 시간을 알아보니 어느덧 사경이 되어 있었다. 대충 차비를 마친 이진은 곧 편전 즉 사정전으로 나아갔다.

안에는 이미 경연에 참가한 여러 대신들이 앉아 있다가, 이진의 입전 소식을 듣고 일제히 일어났다. 마침내 이진이 들어오자 이구동성으로 허리 숙여 고했다.

“밤새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영사(領事) 이하 모두 편안하셨습니까?”

“망극하옵니다. 전하!”

“모두 자리에 앉으십시다.”

“네, 전하!”

이진이 보료 위에 앉는 것을 시작으로 일제히 마루바닥에 자리를 잡는 경연에 참가한 대신들이었다.

동편에는 영사 우의정 유언이 서쪽을 바라보고 앉았고, 서쪽에는 경연관 지사 이조판서 이산해가 앉았다. 나머지 참찬관인 도승지 유성룡과 우승지 이항복 이하는 남쪽에 앉아, 북쪽의 이진을 감히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시독관 곧 시독해 주시오.”

“네, 우상 대감!”

유전의 말에 시강관인 홍문관 교리가 ‘대학연의’의 한 대목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시독관의 낭송이 끝나자 도승지 겸 직제학으로 오늘의 시강관인 유성룡이 시독관이 낭송한 대목을 설하기 시작했다. 이를 조용히 듣고 있던 이진이 조용히 손을 들어 제지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곧 우문사급(宇文士及)이 (당나라의) 태종을 모시고 곁에서 탄복해 칭찬했다는 대목이었다.

“예로부터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가 왕에게 아양을 떠는 형상이 이와 같았지만, 그 신명(身命)을 끝까지 보전한 자가 없었다.”

이진의 말에 좌중의 인물 모두가 해연히 놀란 얼굴로 이진을 바라보았다. 성정이 난폭하고 학문을 게을리 한다는 소문과 다르게 뭔가 지식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 도승지 유성룡이 곧 부복해 아뢰었다.

“서책을 통해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는 것은 비록 신과 같은 홍몽(昏蒙)한 자도 알 수 있사오니, 임금이 먼저 마음을 바로 잡아, 근원이 맑고 깨끗해야 진실과 허위에 대하여 어둡지 않을 것이옵니다. 한갓 문자로서 신하의 간사하고 아첨함을 살피는 일은 혼몽한 자들도 알 수 있는 일이옵니다.”

“알겠소!”

이진의 대답에 모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잠시 더 강(講)이 이루어지다가 결국 오늘의 강이 끝났다. 그리고 그 이후였다. 갑자기 정색을 한 오늘의 영사로 참석한 우의정 유언이 말했다.

“충청 감사 이헌구의 보고로는 대흥에 장미꽃이 피었다고 하고, 김포군수의 보고로는 검은 안개가 끼었다고 합니다. 또 전라 감사는 광주의 못물이 적색으로 변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는 군왕께서 덕을 갈고 닦으라는 경고이니 재앙을 입기 전에 몸소 행하소서!”

한 마디로 경연이라는 것은 신하들이 왕권을 제약하기 위해 만든 제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학문을 토론하고 정사도 논하는 순기능도 있으나, 주 기능은 왕을 견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할 것이다.

개다가 왕 즉위 후 첫 경연부터 언제 일어난 일인지도 모를 흉사를 가지고, 왕의 부덕을 책하며 자신들의 수중으로 이진을 넣으려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꿰뚫어본 이진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부왕을 잃은 죄인으로서 해괴제인들 못 올리오리까마는, 내 경들에게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부언하고 싶소. 즉 이 시절에 장미꽃이 피었다는 것은 그만큼 날씨가 따뜻해 온도가 맞아 개화했다는 것이고, 김포에 검은 안개가 끼었다는 것은 불순한 공기가 물의 미립자 즉 안개에 달라붙었다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소. 또한 못물이 붉다는 것은 못에 기생하는 식물들이 따뜻한 날씨로 인해 변조된 것이 아닌가 하오. 과인의 말을 경들은 일일이 트집 잡으려 할 것이나, 좀 더 과학적 지식을 갖춘 후에 나중에 과인과 토론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이에 대해 언급을 자제했으면 좋겠소.”

“하오나, 전하.........!”

“됐소!”

우의정 유전이 토를 달려하자, 이진은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아직 보령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이진이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예 꺼내지도 못한 다른 안건에 대해 미련을 두는 경연참석자들이었다. 어찌됐든 학문을 한다고 반 시진이상 시달리고 나니 한창 먹을 나인인 이진은 곧 배가 고파왔다.

이에 이진은 곧 수라상을 들이도록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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