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53화 개방 (2)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제갈려가 안 보인다 했는데, 처음 헤어진 곳보다 조금 더 바깥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괘씸했다.
누구는 저 인세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고통받았는데, 뻔뻔한 얼굴로 다그치기나 하다니.
“궁금하면 따라오지 그랬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눌 거 같아서 배려해 준 거지.”
“그럼 물어보지 말고 계속 배려하세요.”
시후가 말 고삐를 낚아채며 지나치자, 제갈려의 볼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
뒤에 바짝 붙어 한참을 칭얼댔지만, 그런다고 시후의 입이 열릴 리 만무했다.
제갈려가 그 사실을 인지한 건 그로부터 반 각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돌아오지 않는 공허한 외침이란 걸 알아차린 듯, 이제는 정말로 돌아올 수 없는 물음을 던졌다.
즉,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오문에 사람을 찾아달라 부탁하고 개방을 찾아와서 의도적으로 방주를 부른다? 개방에서도 하오문과 더 가까운 사이란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아까 추 장로님 반응도 그러했단 말이야. 보자마자 얼굴에 찝찝함이 가득하셨는데, 움막을 나와선 표정이 밝았단 말이지. 곁에 있던 구 방주님의 얼굴도 제법 심각해진 걸 보면, 절대 가볍게 흘려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제갈려는 시후가 목소리 높여 추나행을 부른 이유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래봤자 저게 끝이다.
직접 대화를 듣지 못한 이상, 더 추론하긴 힘들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제갈려는 곧 고개를 저었다.
“뭐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구 방주님이 몸이 달아서 움직인 거야?”
대답하진 않았다.
하지만, 제갈려의 성격도 보통은 아니었다.
악착같이 들러붙으며 시후를 귀찮게 했다.
“하오문은 믿음직스럽지 않나 봐?”
부터 시작해서.
“아, 역시 하오문보다는 개방이지. 그렇지 않아? 믿고 맡기는 개방! 믿고 거르는 하오문!”
제갈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개봉에서 개방의 힘이 강하다고 한들, 하오문도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되려 오가는 사람이 많은 만큼, 하오문도의 숫자도 엄청난 편이었다.
저 입을 다물게 하려면 조그마한 단서라도 안겨 주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시후는 짧은 고민 끝에, 정말 작은 단서를 하나 던져 주었다.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야기. 하지만, 일어나면 곤란한 이야기.”
제갈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바라봤다.
시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곧장 말에 올라탔다.
“확실한 건 아니니깐 기다려. 나도 확신이 없어서 개방에 물어봤으니깐.”
“하오문에서 알면 안 되는 이야기야?”
“하······.”
시후는 깊은 한숨을 쉬며 제갈려의 입을 바라봤다.
그리곤 대답 대신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에 제갈려도 급히 말에 올라타며 뒤를 쫓았다.
“어디가!”
그 다급한 외침에 시후는 뒤돌아보며 짧게 외쳤다.
“정주!”
* * *
제갈려는 주변을 맴도는 거지들을 힐끔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냄새 배겠다.”
절대 아니다.
개방 거지들은 냄새가 배게 하긴커녕, 냄새가 나지도 않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아무리 가까워도 10장 이내로 접근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제갈려의 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흔히들 개방의 저력을 표현할 때는 ‘십만 개방’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근거 있는 숫자도 아니고, 사실 또한 아니었다.
하지만, 이 짧은 거리를 지나치는 동안 보아온 거지들 덕분에, ‘십만이란 숫자도 저평가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응? 더는 안 따라오네?”
제갈려의 말에 뒤돌아봤다.
허리춤에 한 개의 매듭을 달고 있던 거지는 골목 어귀에서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짧은 의문이 머리를 스쳤지만, 왜 돌아갔는지는 금방 깨달았다.
지금 가려는 곳은 개방의 일결 제자가 오기엔 꺼려질 수밖에 없는 곳이니깐.
그건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대문 앞에 선 채로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 모습에 제갈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해?”
“마음의 준비.”
“무슨 마음의 준비야?”
제지할 틈도 없었다.
시후가 손을 쭉 뻗더니, 그대로 문고리를 세차게 흔들었으니깐.
탁탁탁!
제갈려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지만, 그런다고 일어난 일이 없던 일이 되진 않았다.
덕분에 안에서 들려오던 잔잔한 금 소리가 멈추었다.
잠시 후, 자박자박 걸어오는 발소리와 함께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세요?”
맑고 청아한 목소리.
시후의 표정이 밝아졌다.
셋 중 그나마 나은 상대였으니깐.
“접니다.”
“저가 누구······. 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초설이 나타났다.
여전히 눈부신 외모였다.
유달리 새하얀 얼굴이라 그런지, 얼굴이 더욱 빛나는 듯했다.
“대협!”
초설이 밝게 웃으며 시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절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천하제일을 다툴 만한 미녀가 이토록 반겨 주는데, 고자가 아닌 이상 좋지 않을 리 없었다.
“연락도 안 해 주시고······ 너무하셨어요!”
“어차피 하오문을 통해서 소식이 전해질 테니······.”
“소녀는 대협께 직접 소식을 전해 듣고 싶었는걸요?”
입에 발린 소리다.
그 사실을 시후도 모르진 않지만, 정도가 과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싫지가 않았다.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수준을 넘어 위로 솟구쳤다.
하지만, 애초에 이곳을 찾은 목적은 초설이 아니었다.
“흠흠, 전 장로님은 안에 계시니?”
시후의 물음에 환하게 웃던 초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없는 건가 싶었지만, 초설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계시긴 하는데······.”
초설은 말꼬리를 흐리더니 얼굴을 시후에게 가까이 붙였다.
“며칠 전 숭산에 가셨다가 어제 돌아오셨는데, 안 좋은 일이 있으셨는지 기분이 영 좋지 않으세요.”
평소에 성격도 좋다고 말하긴 어렵다.
아니, 나쁜 쪽에 가깝다.
그 사실은 시후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해 준다는 건, 지금 만나려 하면 신상에 이롭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경고였다.
고민할 가치가 없었다.
시간이 부족한 건 아니니깐.
“그럼 내일 다시 찾아올 테니······.”
“언니!”
초설은 시후의 말을 끊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자신의 어깨너머였다.
덕분에 시후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외출했었던 홍설이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분명 홍설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리라는 것이다.
물론,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 * *
그간의 근황을 직접 입으로 전해 듣고 싶다는 홍설의 말에, 시후는 조곤조곤 그간의 일들을 풀어 놓았다.
실랑이할 바에 최대한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으니깐.
하지만, 불노괴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낮게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문을 두드렸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최대한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 그렇게 천이 형님께서 잠시 시간을 벌어 주신 틈을 타서, 내가 놈의 목에 창을 꽂아 넣을 수 있었지.”
시후는 이제 이야기할 게 끝났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홍설이 눈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시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 동생과 마찬가지로 시후의 손을 꼭 붙잡더니 손등을 토닥였다.
“정말······.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손등을 토닥여 주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등을 토닥여 주고 있다고 느껴졌다.
따스한 품에 안긴 것처럼 마음이 노곤해졌다.
시후의 뺨이 괜스레 붉어졌다.
“그보다, 전 장로님은 왜 기분이 안 좋은 거야? 숭산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 그게······.”
분위기를 전환할 겸 꺼낸 말에 홍설이 제법 동요했다.
말하기 곤란한 내용인가?
그에 시후는 기억을 더듬었다.
불노괴가 숭산에서 무슨 문제를 겪거나 얽힌 이야기가 있었던가?
짧게 고민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건 없었다.
홍설은 한참을 우물쭈물했기에 시후는 손을 저었다.
“알려 주기 곤란한 내용이면 말 안 해도 돼.”
“아뇨, 곤란할 건 없어요. 다만······. 저희 스승님 별호는 아시죠?”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노괴(不老怪)’가 아니던가.
특이한 정도를 뛰어넘어서, 한 번만 들어도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될 별호였다.
홍설은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신의께서 아주 귀한 약재를 얻었다는 소식에, 스승님께서 소림을 찾으셨어요.”
그 말과 동시에 시후는 심장이 격하게 뜀을 느꼈다.
그 귀한 약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후는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아시겠지만, 저희 스승님께서 별호가 그런 건······ 병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그 귀한 약재를 얻었다는 소식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가셨는데, 돌아오신 뒤에 저렇게 방에서 칩거하고 계시네요.”
“쩝······. 아무리 신의라고 한들, 못 고치는 병도 있는 법이지.”
“스승님이 그렇게 급히 달려간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게다가 식사하시면서 뭐가 임자가 있는 물건이냐며 중얼거리기도 하셨거든요.”
“그래?”
시후는 들뜬 목소리를 억누르며 되물었다.
호재다.
을이 갑이 될 수 있는 기회.
표정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얼굴에 속내가 드러난 것인지 홍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후는 입가를 가린 채 헛기침을 해댔다.
마침 찻잔도 비어 있었다.
“크흠, 크흠, 아, 목이 좀 타네.”
“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잔이 빈 것도 눈치채지 못했네요. 차를 더 내올까요?”
“부탁할게.”
시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설이 병을 들고 쪼르르 방을 나섰다.
잠시나마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시후는 잠시 눈치를 살피곤, 홍설을 향해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홍설은 조금 전과 다른 시선에 잠시 의문을 표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방, 방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 다소 붉어진 뺨. 뭔가를 바라는 듯한 은은한 눈빛.
아니다.
아니라고.
시후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인사라도 드리러 가야 할 것 같아서.”
홍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생각하는 듯했다.
수 초 후, 홍설의 얼굴에 존재하는 모든 혈관이 일제히 격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아, 그, 그래야죠. 에, 스승님께 여쭤보고 올게요!”
쾅!!
홍설은 문이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박력 있게 방을 나섰다.
제갈려는 부스스 날리는 먼지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귀엽네.”
“귀엽지.”
두 사람이 돌아오기 전까지 시간은 얼마 없다.
제갈려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바로 궁금한 점을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상대가 원하고 내가 줄 수 있다면, 줘야지.”
대답이 의외였는지 제갈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믿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공짜로?”
“당연히 아니지.”
가만히 놔두면 신비의 비약이 만들어질지도 모르는데, 공짜로 줄 순 없다.
응당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뭘 요구할 거야?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꺼내면······.”
제갈려가 말끝을 흐렸다.
누가 누구에게 충고한단 말인가.
그녀가 전여린의 성격에 대해 알아차린 건 시후 덕분이다.
“알아도 내가 더 잘 알지.”
“······ 그렇겠네.”
그 뒤로 대화는 끊겼다.
제갈려는 혹여라도 불똥이 떨어질까, 슬쩍 시후와 거리를 벌려 앉았다.
‘저 영악한 것.’
시후는 속으로 제갈려를 향해 욕설을 날리며 홍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랑엔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으니깐.
직접 찾아온 것인가?
시후는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인상을 찌푸린 전여린의 모습이 나타났다.
“왔어? 쥐죽은 듯이 쉬다가 가.”
전여린은 할 말만 하고 몸을 돌렸다.
저 말을 하려고 온 건가.
시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전여린의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 입을 뗐다.
“고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걸음이 마치 발바닥에 아교라도 붙은 듯 멈췄다.
고개가 아주 천천히 돌아갔다.
시후는 타는 갈증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죽고 싶어?”
살기는 전혀 없었다.
그냥 툭 지나가듯 던지는 말.
하지만, 그게 되려 섬찟함을 불러일으켰다.
뒤에서 바라보던 홍설이 뭐 하는 짓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고개 숙여 사과했겠지만, 지금 갑은 시후 자신이었다.
“신의가 귀한 약재를 얻었다는 소식은 누구를 만난 뒤에 퍼졌을까요?”
전여린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그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으니깐.
시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고치고 싶지 않아요?”
똑같은 말이지만, 이제는 전혀 다르게 와닿을 것이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차를 다시 끓여 온 초설의 인기척 덕분에 침묵이 끝나자, 전여린은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시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때문에 날 찾았는데?”
협상 시작이다.
시후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자세를 바로 했다.
“개방을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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