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89화 공세 (2)
비마를 믿은 것일까.
그도 아니면 연락이 오지 않음으로써 비마의 죽음을 직감한 것일까.
열심히 주변을 훑으며 나아갔음에도 사람 머리카락 하나 보지 못했다.
그리고 토로번을 떠나온 지 엿새째 되던 날.
마교의 본대를 발견했다.
“숫자가 더 늘어난 거 같은데······.”
서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토로번은 넓은 분지라서 대략적인 숫자 파악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산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기에 정확히 헤아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시후는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아래를 훑어보다가 셈을 포기했다.
어차피 이런 걸 파악하는 건 추나행이 전문이니 그를 데려오면 될 일이었다.
“제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두 분이 다녀오세요.”
“그건 안 될 말이다. 굳이 한 사람이 남는다면 경공이 뛰어난 내가 남는 게 맞다.”
“먼 거리를 달릴 때야 그렇죠. 거리가 짧다면 제가 가장 적합하잖아요?”
후괴는 만 리를 달리면 가장 빠르지만, 천 리를 달려야 한다면 그리 빠른 축에 속하지 못한다.
짧은 거리는 얼마나 폭발적인 내공을 쏟아부을 수 있느냐의 싸움이니깐.
단순히 생각해 봐도, 시후가 남는 게 가장 현명했다.
비마가 죽은 이상 시후를 붙잡을 이는 천마밖에 없을 테니깐.
후괴는 딱히 만류할 방법이 없자 서괴를 바라봤다.
대신 설득해 보라는 듯한 시선에, 서괴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지나온 길을 가리켰다.
“······ 그렇긴 하지만, 지금 본대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짧다고는 말하긴 어렵지 않으냐?”
“내공이 바닥나기 전에 다다를 수 있으면 짧은 거리죠.”
쌍괴는 딱히 반박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는지 시후가 남는 걸 반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혼자 남는 건 두 사람 다 반대였다.
“혹시 모르니 두 사람은 남아야 하네.”
“저 혼자 남는 게 더 편해요.”
“연락을 취하는 건 혼자면 충분하지. 하지만, 이들을 지켜보다가 무슨 일이라고 생길 걸 염두에 둔다면······.”
“두 분보다는 제가 빠르잖아요. 저는 천마가 오지 않는 이상 제 한 몸 빼기에 충분한데, 두 분은 여덟 마존이 작정하고 달라붙으면 떨쳐 내기 힘들잖아요.”
“그럼, 천마가 온다면······.”
“천마가 오는 상황이라면 우리 셋이 있어도 죽은 목숨이죠.”
천마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팔황 중 셋은 필요하다.
물론, 셋으로도 승기를 장담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제가 혼자 남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죠?”
시후의 말에 두 사람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않았기에 시후는 재차 입을 열었다.
“천마가 뭐 하려고 이 외곽까지 돌아다니겠어요? 자자, 빨리 다녀오기나 하시죠.”
시후가 몇 번이나 재촉한 끝에 쌍괴는 온 길을 되돌아갔다.
물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이고 뒤를 힐끔거렸다.
본대와 최소 반나절 거리는 두고 움직이기에, 두 사람이 돌아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두 시진은 걸릴 것이다.
시후는 여러 명이 앉을 수 있을 법한 널찍한 바위로 이동한 뒤, 품을 뒤져 바짝 말린 육포 주머니를 꺼내었다.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자, 침과 뒤섞여 조금씩 연해졌다.
“다 좋은데 너무 딱딱하단 말이야.”
짧게 투정을 부리면서도 주머니를 향해 손을 몇 번이고 뻗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하나씩 집어 먹다 보니, 가득 차 있던 주머니는 점점 비어 갔다.
이 사이에 낀 육포 조각을 혀로 빼내며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요즘 질 좋은 육포가 얼마나 많은데 이런 걸 먹느냐?”
뒤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시후는 손을 옷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꾀죄죄한 옷차림, 게다가 코가 떨어질 것 같은 악취는 여전했다.
그리고 비쩍 마른 몸과 기억 저편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외모 또한 그대로였다.
시후는 그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 돌려주시죠.”
“퉷퉷퉷.”
노인은 침을 뱉는 시늉을 하자, 그의 입을 통해 고약한 침 냄새가 진동했다.
시후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천외무신.”
히죽히죽 웃던 천외무신의 표정에 놀람이 가득했다.
하지만, 곧 웃음을 되찾았다.
“날 안다는 건,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안다는 말이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업적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의 무공이 뭐죠?”
“고금.”
죄다 최초를 달성했음에도 고작 고금 무공이라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받을 수 있는 무공이었다.
그리고 고금 등급도 결코 낮진 않았다.
“그리고 무공을 교환하고 싶은데요.”
“무공이라 함은?”
“파천혈공을 교환하려고요.”
시후는 품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파천혈공(破天血功).
목주림이 익혔던 무공으로, 그를 죽이고 얻은 무공이다.
등급은 이전의 일원신공과 마찬가지로 신화 등급이기에 교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무공은.
“신화 등급 무공으로는 고금 등급 무공 두 개와 교환할 수 있다.”
“거기에 업적 보상을 합친다면?”
“신화 등급 무공을 받을 수 있지.”
교환은 매우 불합리하다.
아래 등급의 무공으로 바꿀 때는 두 개를 받지만, 상위를 얻기 위해선 세 개를 내놓아야 하니깐.
그럼에도 장점은 명확했다.
원하는 무공을 얻을 수 있다는 점.
시후는 천외무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쌍괴는 제갈마혁을 포함한 팔황 셋과 추나행을 비롯한 개방 장로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의 표정에서 얼마나 맘졸이며 달려왔는지 전해졌다.
“별일 없었는가?”
“낮잠이 솔솔 쏟아져서 큰일이었죠.”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남아 있을 걸 그랬군.”
“사실 이럴 줄 알고 남아 있겠다고 한 거죠.”
“허허, 이런 고약한······.”
시후와 쌍괴가 정답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추나행을 비롯한 개방 장로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흩어져 있는 모양을 보아하니, 열두 개의 전투대로 이루어졌던 기존 편재를 바꾼 듯하오.”
“나도 추 장로의 의견에 동의하오. 저기 좌측 칠 부 능선쯤에 자리한 언월도를 들고 있는 자가 보이시오? 토로번에서 저자가 쓰러진 금풍대주를 대신하여 금풍대를 이끌고 탈출했소만, 그의 우측에 있는 이는 적마대주요. 부대를 섞은 게 분명하오.”
“확실하오?”
“내 뺨에 이 멋진 상처를 남겨 준 녀석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그는 제 뺨을 어루만지며 눈을 반짝였다.
추나행은 행여라도 그가 적의를 뿜어낼까 봐 그를 진정시켰다.
“그보다 달아난 숫자보다 늘어난 거 같지 않나?”
“마교도의 숫자가 이십만이라 했으니, 숫자가 배로 늘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아무리 무공이 약하다고 한들, 마교가 무공이 약한 이들을 방패 삼아 밀어붙인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아니, 골치 아픈 정도를 넘어서 곤륜까지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
시후는 운기조식에 빠진 쌍괴를 뒤로한 채 제갈마혁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내가 일전에 토로번을 평가할 때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하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셨죠.”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기에 시후는 간단히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제갈마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산 아래를 가리켰다.
“이 지형은 어떻게 생각하나?”
알 턱이 있나.
시후는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며 고뇌에 찬 표정을 지었다.
무슨 대답을 던져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쉽사리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에둘러 말하는 수밖에.
“뭐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전해집니다.”
“여의주는 용의 신력이 머무르는 곳이라고 이야기했던 걸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용의 생명력이 깃드는 곳은 어디겠느냐?”
생명이 깃드는 곳이라.
절대 심장은 아닐 것이다.
제갈마혁은 언제나 추상적인 답을 원했으니깐.
그렇다면.
“뿔?”
“뿔은 세월을 담을 순 있어도 생명을 담지 못하는 법이지.”
용이 여의주와 뿔을 제외하면 무엇이 남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딱히 답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시후가 고개를 가로젓자 제갈마혁이 혀를 짧게 찼다.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용의 생명이 깃드는 곳 또한 심장이다.”
‘젠장.’
시후는 속으로 짧게 욕을 내뱉으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저들이 자리 잡은 저곳이 용의 심장이 자리한 곳이다.”
“이 지형에도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있지.”
그의 한숨 섞인 대답에 시후는 바짝 긴장했다.
토로번은 주변의 지맥을 차단하며 정의맹에 유리한 지형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제갈마혁의 한숨 섞인 대답에서 정의맹에 이롭지 못한 지형이란 걸 알아차렸다.
“대개 마공은 음(陰)의 기운을 띄고 있는 법이고 심장은 양(陽)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죽음은 음의 기운을 만들어 내고, 음기가 쌓인 심장은 양의 기운을 뿜어내는 게 아니라 음기를 뿜어내는 법이다.”
그의 대답에 시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초의 양의 기운이 있을 때 몰아치면 그만 아닌가.
제갈마혁은 그런 시후의 표정을 읽었는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싸움에서 누가 먼저 죽더냐?”
“······ 앞장서는 사람?”
“그것도 맞지만, 정답은 아니다.”
“용감한 사람?”
“그 또한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말하자, 시후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무공이 약한 이들?”
제갈마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한 이들은 죽어 나가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들은 버텨 내겠지. 그런 그들이 음기를 받아들였을 때 어떻게 되겠나?”
끔찍할 것이다.
십이마존이 음기를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끔찍할 것이다.
게다가 천마가 음기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하면, 정의맹을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전처럼 지맥을 막을 순 없나요?”
“그때완 상황이 다르다. 구(口)에 모이는 지력은 보잘것없으나, 이곳에 모이는 지맥을 억지로 막았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양기가 일순간에 터져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역으로 음기가 쌓일 것이니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질 게다.”
골치가 살살 아파왔다.
싸움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죽으면 곤란하다.
즉.
“장소를 옮겨야겠네요.”
“이곳에 자리를 튼 이상 물러나지도 따라오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오게 만들어야죠.”
“방도가 있더냐?”
“어떻게든 해 봐야죠.”
시후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은 채 고민에 빠졌다.
물러나게 만드는 방법은 한가지다.
‘뒤를 친다.’
하지만, 아무리 정예 병력이 없다고 한들 마교성에는 십만이 넘는 인원이 있다.
어쭙잖은 인원을 보냈다간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충분한 숫자를 보냈다간 본대가 쓸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따라오게 만들어야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방법은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미끼는 당연히 사람이 효과적일 것이다.
문제는 너무나도 뻔하다.
게다가, 삼 만에 달하는 저 숫자를 움직이려면 미끼도 거대해야 했다.
“최소한 천마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을 만한 미끼가 필요한데······.”
천마가 무엇에 가장 관심을 보일까.
시후는 곰곰이 고민에 잠겼지만, 생각을 깊이 이어 갈 수는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으니깐.
고개를 들자, 추나행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세요?”
“천마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미끼라면 이미 있지 않으냐?”
“그런 미끼가 있다고요? 어디요?”
그가 검지를 뻗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왼쪽을 바라봤다.
아무도 없었다.
오른쪽도 확인했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뒤 또한 마찬가지다.
“저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지켜보던 이들은 죄다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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