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137화 (119/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37화 숨기려 하는 것 (1)

푸르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푸르다.

넋 놓고 보고 있노라면 짙은 녹음의 바다에 빠질 것만 같았다.

다만, 감상에 젖기에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며칠째 지겹도록 봐서 익숙하기도 했지만, 높은 습도와 수시로 날아드는 정체 모를 날벌레는 짜증을 유발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제갈려의 목소리엔 짜증이 가득했다.

질문에 대한 답은 가장 선두에 있는 당패철만 알았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춰 제갈려를 힐끔 바라보더니, 피식 웃어 주곤 걸음을 재촉했다.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참거라.”

“한 시진 전에도 거의 다 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반 시진은커녕 한 식경도 안 지났는데 엄살은.”

“아, 죽겠다고요······.”

“사람 쉽게 안 죽는다. 그리고 여기서 노숙할 게 아니라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편이 좋을 텐데? 이곳은 독각사(毒角蛇)가 출몰하는 지역이라,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건······.”

가장 후미에 있던 제갈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패철의 등에 바짝 붙었다.

그리 나이 차도 많이 나지 않았지만, 당패철은 아주 능수능란하게 제갈려를 요리했다.

덕분에 시후와 남궁천은 한결 편했다.

어르고 달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거의 다 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막 능선을 넘자 계단식으로 개간한 밭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를 숙여 작물을 수확하는 이도 있었고, 낯선 이의 등장에 경계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제 할 일에 집중했다.

그들을 지나 좀 더 걸으니, 자연과 하나가 된 집이 하나둘 보였다.

집들을 둘러보는 사이, 언덕 중간쯤에 있는 집에서 짙은 녹의를 입은 사내가 나왔다.

“추양!”

당패철이 목소리 높여 부르자, 녹의를 입은 사내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천히 언덕을 내려왔다.

“패철,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리고······.”

추양이라 불린 사내는 뒤따르는 세 사람을 흘기며 말끝을 흐렸다.

남궁천이 앞으로 나서며 밝히려 했지만, 그보단 당패철이 조금 더 빨랐다.

“이쪽은 삼절공자라 불리는 남궁천이고, 요 까탈스러워 보이는 녀석은 제갈세가의 골칫거리지.”

“이번에도 집을 나왔나 보지?”

“허락받고 나온 거예요.”

“내가 듣기론 일전에도······ 뭐, 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추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하자, 제갈려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과거에 집을 나온 뒤 거짓말을 하고 돌아다녔던 전력이 있었으니깐.

그는 뒤이어 시후를 쳐다봤다.

“차 소협일세.”

“다짜고짜 성만 말하면 내가 어찌······.”

추양은 말끝을 흐리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후, 환하게 웃으며 시후의 어깨를 두들겼다.

“으허허, 자네가 그 친구로군? 이야기는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전해 들었지.”

당가에서 시후의 위치는 신의와의 징검다리로 인해 ‘귀한 손님’ 그 이상이었다.

반겨 주는 온도 차 때문일까, 제갈려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추양은 한참이나 시후의 어깨를 두들기더니, 아직 못 들은 이야기가 있다는 걸 깨닫곤 당패철을 바라봤다.

“조숙부께서 부탁하신 약초와 독초에 관한 정보를 추 소협이 제공하지 않았나? 지금 문제가 생겼으니, 혹 도울 일이 있다면 손을 보태고 싶다고 하여 같이 오게 되었네.”

“손을 보탤 것도 없어. 독왕문에서 대화에 응하지 않으니, 정면으로······.”

“추양!”

당패철이 낮게 소리치자 추양은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이곳은 사천이 아니었다.

똥개도 제집 앞에선 절반을 먹고 들어간다고 했다.

운남은 독왕문의 앞마당이니, 말을 조심함이 옳았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는 게 좋겠네.”

* * *

이번 독왕문과의 마찰로 당가에서 운남으로 온 인원은 총 서른이었다.

고작 서른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당가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죄다 끌어모아도 삼백 언저리쯤.

게다가 이번에 온 인원들 가운데는 당가팔수(唐家八手)까지 포함되어 있었기에, 당가 전력의 이 할에 달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제 종패 숙질께서 직접 독왕문의 문을 두드렸음에도 만나 주지 않았어.”

추양의 말에 찻잔으로 뻗어가던 당패철의 손이 멈췄다.

종패는 당가일수(唐家一手)였다.

당가일수는 나머지 일곱과 달랐다.

배분부터 같을 수 없었다.

가주인 당모준과 같으니까.

“종패 숙질이 많이 참으셨군.”

“그래서 내일 죄다 이끌고 독왕문을 찾아가려고.”

“누구의 의견인지는 안 들어봐도 뻔하겠군.”

그의 말에 추양은 잇몸을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당패철의 입에선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주 박살을 낼 생각인가 보군.”

“흥, 놈들이 실종자 조사에 협조하지 않는 이유야 뻔하지.”

“손을 쓰는 건, 증거를 확보한 다음에 해도 무방하네.”

“증거는 무슨! 다 실토하게 만들면 될 것을.”

다소 과격한 추양의 언행에 당패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마를 짚었다.

“우리는 독왕문처럼 정사지간이 아니다.”

“그래, 우린 정파지. 그런데 우릴 견제하고자 무고한 사람을 죽인 저들을 이대로 놔둔다면, 우리가 과연 정파라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깐 증거를 확보한 뒤에 죄를 물어야지.”

“자백만큼 좋은 증거는 없는 법.”

“추양!”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졸지에 시후를 비롯한 세 사람은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어, 눈동자만 굴렸다.

“실종자가 된 사람의 사체를 찾을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령 찾았다고 한들 사흔을 남겨 놨을 리는 더더욱 없고!”

“그런 공격적인 태도로는 독왕문과의 갈등의 불씨가 더욱 커질 뿐이야.”

“갈등? 사람이 죽었는데 그깟 갈등이 중요한가?”

“조금 차분히 그들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는 말이네. 내일 독왕문을 죄다 찾아가는 건 무력 싸움으로 번질 여지가 크니, 종패 숙질에게 다시 대화를 해 보자고 말함이 어떤가?”

당패철의 말에 추양은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대화? 좋지. 만나주지도 않는 놈들과 무슨 대화를 나눌까? 먼저 서신이라도 날려야 하나?”

“비아냥거리지 말게. 지금 독왕문과 싸우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네. 하루빨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당패철의 말을 끊으며 추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송 씨의 안사람이 두 달 전에 넷째를 낳은 건 알고 있나? 젖먹이를 데리고 일을 나갈 수 있을까? 아니지! 당장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인데, 가장 큰 애는 아직 여덟 살이야! 여덟 살짜리 아이가 졸지에 가장이 되어 버렸어! 패철 자네가 송 씨의 안사람에게 가서 말해 보게! 독왕문과 이야기에 진척이 없으니, 송 씨가 어디서 죽어 나갔는지 당가에선 알아봐 줄 수가 없다고!”

그의 말에 당패철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추양은 감정이 격해진 듯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방에는 정적이 가득했다.

* * *

다음날, 추양을 비롯한 당가 인원은 모조리 독왕문으로 향했다.

시후 또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당패철이 극구 만류했지만, 시후를 말릴 순 없었다.

“얼마나 높은지 보이질 않네.”

“그리 높진 않다. 가장 높은 봉우리도 고작 칠백 장도 되지 않는 곳이니 말이다.”

제갈려의 중얼거림에 종패가 대답해 줬다.

독왕문이 자리한 애뢰산(哀雷山)은 초입부터 산세가 대단히 험했다.

그리고 사시사철 구름에 휩싸여 있기에 모르고 본다면 제갈려와 같은 착각을 하기 쉬웠다.

“머리 떨어지지 말거라. 독왕문이 여기 자리 잡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

제갈려는 어미의 뒤를 따르는 새끼 오리처럼, 종패의 뒤를 바짝 붙어 걸었다.

초입에서 고작 백 장쯤 올라갔을까.

짙은 안개 너머로 어렴풋이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만, 어찌나 안개가 짙었는지 코앞에 가서야 독왕문이라는 현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종패는 현판을 쓱 훑더니 뒤돌아 추양을 향해 손짓했다.

추양은 지체없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쩌억!!

다섯 치 두께는 되어 보이는 현판이 반으로 조각났다.

현판이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종패는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앙!!

굳건히 입구를 지키던 문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조용한 산중에 두 차례 굉음이 울려 퍼졌으니,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독왕문 인원이라면 죄다 들었을 것이다.

숨 다섯 번 정도를 내쉬는 동안, 무려 일흔 명이라는 인원이 모였다.

그중 까무잡잡한 얼굴에 염소수염을 한 남자는 넋이 나간 듯, 박살 난 현판과 문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 이 무슨 짓이오!”

“인제 보니 우 총관을 부르는 방법은 현판과 문을 부수는 것이었군.”

종패는 바닥을 나뒹구는 독왕문의 현판을 발로 짓밟으며 나섰다.

우 총관이라 불린 자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당종패!”

우 총관이 거침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당가 무인들이 줄기차게 살기를 뿜어냈다.

그 사이, 독왕문의 숫자는 백을 넘겼다.

삼십 대 백의 대치.

하지만, 기세는 당가 쪽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긴말할 거 있나? 대화에 응하지 않았으니 힘의 대화를 나누는 수밖에.”

“건방진! 아무리 당가의 이름이 드높다고 한들 이곳은 독왕문이다! 그 이름이 통하리라 생각하는가!”

“통하는 것 같은데?”

추양이 이죽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분명 독왕문 문도들은 싸우기도 전부터 기세에서 꺾인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우 총관의 눈빛에선 걱정이라곤 읽을 수 없었다.

“현판과 문을 부수며 들이닥친 것도 모자라 시비를 걸다니,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럼 우리가 손해인데? 우리는 실종된 다섯 명의 채집꾼들을 알아낼 때까진, 네놈들을 살려 둘 생각이거든. 아, 그사이에 죽여 달라고 노래를 부르면 죽여 줄 의향은 있어. 그 방식이 깔끔하다곤 장담 못 하지만 말이야.”

추양의 말을 시작으로 당가팔수를 비롯한 인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방진을 이뤘다.

우 총관의 손짓에 독왕문 또한 주변을 에워싸며 포위했다.

양쪽은 독을 사용하는 문파긴 했지만,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아는지라 이런 싸움에서 독을 쓰긴 어려웠다.

어느 정도 대책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지만, 독을 사용한다는 건 정말 어느 한쪽이 멸문할 때까지 싸우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깐.

시후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흑련회의 사람이 누구일지 샅샅이 훑었다.

당장이라도 선혈이 낭자할 것만 같았던 분위기와 달리, 두 무리는 한참 동안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원하는 건 간단하다. 우리와 계약했던 채집꾼들이 왜 죄다 애뢰산에서 실종되었는지에 관한 조사. 그 조사를 원한다.”

종패는 추양보다 현실적이었다.

독왕문에서 정말 그들을 죽였다고 한들, 제 입으로 실토할 리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애뢰산에서 실종된 그들의 조사를 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하려는 것이었다.

다만, 협조를 구하는 방식이 과격하다 못해 파격적이었지만.

“그딴 무지렁이들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그도 아니면, 정말 이 자리에서 끝을 보도록 하자.”

종패는 품에 손을 넣더니 얇은 수투를 꺼내 들었다.

그를 따라 당가 무인 전원이 손에 수투를 꼈다.

우 총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독을 사용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종패도 그들을 심문하는 대신 한발 물러서 자체적인 조사를 하겠노라 했으니, 이 자리에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할 게 아니라면 우 총관도 물러섬이 옳았다.

“······ 나흘. 나흘 동안은 애뢰산에 오르는 걸 허락하지만, 그사이에 어떠한 단서도 못 찾으면 당가의 현판 또한 박살 낼 것이다.”

[돌발 임무 ‘숨기려 하는 것’이 발동합니다.]

- 138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