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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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개방 (3)
불노괴의 얼굴에 의아하다는 듯한 감정이 어렸다.
하오문의 호법 장로에게 와서 개방을 도와달라니.
헛소리도 이런 헛소리가 없었다.
다들 마찬가지였다.
특히, 제갈려는 미쳤냐는 듯한 눈빛으로 시후를 바라봤다.
“일단······.”
시후는 말끝을 흐리며 홍설과 초설을 힐끔거렸다.
눈치 빠른 두 자매가 방을 나서자 불노괴는 제갈려를 빤히 바라봤다.
그에 제갈려가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시후는 손을 뻗어 만류했다.
제갈려는 들어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개방에 갔을 때 같이 동행했다면 들었을 내용일 테니까.
잠시 밖으로 내보내 궁금증을 유발하게 할까도 싶었지만, 그랬다간 분명 몇 날 며칠 동안 시달릴 게 분명했다.
다만, 불노괴는 제갈려가 남아 있는 게 탐탁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시후는 다급히 입을 움직였다.
“그 약재를 사용하면 신의가 고칠 수 있다던가요?”
물음에 불노괴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런 말은 일절 없었다.”
시후는 순간적으로 등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내 일렁이던 마음을 가다듬었다.
불노괴는 일말의 희망을 보았으니 홍설 앞에서 아쉬운 티를 내었을 테고, 지금 이렇게 자리에 앉은 것은 신의에게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허나, 신의는 날 여러 번 진맥해 보았었고, 나 또한 신의를 알고 지낸 지 수십 년 세월이다. 내가 그의 반응조차 모를까 봐?”
불노괴는 단언하듯 말했다.
너무나도 확신에 차 있었기에, 순간적으로 신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 걸 잊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그건 불노괴의 희망이었다.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이 병을 벗어나고 싶다는 희망.
그 간절한 마음은 시후에게도 와닿았다.
“부탁하마.”
불노괴는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기에 너무 낯설었다.
오해로 시후를 두들겨 팼을 때조차 적반하장으로 나오지 않았던가.
악양루에서 두들겨 팼을 때 ‘꼴을 보니 창을 익힌 거 같은데, 발재간이 그래서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거나 받아’라는 막말을 했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
물론, 그때 받은 백후원보는 그 당시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했지만.
덕분에 그녀가 얼마나 절실한지 깨달았다.
거래라는 건, 절실한 쪽이 손해를 보기 마련이었다.
“개방을 도와주시면요.”
불노괴는 시후의 말에 눈썹이 역팔자로 뒤집혔다.
하지만, 칼자루를 쥔 쪽이 어느 쪽인지 잊진 않았다.
“······ 개방을 도와달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도와서 해결될 문제라면 자체적으로 해결 가능할 것이고,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 하는 문제라면 내가 돕는다고 해도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불노괴는 무공을 제외하면 별다른 능력이 없었다.
그녀가 왜 호법 장로를 맡기 전까지 별다른 직책이 없었겠는가.
불같은 성질 때문에 하오문의 사업체나 정보 관련 일을 맡길 수도 없었다.
그러니 문도를 보호하는 호법 장로에 임명한 것이다.
단순히 싸우는 거라면 문제가 없었으니깐.
하지만, 제아무리 그녀가 칠괴 중 하나라고 한들 개방에 비할 순 없다.
“그 돕는다는 게 조금 다른 방향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시후는 의아해하는 불노괴를 위해 품을 뒤졌다.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치우고 돌돌 말린 기다란 물건을 펼치자 지도가 나왔다.
지도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이곳저곳이 범벅되어 있었다.
“얼룩덜룩하죠?”
불노괴는 대답하지 않았기에 시후는 재차 말을 이었다.
“여기서 몇 군데 두 색이 옅은 곳 보이시나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시후는 속으로 혀를 차며 지도 몇 군데를 짚었다.
“붉은색은 개방이고, 푸른색은 하오문. 색이 옅은 곳일수록 힘이 약한 곳이죠.”
운남과 청해, 길림 지역은 색이 칠해져 있긴 했다.
다만, 정말 말 그대로 칠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
힘이 거의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보다도 더 어두운 곳도 있었다.
신강(新講)과 서장(西藏).
두 곳은 나라의 힘도 닿기 힘들 곳이니 개방과 하오문의 힘이 닿을 리 만무했다.
“본론만 간단하게.”
불노괴는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그에 시후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신의에게 약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테니, 잠시 서장에 다녀와 주세요.”
* * *
불노괴의 제자 사랑은 대단하다.
진작에 호법 장로직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초설을 제자로 들이고자 서둘러 북경까지 다녀올 정도로 제자를 아꼈다.
게다가 홍설의 눈물을 보자마자 시후를 두들겨 패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쉽게 정주를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후의 짐작보다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래도 불노괴는 최소한의 보험 장치는 들었다.
“그분은 언제 오시는데?”
“나야 잘 모르지.”
“······ 그때까진 꼼짝없이 정주에 머물러야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불노괴의 빈자리는 시후가 메워야 했다.
물론, 시후는 계속 머무를 수 없다는 점을 강력히 강조했기에, 기간은 일전에 제갈세가를 찾아왔던 사천벽이 올 때까지로 정해졌다.
문제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다.
하남에 있다면 하루 이틀 내로 올 수 있을지 몰라도······.
“저기, 광서 같은 곳에 있진 않겠지?”
“끔찍한 소리!”
“뭐가 끔찍한 소리야? 그분이 늦게 올수록 미인 셋과 한 지붕 아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거잖아?”
“미인 둘이겠지. 은근슬쩍 끼워 넣지 마.”
시후의 핀잔에 제갈려가 투덜거리는 사이,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문이 열리며 홍설이 안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홍설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걸었지만, 가는 방향을 확인한 시후는 홍설의 어깨를 붙잡았다.
“별관으로 안 가고?”
“스승님을 대신해서 저희를 돌봐 주시는 거잖아요? 당연히 본관으로 가셔야죠. 혹여라도 누군가 나쁜 맘을 먹고 침입한다면, 무공이 약한 저희 자매는 꼼짝없이······.”
홍설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워 보였는지, 제갈려는 홍설의 손을 붙잡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불노괴가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워낙 은밀히 떠났기에 하오문이나 개방 소속이 아니라면 그 사실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만에 하나, 정말 적의를 가진 고수가 찾아온다면 그녀조차 감당 못 할 고수일 것이다.
그 말은, 시후가 아니라 시후 할아버지가 와도 못 막는다는 의미였다.
홍설의 말은 단순히 시후를 곁에 두고 싶어서 응석 피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스승이 자리를 비운 지금은 절호의 기회기도 했으니깐.
“제갈 소저께선 여기 머무르시면 됩니다.”
홍설은 제갈려를 본관 가장 가장자리 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하곤 시후를 안으로 데려갔다.
별 의심 없이 방으로 들어가려던 제갈려는 뒤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후는 깊이, 더 깊이 들어갔으니깐.
“내 방은 왜 저쪽이 아니야?”
“어머, 소녀를 지켜 주셔야죠.”
“쟤는 저렇게 떨어트려 놓고? 게다가······ 옆은 누구 방이야?”
시후의 물음에 홍설은 대답 대신 배시시 웃었다.
대답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초설의 방은 어디야?”
“제 방에서 방 두 개는 떨어져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된답니다.”
뭘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걸까.
시후는 제 입술을 핥는 홍설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 * *
제갈려는 멍하니 식탁 위를 바라보다가 초설을 향해 물었다.
“원래 이렇게 잘 먹고 지내는 편이에요?”
“아뇨, 그렇진 않은데······.”
“그럼 우리 때문에 이렇게 차린 거네요? 이거 죄송스러워서 어쩌죠?”
시후는 제갈려의 말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건 노동의 대가다.
그래, 지난 밤일은 노동이라 칭할 만했다.
제갈려가 놀라거나 말거나, 홍설은 음식을 더 내왔다.
총 스무 가지의 음식이 차려진 식탁은 무척이나 풍성했다.
“차린 게 없······ 진 않지만, 많이 드세요.”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이 정도면 꼭두새벽부터 준비하셨겠는데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조리하기 간편한 음식들 위주로 차리고, 비슷한 재료를 조금씩 조리 방식만 다르게 해서 얼마 걸리지 않았어요.”
거짓말이다.
아주 새빨간 거짓말.
시후는 홍설이 자신의 방에서 빠져나간 시간을 떠올리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보다, 준비하는 동안 사람은 오지 않았어?”
“아, 문에서 온 사람이었어요. 사천벽 어르신이 닷새 뒤에 도착할 예정이래요.”
닷새.
긴 시간이다.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시후에겐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그에 반해 홍설은 아쉬운 듯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어디에 계시길래?”
“그거까진 이야기해 주지 않으시던데, 물어볼까요?”
“아냐, 뭘 물어봐. 그보다, 성취는 어때?”
“내공만 충분하면 탄음(彈音)도 문제없어요!”
귀재(鬼才)다.
탄음은 검사에게 검기와 같았다.
홍설이 음공을 배운 지 아직 육 개월도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다.
시후는 저도 모르게 초설을 힐끔 바라봤다.
이번에는 초설이 잔뜩 풀이 죽었다.
“저는 이제 간신히 요령동심(搖靈動心)에 들어서서······.”
나쁘지 않다.
이대로라면 올해 안에 홍설과 같은 탄음의 경지에 오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홍설은 그사이에 아득히 멀리 앞으로 달려갈 것이다.
초설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표정이 어두웠다.
“너도 터무니없이 빠르니깐 너무 실망하지마. 홍설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하는 거니, 쓸데없이 비교해서 맘 상하지 말고.”
시후의 말에 초설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비교하지 말라고 말해 줘도, 그럴 수 있을까.
바로 곁에서 보고 들을 테니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덕분에 식사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았다.
시후는 왠지 자기 책임인 듯했기에, 간간이 요리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 아무도 없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상당히 익숙한 목소리였기에 시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나갔······.”
“아니. 내가 나갔다 올게.”
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홍설을 앉혔다.
누군지 알 거 같았으니깐.
홍설이 뒤따라 나오려 했지만, 시후는 자신의 손님이라 말하며 안으로 들여보냈다.
정문으로 다가가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점차 켜졌다.
“에잉, 이놈의 집구석은 다들 귀가 처먹었나? 문을 부수······.”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다급히 외치며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로 막 발을 들어 올리던 추나행의 모습이 보였다.
시후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그를 노려봤다.
“그 발을 들어 올린 이유는 뭐죠?”
“커흠, 운동이지, 운동. 네가 내 나이쯤 되면 알겠지만, 운동이란 건 틈틈이 해야 하는 법이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어허, 어른이 말하는데 말 같지 않은 소리라니?”
“시답잖은 이야기하러 온 거 아니잖아요.”
“쯧, 성질머리 하곤.”
추나행은 시후에게 타박을 주곤,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었다.
“영 근거 없는 소리도 아니고, 미리 연락해서 나쁠 건 없다고 판단했다.”
시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추나행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다.
개방도 놈들의 뒤를 쫓다 보니 깨달았을 것이다.
뱀의 꼬린 줄 알았더니, 용의 꼬리란 걸.
“일단, 행방이 묘연한 두 사람에겐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나머지 여섯 분에겐 단오(端午) 전에 숭산으로 모여 달라고 전하였다.”
행방이 묘연한 둘과 여섯을 더하면 총 여덟이다.
그 숫자가 의미하는 건 하나다.
추나행은 시후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황 중 육황이 소림에 모일 것이다.”
- 15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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