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23화 변화 (3)
남궁천의 발끝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의 검이 수평으로 휘둘러졌다.
단순한 횡 베기.
하지만, 공격이 단순하다면 방어 또한 단순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궁천의 진짜 공격은 최초 검과 창이 맞닿는 순간부터다.
바로 지금.
남궁천이 손목을 교묘하게 비틀어 자운유성창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주어진 선택지는 다섯 개.
시후는 그중 남궁천이 가장 좋아하는 선택지를 쥐여 줬다.
창을 빼내는 대신, 되려 창을 검과 얽히게 두었다.
그 순간, 남궁천의 검에 주저하는 기색이 어렸다.
찰나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짧은 시간.
하지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쓰이는 법.
그 찰나의 틈은 엉켜 들었던 시후의 자운유성창이 자유를 되찾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공격권까지도.
“월광침애(月光沈崖)!”
좁고 깊은 계곡으로 스며든 달빛은 필연적으로, 이리저리 튀어나온 돌부리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계곡 가장 낮은 곳에 다다른 달빛은 한줄기 선과 다르지 않았다.
월광침애 또한 그러했다.
허공에 단 한줄기의 궤적만을 허락했으니깐.
즉, 거창한 설명과 달리, 위에서 아래로 휘두른 것에 불과했다.
남궁천의 노림수와 같았다.
단순한 공격에 단순한 방어.
시후의 의도를 파악한 남궁천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창천일로!”
허공에서 선과 선이 맞닿았다.
한걸음 반과 두 걸음.
각기 시후와 남궁천이 뒤로 물러난 거리였다.
시후가 먼저 공세를 취한 탓일까.
근소한 차이지만 앞서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다시금 선공권을 가져다 주었다.
초식은 없었다.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창을 아래로 비스듬히 내질렀다.
“흡!”
남궁천은 검으로 창을 휘감는 대신 단순히 아래로 내리쳤다.
덕분에 자운유성창의 창날을 그의 허벅지 대신 바닥으로 향했다.
그 순간, 시후는 앞에 내디딘 왼발을 축 삼아 몸을 빙글 돌렸다.
단지 제자리에서 돌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뒤에 있던 오른발이 앞으로 향했을 때, 남궁천은 눈앞에 다다른 창준을 막아내야만 했다.
이것이 창의 장점이다.
창은 단순히 한쪽만 신경 써서 될 게 아니다.
창날도 마찬가지지만, 뒤에 달린 창준 또한 치명적인 일격을 먹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후는 한번 잡은 공세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남궁천을 더욱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자운유성창과 간장검이 허공에서 맞닿아 떨어지길 수십 차례.
남궁천은 잃어버린 공세를 되찾아 올 수 있었다.
이어지는 역습.
“하앗!”
남궁천은 짧은 기합과 함께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마저 베어냈다.
이후, 둘은 일진일퇴를 반복하며 손을 섞었지만, 어느 한쪽이 승기를 붙잡진 못했다.
손을 섞은 지 삼백여 초가 지났을 때, 남궁천이 크게 검을 휘둘러 시후를 떨쳐냈다.
시후는 재차 달려들기 위해 자세를 했지만, 남궁천은 검면이 보이도록 들어 올렸다.
이만 비무를 마치자는 신호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시후도 자운유성창을 거두며 내공을 갈무리했다.
그에 남궁천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힘 땀을 닦아 내며 납검했다.
“후······. 내공이 거의 바닥났군”
시후도 내공을 점검해 보았다.
절반은커녕 삼분지 일도 쓰지 않았다.
이전에도 남궁천과 비무하면 내공이 조금 남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많이 남진 않았다.
6성에 다다른 일원신공은 이전보다 2할 정도 힘이 더 실렸고, 회복되는 속도 또한 그와 비슷한 폭으로 상승했다.
“차 아우는 점차 괴물이 되어 가는군.”
“에이, 괴물이라뇨.”
“소림의 견적도 자네보다 내공이 적을걸세. 게다가 내공의 정순함 또한 지고하니, 차 아우의 무공이 완성된다면 가히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을 걸세.”
남궁천은 낯부끄러운 칭찬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시후는 누가 들을세라, 그의 등을 떠밀어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 * *
북경에 도착한 지 정확히 스무하루째 되는 날이며, 하오문에서 보낸 정보책 겸 상단이 떠난 지 스무날째 되는 날.
하오문에서 연락이 왔다.
덕분에 시후는 아침도 먹지 못한 채 급히 하오문 총타를 찾았다.
시후는 입구를 지키는 노인을 지나 계단으로 내려갔지만, 뒤에서 들려오던 발소리는 돌연 멈췄다.
“두 사람은 여기.”
함께 찾아온 남궁천과 제갈려는 노인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 모습을 본 시후는 인상을 팍 쓰며 뒤돌아 올라왔다.
“최소한 천이 형님은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번 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죠.”
시후는 노인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순간적으로 노인의 얼굴에 불쾌함이 어렸다.
하지만, 시후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하오문은 남궁천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깐.
노인은 실랑이할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픽 돌렸다.
시후는 어서 남궁천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덕분에 제갈려는 울상을 지었다.
시후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재차 목소리를 내리깔며 등을 돌린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게다가 제갈려 또한 저와 같이 자금성의 일을 처리하며 황제의 신임을······.”
“썩 내려가거라!”
노인은 시후의 목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은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갈려는 노인이 변심할세라 후다닥 달려왔다.
그리곤 입구에서 제법 멀어진 다음에야 노인의 험담을 해댔다.
물론, 지극히 작은 목소리로.
통로 끝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통안파파가 자리에 일어서 있었다.
“어?”
제갈려가 버릇없이 통안파파에게 삿대질했다.
매가 있었다.
아라사로 떠나는 길에 시후 일행을 지독하게 따라다녔던 녀석.
“하오문에 둘밖에 없는 해동청이네.”
“보통은 ‘하나밖에 없는’이라고 하지 않아요?”
“하나보단 둘이 좋은 법이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제갈려는 통안파파의 진지한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시후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보다, 그가 들고 있는 종이에 관심이 쏠렸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일까.
통안파파는 다가오라 손짓했다.
“당연하겠지만, 여기서 들은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발설해선 안 된다.”
시후는 황제에게도 안 되느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통안파파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기에 장난은 접어 두었다.
다들 침묵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통안파파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얼마나 충격적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짐작은 산산이 깨졌다.
“쿠빌라이가 죽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시후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원신공을 얻었을 때를 제외하면 이보다 놀랐던 적이 없었다.
게임의 스토리에서 쿠빌라이는 영무제가 사망하고 명진제가 즉위할 때까지 살아서 북방을 괴롭히는 역할이었다.
물론, 명진제가 즉위하고 가장 먼저 실행한 북방토벌 삼분지계(北方討伐 三分之計)라는 계획에 죽을 운명이었지만.
문제는 그건 한참 후에 일어날 일이었다.
“확실한 정보입니까?”
“그렇진 않네. 그의 죽음을 아이들이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니고, 그 이야기를 확실히 들은 건 아니니 말일세.”
“아니, 그게 무슨······.”
시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따지려 했지만, 통안파파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조금의 손해를 감수할 생각으로 거래를 해서 그런지, 저쪽에서 반응이 상당히 좋았나 보더군. 아이들은 그들에게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그 풍습에 따라 술을 미친 듯이 먹었다고 하네.”
“거기서 들었겠군요.”
“정확히는 쿠빌라이를 지칭하진 않았네만, 그들이 취해서 나누던 대화에서 그와 흡사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네.”
“그보다 어떻게 죽였는지가 의문입니다. 저번에 직접 대면했을 때를 생각하면 자연사는 아닌 듯합니다만······.”
남궁천이 끼어들면 말꼬리를 흐렸다.
그에 통안파파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한결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에 의문이 들 무렵,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수수께끼와 같은 알쏭달쏭한 말에 제갈려와 남궁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시후의 머릿속에는 스쳐 지나가는 정보가 있었다.
두 달도 더 전에 이곳에서 들었던, 한 인물에 관해서.
“망(忘).”
시후의 대답에 통안파파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띠었다.
남궁천과 제갈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지만, 시후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이 사실을 영무제에게 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열에 아홉은 구심점 중 하나가 사라진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북으로 진격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쿠빌라이는 급진파의 수장이었을 뿐이지, 칸은 아니었다.
되려 영무제가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진격한다면, 저들이 칸을 선출해서 하나로 뭉칠지도 몰랐다.
“차 아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시후의 얼굴이 구겨진 채로 펴질 줄 모르자, 남궁천이 의아한 기색을 띠며 물었다.
“그게······.”
이 사실을 황제에게 전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이야기들을 논리정연하게 말했다.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세 사람의 입술은 자린고비의 전낭처럼 벌어질 줄을 몰랐다.
통안파파는 장고 끝에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알려야 하네.”
“전 알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뭐?”
통안파파가 기억을 더듬듯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능성을 이야기 한 것이지, 이 정보를 황제에게 전하지 않겠노라 말하진 않았으니깐.
통안파파의 매섭던 시선이 한결 누그러졌다.
“이 정보를 쥐여줌으로써 하오문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전해야죠.”
“전쟁이 일어날까 봐 망설이는 건가?”
“어차피 지는 전쟁일 테니깐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행여 황제의 앞에서는 그 말을 하지 않기를 바라네.”
통안파파의 충고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에서 진다고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이보다 공을 몇 배로 더 쌓는다고 해도, 절대로 해선 안 될 말이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는 발언일 테니깐.
* * *
“사실인가!?”
영무제는 이전에 본 적 없던 격한 반응을 보이며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후는 그와 상반되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에 영무제의 반응은 시후의 예상을 웃돌았다.
옥좌에서 일어선 것으로 모자라서 시후의 곁에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하오문이라 했던가? 천금과도 같은 정보를 물어 왔으니······ 아니지. 여봐라!”
영무제는 환관을 부르더니, 한술 더 떠서 통안파파를 입궐토록 명했다.
실로 이런 파격이 없었다.
“상서와 시랑 그리고 도독과 동지를 들라 하여라!”
뒤이어 병부와 오군도독부의 핵심 인물 넷을 모조리 소환하는 것으로 보아, 예상대로 영무제를 진정시키긴 글러 먹은 것 같았다.
선택지는 하나로 좁혀졌다.
영무제는 이어 명진제까지 불러오라 말하곤,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지 제자리를 맴돌았다.
시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
“폐하, 청이 있습니다.”
“오오, 그래 말하여라. 재물을 원하거든 금 열 관을 줄 것이고, 관직을 원한다면 적당한 자리를 내어주마.”
“관직을 원합니다.”
“좋다. 공을 생각하면 현령은 부족하고 지부는 과하니, 관리하기 쉬운 적당한 직예주(直隸州) 자리를 내어주마.”
이 또한 파격이었다.
직예주를 내어준다는 건, 지주(知州)로 임명한다는 것과 같았다.
지주는 정오품의 관직이다.
구품관입법에 의거한다면 딱 중간의 위치나, 품계가 낮을수록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는 걸 고려해야 했다.
“제가 원하는 관직은 그쪽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는 시후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시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명진제의 눈을 마주했다.
쿠빌라이가 살아 있다면 전쟁은 져도 상관없지만, 그가 죽은 이상 무조건 이겨야 했다.
“이번 북방 토벌에 힘을 실을 수 있는 자리를 원합니다.”
흑련회에 먹히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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