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55화 준비 (1)
애초에 다 모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여섯이면 시후가 생각한 숫자와 똑같았다.
하지만, 행방이 묘연한 두 사람이라는 말은 이상했다.
“한 명은 알겠는데 한 명은 누구예요?”
팔황은 대부분 그들의 영역 내에서 머무른다.
물론, 검후는 강호를 쉼 없이 떠돌아다니긴 하지만.
그래도 검후는 양반이다.
적풍에 비하면 눈에 띄게 돌아다니는 편이니깐.
적풍.
그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전진교의 적통을 이은 몸이지만, 일흔이 넘어가는 나이에도 제자를 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붙은 별호가 부종검(不從劍).
전진교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붙인 별호였다.
아마도 행방이 묘연한 두 사람 중 하나는 적풍일 것이다.
하오문과 개방도 종종 그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니깐.
혹시 소검후의 행방을 놓쳤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추나행의 입에서 나온 곳은 시후의 예상을 벗어났다.
“곤륜이다.”
곤륜파는 ‘청해’라는 변방에 위치하여, 구파 중 중원에 미치는 영향력이 가장 미미하다.
최근 성세를 회복해 팔대세가에 돌아온 서문세가와 비교해도 모자란다.
하지만, 무공을 놓고 본다면 전혀 다르다.
소림에 칠십이절예(七十二絶藝)가 있다지만, 곤륜 또한 그에 못지않은 뛰어난 무공이 즐비해 있다.
무공의 질과 양적인 측면을 모두 더한다면, 소림과 무당에 이어 세 번째는 곤륜이 차지한다는 말에 이견을 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미미한 영향력으로도 구파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 곤륜의 명성을 한층 더 끌어올린 인물이 바로, 팔황에 올라 있는 천태 진인이었다.
방대한 곤륜의 무학 가운데, 무려 사십여 종을 익힌 그는 ‘움직이는 곤륜’이라 불렸다.
“곤륜에서는 뭐래요?”
“거리가 얼만데 연락이 왔겠냐? 사라지셨다는 것도 어제 연락받았다.”
조금 꼬였다.
곤륜의 부재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시후는 부종검과 보타문에서 빠질 줄 알았다.
부종검이야 워낙 연락이 쉽지 않은 인물이고, 보타문의 금정신니가 보타문을 떠난다는 건 쉽게 상상 가지 않았으니깐.
“여섯이 아니라 다섯 아니에요? 금정신니가······.”
“온다.”
확신에 찬 대답.
시후는 따지고 드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천태 진인의 빈 자리는 금정신니가 채울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상성으로 본다면 금정신니가 더욱 좋다.
“다행이네요.”
“그리고 섬전도를 찾는 건 조금 더 시일이 걸릴 듯하다.”
어차피 재촉해 봤자 빨라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추나행은 할 이야기를 다 한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후도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활짝 열어 둔 문을 닫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그럼······.”
“아침을 먹고 있었더냐?”
“아뇨. 다 먹고 치웠는데요.”
본능적으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다 먹었다는 말에도 추나행은 포기하지 않았다.
“남은 거라도 있으면······.”
“아침이잖아요? 얼마 안 차려서 다 먹었어요.”
또 거짓말이다.
추나행이 아무리 많이 먹는다고 해도, 홍설이 차린 음식의 반의반도 못 먹을 것이다.
그럼에도 들이지 않으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유 중 하나는 물론 ‘더러움’이었다. 남궁미와 같이 다닐 때야 꼬박꼬박 씻었다지만, 그 뒤로 단 한 번도 씻지 않은 듯 때가 꼬질꼬질했다.
이곳의 주인은 불노괴다.
홍설이나 초설이 그를 들이는 건 문제가 없지만, 시후가 들어오라고 하는 건 주인을 향한 예의가 아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예전에 규화계를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였다.
추나행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젠장, 아침부터 어딜 가서 빌어먹지······.”
그는 곧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성공이다.’
시후는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 치졸한 복수였다.
“밥 다 식어요!”
뒤편 저 멀리서 들려온 홍설의 외침에 시후는 급히 문을 밀어 닫으려 했으나, 문이 닫히기 직전 막 몸을 돌린 추나행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망할.’
* * *
시후는 정확히 닷새 뒤 도착한 사천벽에게 홍설과 초설을 맡기고, 제갈려와 함께 소림으로 향했다.
연락을 받은 팔황이 다 모이려면 다소 시일이 걸리지만, 어차피 정주에 있어 봤자 득 될 건 없었으니깐.
차라리 소림에 가서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는 게 중요했다.
시후는 소림 산문을 지나다 말고 소림승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몇 분이나 도착했죠?”
두서없는 질문이지만, 시후가 무엇을 묻는지 뻔했기에 스님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분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살짝 당황했다.
시후가 개봉에 들려 이야기했던 시점이 일주일 전이었다.
소림과 무당이야 그러다 치더라도, 나머지 둘은?
그 의문 어린 시선에 스님은 묘한 미소를 띠며 웃었다.
마치 ‘알려 주면 재미없지 않겠냐’라는 듯이.
그 표정에, 시후는 캐묻는 대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안다고 해서 별반 달라질 건 없었으니깐.
지객당으로 향하던 시후는 곧 누가 도착한 건지 알아챘다.
“보타문이군.”
햇빛을 받아 반들거리는 머리 아래, 바닷가의 햇볕에 그을린 듯 생기 넘치는 구릿빛 피부.
하지만 얇은 얼굴선과 함께, 소림의 붉은 가사와 달리 바다를 닮은 푸른 가사는 보타문의 비구니임을 확신케 했다.
시후는 그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비구니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합장했다.
그러나 약관을 진작에 넘긴 나이로 보았지만, 아직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듯 대충 합장하며 시후의 시선을 피했다.
덕분에 지객당주인 정각과 대화를 나누던 비구니가 고개를 돌렸다.
마흔은 넘겼을까?
하지만, 섣불리 나이를 짐작하긴 어려웠다.
정각이 비구니에게 양해를 구하며 다가왔다.
“차 시주,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타문의 분들이시죠?”
정각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보타문은 아미파와 더불어 여승들로 이뤄진 문파였다.
다만, 아미의 경우는 제법 교류가 잦은 편이지만, 보타문의 경우는 폐쇄적이다는 말이 뭔지 보여 줄 정도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정각의 말은 보타문에서 불편하지 않도록 자리를 피해 달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조금 돌아다니다가 오겠습니다.”
“고맙네.”
제갈려가 다소 투덜거리긴 했지만, 보타문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건 정말 오랜만인지라 짧게 그쳤다.
“보타문에서 웬일로 강호에 나왔지? 연락을 받고 나왔으면 모르겠지만, 스스로 나오는 건 거의 사오십 년만 아냐?”
시후는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는 잘 몰랐기에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에 제갈려는 신이 나서 재차 입을 뗐다.
“아마도 맞을 거야. 그때 관련해서 할아버지가 이야기해 주신 게 있었는데······.”
제갈려는 기억이 잘나지 않는 듯, 말을 하다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보통 제갈려의 이야기는 쓸데없는 경우가 많았기에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 검후! 그때 금정신니가 검후와 겨뤘었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시후는 제갈려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 당시의 금정신니는 왜 현월문의 문주가 대대로 검후의 별호를 가지는지 의문이 들어 비무를 청했다고 들었어. 뭐, 그때의 결과는 무승부였지만.”
잠시나마 헛소리가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제갈마혁이 쓸데없는 거짓말을 했을 리 없으니 사실일 것이다.
이 또한 몰랐던 사실이었기에 시후는 귀를 쫑긋거렸다.
“그때 일로 금정신니가 제법 자존심을 구겼다고 들었는데, 아까 걔가 제자 아냐?”
“정각 대사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
“아니, 무슨 헛소리야? 상식적으로······.”
“장난이야. 그 시선 피하던 비구니 말이지?”
제갈려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야?”
“음······.”
그러고 보니, 절정이라면 알아차렸을 테지만, 기세를 정확히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시후와 동급일 것이다.
그도 아니면 완전 무공을 익히지 않았거나.
“와, 볼 만하겠네?”
제갈려는 시후의 속마음을 읽은 듯 싱글싱글 웃었다.
이번에 검후도 소림에 올 것이다.
비령이 구천종주를 혼자 다니도록 하진 않을 테니, 같이 올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검후가 사저인 연설련에게 비령을 맡길지도 모르지만, 개방에서 연락을 제대로 취했다면 비령을 곁에 두려 할 것이다.
“넌 붙는다면 누가 이길 거 같아?”
“음······. 금정신니의 제자와는 안 붙어 봤으니 모르지.”
“대충 알 거 아니냐?”
“그날의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
“둘 중 하나를 꼽아 봐. 내가 쟤는 이기겠다는 이런 거 있잖아.”
“둘 다 별로 자신 없는데?”
시후는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제갈려는 집요하게 물었다.
한참을 이어진 실랑이 끝에 시후는 항복 선언을 했다.
“아무래도 소검후가 더 상대하기 어렵지. 구천종주를 떠나기 전에도 비등비등했는데, 지금에서는 조금 더 격차가 벌어졌을 테니깐.”
“키킥, 너 접때 2년 뒤를 기약하겠다고 하지 않았어?”
“······ 기억력도 좋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2년 뒤에도 지금과 결과가 같다는 보장은 없다고 했던가?”
제갈려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지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뭐라고 해 봤자 멈출 것 같지도 않았기에, 시후는 한숨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시후의 눈이 커졌다.
천불전 담장 끄트머리에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으니깐.
“그때 밖으로 나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냐?”
“할아버지!”
제갈마혁이다.
그는 사천으로 향하는 중이었으니, 바로 배를 갈아탔다면 먼저 도착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후는 제갈마혁보다 그 옆에 있는 인물에 집중했다.
담장 그늘 속에 서 있음에도 존재감을 훤히 드러내는 민머리.
푸른색 가사.
제갈마혁과 비슷한 연배.
금정신니였다.
“제갈 시주께선 귀여운 손녀라고 해서, 해야 할 이야기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했나 봅니다.”
“크흠!”
금정신니의 싸늘한 눈빛을 받은 제갈마혁은 시선을 피했다.
팔황 중 한 명이 당황하는 모습을 본다는 건 쉬운 광경이 아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뒤에 나눴던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갈마혁을 노려보던 시선이 시후에게로 향했다.
금정신니의 고까운 시선이 몸을 훑고 지나감을 느꼈다.
“과연 들은 데로군.”
무엇을 들은 것일까.
시후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관심을 거둬 주길 바랐다.
그 바람과 달리, 금정신니는 시후에게 다가왔다.
“시주께선 어디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습니까?”
짧게 머리를 굴렸다.
있다고 해야 할 것도 없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고민하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없다면 따라오시지요.”
분명 존대였지만, 명령이었다.
시후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금정신니를 따라갔다.
물론, 이번 일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인 제갈려를 노려보면서.
금정신니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가는 방향은 시후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곳이었으니깐.
“스승님.”
여태까지 정각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보타문의 여승이 금정신니를 발견하곤 인사를 건넸다.
다만, 주변에 여승들은 하나도 없었다.
“화정이는 어디에 있느냐?”
“방에 들어가 있습니다.”
“데려오너라.”
금정신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기에 여승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정각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빛을 보냈지만, 눈짓 손짓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시후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잠시 뒤, 여승은 아까 시후와 시선을 피한 젊은 여승을 데려왔다.
“인사드려라.”
금정신니의 말에 화정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곧바로 합장을 취했다.
“아미타불, 보타문 19대 제자 화정이라 합니다.”
“······ 차시후라고 합니다.”
둘은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금정신니를 바라봤다.
“시주의 솔직한 평을 듣고 싶은데, 내려 주시겠습니까?”
“평이라뇨, 가당치도 않습······.”
시후는 금정신니의 매서운 눈빛에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정말 재수가 없으려니깐 일이 이렇게 꼬이네.’
시후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애당초 둘 다 자신 없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감히 제가 평가하기에 벅차니, 부디 제 실언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중한 사과에도 불구하고 금정신니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손을 섞지 않고서야 어찌 평을 내리겠습니까?”
그 말에 시후는 재차 고개를 숙이려다가 문득,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필요가 있나 싶었다.
시후는 고개를 돌려 화정을 바라봤다.
분명 초절정에 오르긴 했지만, 그건 시후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전력으로 맞붙는다면 이긴다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질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후가 다시금 살짝 고개를 돌리자, 금정신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시선 속에서 ‘어서 내 제자가 검후의 제자보다 뛰어나다고 말해.’라는 걸 전해 받았다.
그 눈빛을 보곤 마음을 굳혔다.
“지금 붙어 볼까요?”
- 15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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