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52화 개방 (1)
시후는 하오문 합비 지부를 찾아가기 무섭게, 지부장 정태에게서 서찰 하나를 건네받았다.
누구에게 온 것인지 확인키 위해 앞뒤를 살폈지만, 겉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시후는 막 서류 더미 앞에 앉으려는 정태의 눈앞으로 서찰을 불쑥 들이밀었다.
“이게 뭐예요?”
“읽어 보면 알 것 아니오?”
꽤 바쁜 와중에 찾은 것인지, 시후의 물음에 성부터 냈다.
하지만, 그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기에 시후는 조심스레 서찰을 펼쳤다.
“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일까.
시후의 입에선 탄성이 흘러나왔다.
탄식의 탄성이 아니라, 감탄의 탄성이었다.
서찰에는 사천에서 붙잡은 흑련회 놈들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놈들이 어떻게 임무를 전달받는지부터 시작해서, 당가를 무너트리는 데 성공했을 시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까지.
시후는 뒤에 내용은 나중에 읽기 위해 곱게 접은 뒤 품에 넣었다.
하오문을 찾은 이유는 이걸 알아내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깐.
“저기요.”
시후의 부름에도 정태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수북히 쌓인 서류를 뒤적였다.
못 들은 척하는 건가 싶었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은 연기 같지는 않았다.
시후는 헛기침을 내며 재차 인기척을 내었다.
“크흠, 저기요.”
정태는 그제야 시후를 바라봤다.
재촉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 시후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사람 하나를 찾고자 하는데요.”
“귀찮게······. 최대한 상세히 말해 보시오.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 그림이 있으면 더 좋고.”
“십오 년 전, 섬전도(閃電刀)라고 불렸던 사람입니다.”
정태는 시후의 얼굴을 반히 바라봤다.
독심술을 익히지도, 표정을 읽는 방법을 배우지도 못했지만, 그의 눈빛은 더 말해 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거로는 단서가 좀 부족한가요?”
시후의 말에 정태는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감정이 얼굴에 스친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혹시나 해서 한마디 묻는데, 차 소협은 강호에 섬전도가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의 말에 시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자신의 비무광자와 같은 특이한 별호가 아닌 이상, 같은 별호를 지닌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특히, ‘섬전도’라는 별호를 지닌 강호인들을 한곳에 모으면, 족히 백은 훌쩍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매화표자(梅花漂子)의 검을 꺾었던 섬전도요.”
이번에는 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표자라 불렸던 인물은 하나였고, 그자를 이겼던 섬전도라면 한 명으로 좁혀졌으니깐.
“알겠소. 하지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마시오. 워낙 오래전 인물이라 하오문의 눈 밖으로 벗어났을 수도 있으니.”
하오문이 못 찾을 리 없었다.
그가 첩첩산중에 숨어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다만, 워낙 긴 기간 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터라, 그를 수면 위로 끄집어내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시후는 서류를 뒤지느라 정신없는 정태를 뒤로한 채 하오문을 빠져나왔다.
“뭐가 저렇게 바쁜 거지?”
불쑥 서찰을 건네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도 맘에 들지 않았다.
시후 자신은 나름, 하오문의 귀한 손님이 아니던가.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제갈려는 그런 정태를 이해하는 듯 두둔했다.
“지금 천이 오라버니가 차기 소가주로 낙점되면서, 남궁세가보다 다른 곳이 더 바쁠걸? 그중 가장 바쁠 거로 예상되는 곳을 꼽으라면 하오문을 첫손에 꼽을 수 있겠지.”
“응?”
“남궁세가가 벌어들이는 돈이 한두 푼이야?”
하오문은 무림 문파 이전에 ‘정보를 사고파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들은 돈의 흐름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부류라면, 남궁세가는 그 흐름을 이끌어 나가는 존재다.
그리고 미래의 흐름은 남궁천의 행보에 따라 바뀔 것이다.
여태까지는 남궁반이 가주로 올랐을 경우만을 생각했을 테니, 지금이라도 그 자리에 남궁천을 넣고 열심히 주판을 튕겨 봐야 할 것이었다.
하오문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따져봐야 할 테니깐.
“그보다, 섬전도는 누구야? 십오 년 전 사람이면 네가 알 법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갈려가 다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에 시후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남궁세가로 걸음을 돌렸다.
아직 확실치도 않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으니깐.
다만, 그로 인해 제갈려에게 시달리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런 거 보면 정말 신비주의가 따로 없다니깐? 아니지, 신비주의가 아니라 독불장군이지. 뭐 하나 제대로 말도 안 해 주면서 제 할 말만 하고, 또······.”
귓가에 말을 때려 박는 듯한 제갈려의 잔소리를 흘려넘기며, 두 사람은 남궁세가로 돌아왔다.
시후는 방으로 돌아간 뒤 문을 꼭 닫고, 하오문에서 건네받은 서찰 뒷부분을 확인했다.
흑련회의 꼬리를 붙잡긴 했지만, 아쉽게도 당장에 성과를 내기엔 어려울 듯 보인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신강 쪽과 연관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성 내용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렴풋이나마 마교가 얽혀 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렇다면 속도가 붙겠지.”
다만, 그 속도는 개방의 희생으로 이뤄질 것이다.
시후는 개방을 떠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그들에 관한 기억의 대부분은 시후를 골탕 먹였던 것밖에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골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단순히 먹을 걸 뺏겼다고 싫어한다니, 다섯 살 난 어린아이도 비웃을 일이었다.
사실은, 도움을 받은 게 훨씬 많았다.
추나행의 성격을 이용해 파양도를 감시케 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생각을 이어가던 시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 * *
명나라의 지방은 부(府), 주(州), 현(縣)으로 나뉜다.
일전에 영무제가 북방 토벌 이전에 시후에게 내리려 했던 게 바로 지주의 자리였다.
성공적으로 북방 토벌을 마쳤을 때 관직을 원했다면, 그 위인 지부(知府)의 위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시후가 도착한 개봉(開封)은 그 ‘부’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천하의 요회(要會)’라 불리는 개봉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였다.
전국시대의 위(魏)나라를 비롯해 오대의 양(梁), 북송(北宋), 금(金) 등 여러 왕조의 도읍을 지낸 곳이었다.
과거에 비해 다소 위세를 잃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여전히 물자 유통의 중심지로서 하루에도 수천의 인파가 드나들었다.
“뒤로 안 밀려나게 조심해!”
세간의 소문은 결코 장난삼아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넓은 대로는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쉽사리 걸음을 옮기기 힘들 정도였으니깐.
그나마도 시후가 창이라는 대단히 눈에 띄는 병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거구의 말을 끌고 있다는 점이 더해졌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애 데리고는 못 올 곳이네. 미아 되기에 십상이야.”
“그래서 개봉에 거지가 많나?”
제갈려의 신박한 헛소리에 시후는 침묵을 지켰다.
대답했다간 똑같은 인간이 될 거 같았으니깐.
나아가다 보니 주변 인파가 조금 줄어듦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시후의 코끝에 묘한 냄새가 스쳤다.
결코,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뭔가 음식 삭히는 냄새 같기도 했지만, 분명한 건 몸에 이로운 음식 같지는 않았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확신이 들었다.
그보다 백 보가량 더 나아가자, 음식 삭히는 냄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가 맞나보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보다 바닥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자들이 더 많아졌다.
거지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거지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방에 거지가 즐비했다.
“으······.”
제갈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자, 어느 거지가 자신의 배를 손톱으로 긁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까진 괜찮다.
문제는 손톱이 지나간 자리였다.
그의 손길에 살이 움푹 파여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때를 긁어낸 부위는 맨살이 드러났고, 긁지 않은 곳은 여전히 때로 뒤덮혀 있었다.
사흘을 굶었다고 해도 식욕이 떨어질 그 광경에 제갈려와 시후는 눈을 돌렸다.
하지만, 어디를 바라봐도 거지투성이였기에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시후는 그들 중 그나마 가장 깔끔해 보이는 거지에게 다가갔다.
그의 허리춤에는 매듭 세 개가 매여져 있었다.
“추나행 장로는 어디에 있죠?”
“댁은 뉘신데 장로님을 찾으쇼?”
“개봉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선이 따라붙던데 모른 척하지 말죠.”
시후의 말에 거지는 가을 들판에 펼쳐진 누런 곡식보다도 더욱 누런 이를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말없이 골목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오라는 건지, 아니면 기다리란 건지 말이 없었지만, 눈앞에 데려다 줄 일은 없을 테니 따라감이 옳았다.
대로에 비해 좁을 뿐이지, 길은 제법 넓었다.
마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골목에 골목으로 들어가자 점차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촘촘한 길이 이어졌다.
점점 말을 끌고 가기에 버거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길이 없다.
아니, 사방이 길이었다.
곳곳에 지어진 움막 사이로 지나면 그곳이 길이니 말이다.
“홍수로 집이 싹 쓸리고 나면, 이런 곳에 우리가 자리 잡는 거지. 언제 집이 쓸려나갈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빈터가 되어 버리거든.”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면 중간중간 흙을 비집고 나온 깨진 기와도 보이고, 집의 흔적을 알리는 주춧돌도 몇 개 남아 있었다.
“저기 끝이요. 대충 가서 부르면 나오실 테니 가 보시구려.”
“난 안 갈래.”
제갈려의 단호한 목소리에 시후는 말 고삐를 넘겨 주었다.
비위가 약한 그녀가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했다.
이 앞은 후각을 포기해야만 갈 수 있는 험난한 지대였다.
시후는 아침을 안 먹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삼결 제자가 가리킨 곳으로 나아갔다.
“추 장로님! 추나행 장로님!”
최대한 짧게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생각으로 목청이 터질 듯 그를 불렀다.
곧 시후가 생각했던 곳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움막에서 그가 나왔다.
남궁미 때문에 깔끔히 씻고 다녔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과거의 더러움의 대명사라 불리는 개방 장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뒤였다.
“응?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만, 네가 개봉에는 웬일이더냐?”
“볼일이 있으니깐 들렸죠. 개방에 전해 줄 이야기도 있고요.”
“헹, 볼일은 무슨. 하오문이나 찾아가거라.”
“진짜 찾아가요?”
시후가 아쉬울 게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추나행의 몸이 움찔거렸다.
분명 부탁을 하러 온 것이 분명한데, 세게 나오니깐 그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그놈, 성질머리하고는.”
추나행은 투덜거리며 움막으로 들어가더니, 안에서 통나무 두 개를 들고 나왔다.
하나는 시후에게 던져 주고, 하나를 제 궁둥이 밑에 깔고 앉았다.
“무슨 이야긴데 이리도 자신만만한 게야?”
“사천에서 생긴 일······ 의 연장선이랄까요?”
추나행은 흥미가 동하는 듯 눈을 반짝였다.
다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낸다고 생각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크흠, 조금 흥미롭긴 하다만······. 일단 들어는 보지.”
“가장 먼저······.”
하지만, 시후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곳은 개방 총타였다.
시후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추나행을 찾은 목소리는,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못 들을 리가 없었다.
그 말은 곧, 시선이 쏠렸다는 말이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으면 하는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가를 돌리자, 거무튀튀한 흑죽(黑竹)이 눈에 들어왔다.
개방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이름을 이어 온 타구봉(打狗棒)이었다.
그리고 그 타구봉을 잡은 인물은 이곳에서 가장 기침 소리가 큰 인물이었다.
그를 확인한 추나행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주.”
- 153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