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 회: To be or not to b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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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망한 가운데에서도 이진이 주변을 새삼 둘러보니, 이연의 침소에는 이미 포장이 쳐져 있었고, 뒤에는 도끼가 그려진 붉은 비단 바탕의 병풍이 놓여 있었다. 신성군과 정원군은 흐느끼며 슬픔에 겨워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이진은 자신이 죽던 날이 떠올랐다. 후회 없이 살았다고 생각했으나 처자식들을 이승에 남겨두고 떠나야한다고 생각하니, 공연히 자신도 모르게 주르르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 당시의 심정으로 돌아간 이진이 큰 소리로 이연을 부르며 그의 곁에 무너졌다.
“아바마마!”
“쉿! 명이 경각이옵니다. 조용히 해주세요. 군 마마!”
어의 정예남이 인정머리 없는 눈을 번뜩이며 이진을 책망했다.
이진 역시 즉시 울음을 그치고 이연의 가래 끓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렇게 위태위태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채 일각이 되지 않아, 광해가 도착을 하고 이어 삼정승도 차례로 선조 이연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던 어느 눈간 선조 이연의 고개가 뚝 떨어졌다.
“아바마마!”
“주상전하!
여기저기서 통곡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에서도 태의 양예수는 침착하게 한 번 더 솜을 이연의 코에 갖다 대고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붕어하셨습니다.”
양예수의 참담한 말에 나머지 어의는 물론 침전에 부복해 있던 자들의 곡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아바마마! 흑흑흑........!”
“전하.......! 흑흑흑........!”
이날이 음력으로 팔월 초하루였다. 유월이 윤달이 든 관계로 예년보다는 절기가 늦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곧 소식을 들은 왕비 박 씨는 물론 인빈 김 씨 등 여러 비빈이 몰려들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오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곧 모두 머리를 풀어 헤친 가운데 곧 일종의 초혼의식이 행해졌다.
지금까지 선조 이연을 측근에서 모셨던 김 상선이 평소 왕이 근무하던 사정전 지붕위로 올라가, 왕이 입던 윗저고리를 들고 북쪽을 향해 복(復)이라고 3번 외치는 행위를 했다. 이렇게 모두가 슬픔 속에 빠진 가운데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이진에게 있어서 일수유가 마치 일 년이 흐르듯 초조와 불안에 휩싸여 있는 그 이튿날 조정은 다시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자도 책봉하지 않은 채 졸지에 왕이 승하하자 삼정승은 의정부에서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영의정 노수신, 좌의정 정유길, 우의정 유전이 곧 그들이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삼정승 가운데에서도 으뜸인 영의정 노수신이었다.
“세자도 없이 졸지에 천붕을 당하여 앞일이 막막하나, 신하된 도리로서 다음 대 보위에 대해 논의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소. 해서 말 이오만 나는 관례대로 왕실의 가장 윗어르신이신 중전마마의 뜻을 따르는 게 도리일 것 같습니다.”
영의정 노수신의 말에 좌상 정유길이 고개를 흔들며 발언에 나섰다.
“평소 주상의 의중은 신성군 마마에게 있었던 것으로 아 오 만?”
그러자 우상 유전도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아무런 유명이 없는 지금 적장자의 원칙에 따라 임해군 마마가 법통을 승계하는 것이 옳으나, 평소 너무 난폭하고 군왕의 자질이 없다는 평가이니, 차라리 광해군 마마를 보위에 올리는 것이 저는 합당하다고 봅니다.”
“지금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게요? 어찌 우리가 다음 대 보위를 함부로 결정할 수 있단 말이오. 이는 관례에 따라 곧 대비마마가 되실 중전의 교지에 따르는 게 맞소. 하고 내 두 분께 충고하건데 함부로 다음 대 보위를 입에 담지 마시오. 그러다가 다음 대 보위가 공들의 의중을 벗어나 대통을 잇게 된다면 분명 후환이 있을 터인즉,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그대들의 신상이나 가문을 위해서라도 좋을 것이오.”
영의정 노수신의 말이 지당한데다 그가 가문까지 들먹이고 나오니 오싹 한기가 든 두 사람의 입은 곧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곧, 슬픔에 넋을 잃고 있는 중전 박 씨를 찾아가, 보위는 한 시라도 비워둘 수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교지를 내려주십사 하는 청을 하게 되었다.
망연히 슬픔에 빠져 있던 중전 박 씨가 곧 교태전으로 돌아가 정신을 수습하고 언문교지를 작성했다. 그 시간이 또 하루였다. 이쯤 되자 상대점(上大漸)이라 해서 왕의 죽음이 공고되었고, 죽은 시각과 장소도 공표되었다.
곧 정식 장례 절차에 착수하는 한편 장례를 담당할 예조를 중심으로 모든 현안이 급박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이나 재상가 할 것 없이 모든 이목은 교태전에 쏠려 있었다. 과연 누가 다음 대 보위에 오를 것인가?
이 순간 이진은 부왕의 곁을 지키는 것이 전부이나 송익필은 만일에 대비해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었다. 만약 이진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정변이라도 일으킬 계획이었다.
아무튼 초미의 관심 속에 마침내 중전 박 씨의 언문 교지가 내려졌다.
[ 임해군 이진 ]
딱 다섯 자였다. 어떤 첨삭도 없었다.
통상 왕 위에 오를 자의 덕행과 효심, 자질을 칭찬도 하련만 아무런 언급 없이 딱 다섯 자만 의정부로 내려졌다. 하지만 더 이상 왕위를 가지고 가타부타 의견을 개진하는 자는 없었다. 그렇잖아도 성정이 난폭하다고 알려진 자인데, 그 후과가 두려워 모두 입을 다문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통상 강골들은 이때에 자신이 생각지 않은 사람이 왕으로 내정되었으면 왕비에게 다시 청원을 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그런 청은 아무도 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들의 체면 때문인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주상의 연치 유치하니 대비가 되실 중전께옵서 수렴청정을 해야 된다’고 권했다.
그러자 중전 박 씨는 아녀자가 국정에 관여하는 일이 전고에 드문 일이고, 다음 대 군왕 이진이 영민하고 덕행과 효행이 충실하므로 그럴 필요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대신들도 끈질겼다. 얼마 전 명종대왕 시절 문정왕후가 그랬고 등등 운운하며 강력 수렴첨정을 권했다.
이에 마지못해 왕비 박 씨가 승낙하자 왕위 계승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곧 장례절차와 함께 왕위 즉위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대신을 보내 정식으로 국왕의 죽음을 사직과 종묘에 고하고, 예조에서는 논의를 거쳐 세 개의 관청을 설치하였다.
곧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이 그것들이었다. 또 이 3개의 도감을 총지휘하는 총호사로 통상적인 관례에 따라 좌의정이 임명되었다 한편으로는 왕위 계승 절차도 착수하여 예조에서는 이진에게는 왕위를 계승하는 절차 즉 사위절목(嗣位節目)에 대한 보고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이진은 이런 요지로 사양하였다.
“부왕이 승하하신 망극한 중에 이런 말을 듣게 되니 오장이 타는 듯하다. 스스로 안정할 수 없으므로 이 절목은 다시 내려 보낸다.”
이와는 상관없이 장례절차는 절차대로 진행되었으니, 선조 이연의 국장의 절차는 국장도감 설치, 빈전 마련, 성복(상주들이 상복을 입음), 발인, 하관(관을 구덩이에 내림), 반우(신주를 궁궐로 가져옴), 국장도감 해산의 순서로 진행될 것이다.
빈전도감은 시신호위, 찬궁(관을 설치하는 것), 제사 등을 맡고, 국장도감은 집기류, 악기류, 지석, 제기, 대여(관을 싣는 큰 가마)를 맡고, 가장 고된 일은 능을 조성하는 산릉도감이었다.
광중(무덤)을 파고 정자각, 비각, 수복방, 재실 등을 만들어야 했다. 오늘날 서울특별시장격인 한성판윤은 교도돈체사로 임명되어, 장지까지 가는 길을 정비하고 다리를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
고려시대 왕이 죽으면 1개월, 길어도 2개월이 넘지 않는 경우가 통상적인데 비해 조선왕은 5개월 정도의 장례절차를 치르는데,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일은 시신을 잘 보존을 하는 일 이었다. 이를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인데 빙반(氷盤)이라 하여, 길이 10자(3m) 넓이 5자4촌(1,6m) 높이 3자(90㎝)의 빙반으로, 냉동 영안실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이 빙반을 제일 아래에 두고 그 위에 시신이 누워있는 잔상(평상), 잔방을 두고 얼음을 쌓아 올린다. 또한 습기를 흡수하기 위해 마른 미역을 사방에 쌓아놓고 계속해서 갈아대곤 하였는데 이것을 ‘국장미역’이라 했다.
냉장고도 없던 조선시대이지만 얼음저장고인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다. 동빙고는 왕실제사전용 얼음 창고이며, 서빙고는 왕실의 주방에서 사용되는 음식이나 여름철에 문무 관료들에게 내리는 얼음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이 얼음은 겨울에 한강에서 채빙하는데, 한 정(丁)이 최대 6자(1,8m) 두께 12㎝이상 얼음을 떠서 동, 서빙고에 보관하였다가 사용하였다. 국상을 한번 치르는데 들어가는 얼음이 15만 정(丁) 정도 소요된다 했으니 어마어마한 양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염을 할 때 일반사람들은 삼베로 수의를 해 입히지만, 왕이나 왕비는 흰 비단 옷을 9겹 입힌다. 염습의 처음 절차인 소렴(小殮)에는 겹옷, 겹이불로 19겹 입히고, 대렴(大殮)때에는 90겹의 수의를 입혔다.
왕이 죽으면 국상이 선포되고 병조에서는 군사들을 동원해 도성의 성문과 대궐을 호위했다. 예조에서는 의정부에 보고 후 지방에 공문을 보내어, 도성과 지방의 관청에 경계를 강화하고, 민간에서는 5일장을 열지 못하게 했다.
대신에 필수품에 한해 골목에서 매매가 이루어졌다. 또 죽은 지 3개월이 지나서 치러지는 졸곡(卒哭)까지는, 혼인이나 소 돼지 등을 잡는 도살이 금지되어, 백성들은 결혼을 못 하게 되고, 아예 고기 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5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두고 장례절차가 진행되지만 왕위 계승 문제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연의 사망 뒤 넷째 날에도 예조에서는 사위절목을 올렸지만 이진은 여전히 사양했다.
그러자 삼정승이 직접 백관을 거느리고 왕위를 이을 것을 청했지만 이진은 이 역시 사양하였다. 그러자 삼정승은 국왕의 자리는 한시도 비워 둘 수 없으니 속히 즉위 할 것을 다시 청했다.
여기서 이진의 마음 같아서는 바로 응하고 싶었지만 유교 국가인 조선의 예절은 이렇게 겸양으로 점철되며 아주 복잡했으므로, 이진은 억지로 참고 결코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삼정승들은 우르르 중전 박 씨에게 나가 전후를 고하고 도움을 청했다.
이에 중전 박 씨가 즉시 국왕에 오를 것을 청하는 언문 교지를 하달했다. 이에 비로소 이진은 마지못한 듯 신하들의 청을 수락해 이런 글을 내렸다.
“부왕을 그리워하는 정리를 억지로 참아가면서 그대들의 청을 따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위로는 어마마마의 말씀을 받들고 아래로는 신하들의 마음에 따라, 무너지는 듯한 망극한 심정을 억지로 누르며 공경(公卿)의 청에 부응하려 한다. 살을 베이는 듯한 아픔을 견딜 수 없다.”
마침내 넷째 날에 이르러서야 이진이 왕위를 나아갈 것을 허락하니, 즉시 다음날은 즉위식이 거행되게 되었다. 장소는 모든 의식이 거행되는 경복궁 근정전에서 행하기로 이미 예조에서 결정되었으나 이진은 이마저 거절했다.
“선대왕이 승하하신 망극한 시점에 검소하게 모든 것을 행할 것이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겠노라.”
이에 예조에서는 급히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 아닌, 이궁에서 준비를 하느라 큰 혼란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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