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88화 공세 (1)
싸움의 패자는 마교였다.
당장 사상자 수만 보더라도 정의맹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산으로 향하고 있는 정의맹의 사기는 승자라 보기 어려웠다.
사기가 바닥을 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화산의 이탈도 있었고, 예상보다 많은 사망자 비율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욱 사기를 떨어트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소림은 어떤가?”
백리은의 물음에 시후가 슬쩍 시선을 돌리자, 고개를 젓는 추나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소림에 관해 묻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기가 떨어진 이유는 소림 때문이니깐.
정확히는 천하제일권, 권황, 소림의 기둥, 불퇴불성 등, 수많은 별호를 가지고 있던 명일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에는 두 가지 이유가 겹쳤다.
하나는 ‘불살’이다.
곤륜에서 제갈마혁에게 제법 쓴소리를 들었음에도, 그는 불살을 지키려 했다.
실제로 가능할 뻔했다.
흉마를 상대하면서도 제법 여유가 있었으니깐.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었다.
흉마가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을 펼친다고 해도 명일은 무사할 수 있었을 테니깐.
문제는 두 번째 이유였다.
천력관문.
그 빌어먹을 물건을 흉마가 가지고 있었다.
물론 흉마 또한 목숨을 내놓아야 했지만, 명일의 목숨은 그보다 훨씬 무거웠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보다 놈들이 시간을 벌었다는 게 문제로군.”
우군도독부에서 보낸 병력이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이틀.
달아난 마교와의 거리는 도무지 인력으로 좁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차피 놈들이 시간을 벌었다고 한들, 딱히 할 수 있는 게 있진 않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니 주의해서 나쁠 건 없는 법이지.”
“반나절 거리까지 사람을 보내어 정찰토록 하겠습니다.”
추나행의 말에 제갈마혁이 고개를 저었다.
“개방에서도 흘린 피가 적지 않은데, 이 또한 떠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게다가 마교에서 작정하고 준비했다면, 어설프게 앞세웠다간 되려 이쪽을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의 말이 옳았다.
토로번 전투에서 마교는 많은 것을 잃었다.
금정신니가 광마를 죽였기에, 여덟 마존은 여섯으로 줄었다.
게다가 초마는 오른팔을 남겨둔 채 달아났고, 풍마는 각혈을 토해낼 정도로 심각한 내상을 입었으며, 전마는 중독되었었다.
단순히 마존 둘을 잃은 게 아니라 나머지 셋도 치명적인 피해를 보았고, 일 만에 달하는 정예를 잃었다.
목주림이 이끌었던 철혈대의 경우는 채 삼십도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한 번의 패배로 그들이 꼬리를 말고 달아날까?
아니다.
어마어마한 숫자를 줄이긴 했지만, 마교의 진정한 힘은 아직 발휘되지 않았다.
상대는 반격할 힘이 충분했다.
정찰을 믿고 안심하며 나아가다간, 길게 늘어진 채로 습격을 당하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정찰이 중요했다.
“최소한 마존을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정찰을 해야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존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을 정찰로 돌리는 건 조금 과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
추나행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이자, 제갈마혁이 그의 의문을 해결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일 만이라는 숫자를 잃고 돌아왔는데 곱게 내버려 둔다면 천마가 아니라 부처 아니겠는가? 조금이라도 이득을 취하려면 우리 정찰을 막는 게 녀석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할 테지.”
“아무리 그래도 정찰이라는 것이······.”
“그리고 개방의 발이 아무리 가볍다고 한들, 몇 계단 위의 고수와 비교할 순 없지 않나?”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제갈마혁의 단호한 태도에서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추나행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다들 제갈마혁이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후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뒤돌아봤지만, 그가 말한 조건에 충족하는 이는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주변의 시선이 정확히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농담이죠?”
시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물음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물론, 시후 혼자 정찰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저곳이 내려다보기 좋으니 돌아서 가 보자.”
“돌아가기 싫다고 해도 갈 거잖아요.”
“별로 힘들지도 않을 텐데 왜 이렇게 툴툴거려?”
정찰은 상대방의 눈을 피해서 이뤄져야 한다.
들키는 시점에서는 정찰이 무의미하니깐.
험지로 이동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고될 수밖에 없었다.
“쉴 틈이 없으니깐 그렇죠. 그리고······ 아니다.”
게다가 제갈마혁은 애초에 쌍괴를 보내려고 한 게 분명했다.
후괴의 신법은 강호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으니 말이다.
신법이 뛰어나다는 말은 주변 지형을 보는 눈이 좋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잘 달리기 위해선 주변을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다음에 발을 내디딜 공간을 찾을 수 있으니깐.
자신은 그런 쌍괴를 보내기 위한 미끼였다.
“잘 쫓아오거라.”
후괴가 앞으로 내달리자 서괴가 그 뒤를 따랐다.
제갈마혁의 생각은 읽기 쉬웠다.
마존 중 누군가 잠복하고 있더라도, 두 사람이라면 마존 하나쯤은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위협적인 검마가 있더라도 시후가 더해진다면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틀린 판단은 아니지만······.”
시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쌍괴가 더 멀어지기 전에 발을 뗐다.
누군가 그런 시후의 모습을 바라봤다면 눈을 비볐을 것이다.
며칠 전과 움직임이 전혀 달라졌다.
마치 하나의 벽을 넘은 것처럼 말이다.
이는, 투전승불의 종모 덕분이었다.
[현재 투전승불의 종모가 적용된 대상은 ‘철혈대주 목주림’입니다.]
해당 물건은 매우 특이했다.
‘손오공이 분신술로 뛰어나니, 그 능력을 심어 둔 물건을 하나 만드는 건 어떨까요?’
누군가 던졌던 사소한 제의로 만든 물건이었다.
처음에는 분신술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들려고 했으나, 모든 감각을 둘로 나눔은 물론이고 생각조차 나눠야 했다.
사람이 다루기엔 불가능한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처음 기획과 조금 다르게 바뀌었다.
대상의 능력을 복제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
물론 조건은 까다로웠다.
하지만, 모든 조건을 무시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소유주의 손으로 직접 죽인 이에 한해서는 예외로 한다.’
얼핏 들으면 대단히 좋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죽일 수 있는 상대라면 능력을 복제해서 무엇할 것인가.
하지만, 목주림은 시후에게 결여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정(精).
마공에 의해 뒤덮였을 뿐, 목주림은 애초부터 정을 완성한 상태였다.
정기신의 완성은 벽을 뛰어넘게 해 주었다.
거기에 더해진 건 그뿐만이 아니다.
애당초 일원신공은 목주림을 위한 무공이었다.
시후가 이룩해 놓은 경지에 목주림이 더해지자 바라는 바가 이뤄졌다.
[일원신공이 ‘유일’ 등급으로 상승합니다.]
애초에 포달랍궁을 들리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투전승불의 종모’를 얻기 위함이었다.
물론, 목주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목천추 또한 살아 있었을 테니깐.
“하지만, 다 부질없는 가정이지.”
시후는 헛된 상상을 떨쳐낼 겸 고개를 내젓다가, 앞에서 멈춰 선 쌍괴를 발견했다.
재빨리 감각을 끌어 올렸다.
삼 장 밖에서 풀잎을 기어 다니는 벌레의 움직임조차 느껴졌다.
주변에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지만, 두 사람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후도 두 사람이 멈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온다.”
서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점으로 보이던 사람이 순식간에 크기를 키웠다.
폭발적인 속도는 분명 후괴보다 우위였다.
곧 얼굴을 확인하자 시후는 안타까움에 탄성을 내뱉었다.
껑충한 키에 홀쭉한 뺨.
혈색이 푸르스름한 그는 밤 길거리에 누워 있다면 얼핏 보면 시체라고 착각할 법한 외모였다.
비마였다.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온전히 돌아간 이가 검마와 비마, 그리고 진마가 전부였으니, 마존을 만난다면 셋 중 하나일 것은 분명했다.
검마와 진마가 빼어난 무공으로 온전히 돌아갔다면, 비마는 경신법 덕분에 무사히 돌아갔을 뿐이었다.
단, 그의 상대는 검후였다.
검후의 검이 스치지도 못한 상대.
비마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거지 몇 마리나 잡을 줄 알았는데 대어가 찾아왔군.”
“가장 먼저 달아나더니 고작 이곳을 지키고 있었나?”
서괴가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분명, 마교가 후퇴를 결정했을 때 비마는 살아남은 여섯 마존 중 가장 먼저 달아났다.
모든 비난은 사실에 근거했을 때 가장 뼈아픈 법이었다.
하지만, 비마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어쭙잖은 도발에 넘어가 주는 시늉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이쪽의 목이 걸린 상황이란 말이지.”
담담한 비마의 대답에 서괴는 더 도발해 봤자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입을 닫았다.
후괴는 애초부터 도발할 생각을 버렸는지,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시후도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뒤에서 돕기만 하게.”
후괴의 말에 시후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두 사람이 돕는다면 검마가 와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비마라니.
질 수 없는 싸움이다.
시후는 후괴의 말을 무시한 채 자운유성창을 빙빙 돌리며 앞으로 나섰다.
“두 분이 저를 보조해 주세요.”
“무슨 소리를!”
후괴의 놀란 목소리를 무시한 채, 시후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전력을 다해서.
그러자 만류하려던 후괴의 표정이 변했다.
아주 오묘하게.
그와 동시에 비마의 표정 또한 변했다.
그 틈을 타서.
“분혼파쇄!!”
풀뿌리가 뽑혀나갈 듯한 거친 풍압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비마가 얼른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쌍괴는 그가 빠져나갈 방위를 점하였다.
둘 중 한 곳을 뚫다가 시간이 지체되면 시후의 공격을 피할 순 없다.
비마는 경공만큼이나 판단도 빨랐다.
급히 내공을 끌어 올리며 쌍검을 휘둘렀다.
교차하듯 휘두른 쌍검에서 쏘아진 얇은 검강 두 줄기가 분혼파쇄와 정면으로 격돌했다.
내공을 끌어올릴 시간이 짧았던 만큼 승자는 시후 쪽이었다.
“어딜!”
하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분혼파쇄는 그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못했다.
그를 예상이라도 한 듯 쌍괴가 양쪽에서 동시에 달려들었다.
물론, 시후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두 사람이 시선을 끌었으니, 주된 공격을 퍼붓는 건 시후의 몫이었다.
“붕악굴천!!”
“이런 개 같은!”
비마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시후의 공격은 간단했다.
오로지 힘!!
무식할 정도로 내공을 쏟아부은 공격을 펼쳤다.
어차피 정교한 초식은 두 사람의 몫이었다.
아무리 비마라도, 시후의 공격을 받아 내기 위해선 적지 않은 내공을 쏟아부어야 했다.
거기에 쌍괴까지 상대하는 건 절대 녹록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세 사람의 합격에 비마의 손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리고 결국, 공격을 허용했다.
“크윽.”
그의 몸을 최초로 두들긴 건 서괴였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간 경(勁)이 비마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억지로 내공을 끌어 올리며 호신강기를 두르긴 했지만, 이미 맞은 공격을 무위로 돌릴 순 없었다.
움직임이 둔해졌다.
자연스럽게 서괴의 공격 또한 거칠어졌다.
비마는 손을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도 연신 주변을 살폈다.
달아나기 위함이란 걸 모르기가 어려울 정도.
시후는 자운유성창을 휘두르는 와중에 쌍괴와 눈을 마주쳤다.
읽었다.
그들이 뭘 말하는지를 말이다.
시후는 그들의 바람에 응답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창을 찔러 넣었다.
몸을 비튼 상태로 창을 찔렀기에 방향이 틀어졌다.
틀어진 방향만큼, 비마의 좌측을 막던 서괴의 부담이 커졌다.
자연스레 허점이 생겼다.
비마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하지만, 갈등은 짧았다.
현상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모험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선택에 답은 없다고들 하지만, 비마의 선택은 분명한 오답이었다.
그리고.
“오판(誤判)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지.”
시후는 허점을 드러낸 비마를 향해 자운유성창을 찔렀다.
- 189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