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21화 변화 (1)
[특수 임무 ‘초원의 바람’을 완료하였습니다.]
애초에 실패하리라 생각했던 임무였지만, 남궁천이 만들어 낸 변수가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쫓겨(?)난 덕분에 초현 공주를 무사히 아라사까지 데려다줄 수 있었다.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여정을 함께한 초현 공주는 허리를 깊게 숙여 감사를 표하곤, 마중 나온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후는 기지개를 쭉 켜며 남궁천에게 다가갔다.
“우린 어쩌죠?”
“당분간 눈치를 살펴야겠네.”
“하긴, 지금 돌아가면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겠죠?”
“골치 아프기만 하면 다행이겠지.”
남궁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제갈려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이야기예요?”
시후와 남궁천은 게르에서 들었던 대화를 일절 알려 주지 않았다.
알려 준다면 중환은 당장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할 게 분명했으니깐.
동의하지 않았다간 밤에 몰래 보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아라사까지 도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위 호위는 초현 공주님이 혼례를 치르는 것까지 지켜보고 올 테니 문제없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여기서 저들의 도읍까지 꼬박 열흘은 걸린다고 했으니 말일세. 돌아오는 걸 생각한다면 족히 한 달은 더 걸릴 걸세.”
“한 달이면 충분하겠네요.”
“아, 무슨 이야기 하냐고요!”
대화에 끼워 주지 않자 제갈려가 버럭 역정을 냈다.
시후는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을 회피했기에, 제갈려의 시선은 자연적으로 남궁천에게 쏠렸다.
그 표독스러운 시선에 남궁천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게르에서 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제갈려의 얼굴이 굳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게 사실이면 당장 내려가서 알려야 하잖아요!”
“어떻게?”
“어떻게라니? 빨리 말을 타고 내려가서······.”
제갈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상황을 인지한 것이다.
내려가다 보면 그들과 조우할 텐데, 마주치면 어떻게 될지는 자명하다.
그들의 땅을 밟으며 돌아갈 순 없었다.
제갈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시후는 고개를 돌려 동쪽을 바라봤다.
“괜히 빨리 내려가다가 마주쳐 휘말리느니, 차라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동쪽으로 돌아서 가는 편이 좋겠죠?”
“내 생각도 같네. 저들은 남하하고 있을 테니 동으로 쭉 가다가 길림으로 들어가면 될 테니 말일세.”
“길림까지······. 그러면 요녕에서 배를 타죠.”
“그러는 게 좋겠군. 안 그래도 지금 엉덩이가 욱신거리는데, 거기까지 가면 버텨 낼 재간이 없을 것 같으니.”
둘의 대화를 들으며 제갈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태연한 대화였으니깐.
“걱정도 안 돼?”
“걱정할 필요가 없어. 네 머리라면 왜 그런진 차분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시후의 추켜세우는 말에 혹한 것인지 몰라도, 제갈려는 입을 꾹 닫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헛돈을 날린 게 아니니 다행이네요.”
시후의 말에 남궁천은 빙긋 웃었다.
곡식을 가득 실었던 짐 마차는 타이차무가 가져갔다.
물론, 그 대가로 받은 질 좋은 가죽과 푹신푹신한 털들을 받았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궁천은 죄다 초현 공주에게 넘겼다.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타고 있는 말들만 끌고 가기도 벅찼으니깐.
그에 초현 공주는 나중에 중환을 돌려보내면서 보답하겠노라 약조했다.
이번 호위에서 남궁천의 공은 적지 않으니, 그 보답도 상당할 것이다.
“애초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으니 보답은 바라지도 않았네.”
“그럼 제가 받죠.”
“하하, 마음대로 하게나.”
“형님이 거기서 그러라고 하면 제가 뭐가 돼요?”
시후와 남궁천이 투덕거리는 사이, 한참을 고민하던 제갈려가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들었다.
“대비하고 있구나!”
“애초에 이쪽의 움직임이 수상쩍어서 아라사와 비밀리에 혈맹을 맺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모르겠어?”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아니, 알고 있다면 애초에 당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저쪽은 빠르게 못 뚫으면 장기전을 할 여력도 없으니 물러날 수밖에 없지. 설령 악착같이 덤비려고 할지라도, 그사이에 혈맹 맺은 아라사에서 힐끔거리면 저쪽은 움찔할 수밖에 없지.”
“그런데 저들이 아라사 쪽으로 눈을 돌리면?”
“그때쯤이면 가혹한 겨울이 지날 테고, 명에서 치고 나서기에 좋겠지. 작정하고 뒤를 노리면 저들은 차라리 가혹한 겨울이 오기만을 바랄걸?”
“차 아우, 훌륭한 식견이네.”
남궁천의 칭찬에 시후는 머리를 긁적였다.
일어날 사실들을 말한 것에 불과했다.
물론, 원래라면 죽었어야 할 초현 공주가 살아서 아라사에 도착했기에 달라질 가능성도 있었지만, 큰 틀은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낯뜨거운 칭찬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죠. 여기서 길림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넉넉잡아 열흘이면 가능할 거 같네.”
“어? 길림이 여기서 그렇게 멀어요?”
“대부분이 남으로 내려가긴 하겠지만, 최대한 안전하게 가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나.”
“열흘이라······. 그러면 식량이 빠듯하겠네요.”
“부족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남궁천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 옆구리에 묶어 둔 자루를 툭툭 건드렸다.
중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받아 낸 듯했다.
시후는 남궁천의 준비성에 감탄하며, 길어지는 그림자를 쫓아 동쪽으로 말을 내몰았다.
* * *
남궁천의 예상은 정확했다.
정확히 열흘이 되는 날 길림성에 도착했으니깐.
시후는 길림의 조그만 마을 송원(松原)에게 도착하자마자 하오문도를 찾아다녔다.
가구 숫자가 이백 호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기에 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역시 하오문이 뿌리내리지 않은 곳은 없다는 걸 증명하듯이 조그만 마을에도 하오문도는 있었다.
다만, 여느 대도시처럼 지부가 있는 건 아니었기에 송원의 유일한 객잔에 앉아 근황을 물었다.
노인에게 근 한 달간 중원에서 일어난 굵직굵직한 이야기를 들은 시후의 낯빛이 굳어졌다.
“그게 다예요?”
“응? 뭐가 더 필요한가?”
노인의 태연한 대꾸에 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노인이 했던 이야기 중에 시후가 듣고자 하는 내용은 없었다.
시후는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옆에 앉아 있던 남궁천이 팔을 붙잡으며 만류했다.
노인이 돈 몇 푼을 받고 떠나간 뒤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지키는 남궁천의 얼굴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물론, 시후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지?”
“이주는 더 지났죠.”
무엇인가를 도모하기엔 지극히 짧은 시간.
하지만, 쿠빌라이가 명을 치기에는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었다.
그들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니깐.
물론, 이 시기에 모일 수 있는 숫자는 아무리 많아야 오만 명이 한계일 것이다.
한 나라를 위협하기엔 극히 적은 숫자.
하지만, 하나하나가 뛰어난 전사이며 기마 궁사인 그들이라면, 단숨에 만리장성을 돌파하고 황제의 턱밑에 비수를 들이밀기에 충분했다.
물론, 황제가 방비하고 있을 테니 실패에 그쳤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닷새 전에는 소문이 돌았을 텐데······ 혹시 쉬쉬하고 있는 걸까요?”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보네. 나쁜 일도 아닌데 입을 닫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럼 왜 모르죠?”
“모르겠네. 여기가 운남이라면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만.”
길림에서 요녕을 건너뛰면 북경이다.
거리상 소식이 전해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아니, 북원의 습격을 막아 냈다면 관에서 공표했을 정도로 크나큰 경사였다.
“변두리다 보니 취급하는 정보의 질이 낮은 거 같군. 최소한 장춘까지 가야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 같네.”
“여기서 장춘으로 갈 바에는 차라리 심양으로 바로 가시죠.”
“그렇게 하세.”
장춘과 심양과의 거리는 큰 차이가 안 났기에 심양으로 방향을 잡았다.
문제는, 사흘이 걸려 도착한 심양에서도 그에 관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 * *
시후는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하오문 총타를 찾았다.
다소 늦은 시간이었기에 시후 홀로 찾아갈 예정이었지만, 남궁천은 물론이고 제갈려까지 따라붙었다.
문제는 제갈려였다. 남궁천이야 이전에 온 적이 있다지만, 제갈려는 처음인지라, 입구를 지키는 노인에게 허락을 구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제법 알려졌다곤 하나,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와서 허락을 구하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예의인가?”
“죄송합니다. 앞으론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이번까진 넘어가겠지만, 한 번 더 이렇게 무작정 사람을 데리고 온다면 자네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겠군.”
현재 하오문과는 적극적인 협력관계이다.
지대한 피해가 가지 않는 한, 적당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이.
이전에 시후가 물어다 준 양질의 정보 덕분이었지만, 남궁천에 이어 제갈려까지 데리고 오자 관계에 금이 살짝 갔다.
어차피 만족할 만한 정보를 제공한다면 다시 개선될 관계다.
하지만, 제갈려의 기를 꺾을 기회가 마련되었기에 시후는 짐직 화난 표정을 지으며 지하 통로를 걸었다.
제갈려는 그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다가 문에 다다르기 직전에야 시후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 미안해.”
“미안한 거 알면 제발 떼 좀 쓰지 마.”
“내가 이럴 줄 알았나······.”
제갈려는 고개를 떨군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죽은 모습이 안쓰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제갈려의 성격상 며칠 뒤면 내버려 둬도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당분간 이대로 두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황궁 대신 왜 이곳을 먼저 찾은 게냐?”
“문을 닫았으니깐요.”
“그 일을 보고하는 거라면, 성문이 닫혀 있어도 상관이 없지 않더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시후의 대답에 통안파파는 뭐가 좋은지 얼마 남지 않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오문을 먼저 찾아 줬으니, 제갈 아이를 데려온 걸 용서해 주마.”
“감사합니다!”
시후는 속으로 혀를 찼다.
힐끔 옆을 바라보니, 제갈려의 광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천할 듯 치솟아 있었다.
통안파파는 아쉬워하는 시후의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보다, 무사히 돌아온 걸 보니 성공했겠지?”
“그렇죠. 그런데 그 때문에 찾은 건 아니고요. 중간에 부족들을 만나가면서······.”
구덴 타이시에게서 활과 뿔 나팔을 받은 것부터 시작하여 쿠빌라이의 이야기까지 흘러가자, 통안파파는 한껏 긴장한 채 경청했다.
하지만, 그들이 명을 칠 것이란 것을 이야기하자 통안파파는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채 자리에서 퉁겨져 일어났다.
“당장 황궁으로 가지 않고!”
하지만, 곧바로 안색을 회복하곤 자리에 앉았다.
통안파파의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두뇌 회전 덕분에 시후는 말을 생략할 수 있었다.
“아니지. 근 한 달 전 이야기일 테니깐 의미가 없구나. 그걸 알아봐 달라는 말이더냐?”
“그렇죠.”
절대 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통안파파는 너무나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안이 아닌 듯하니, 네 부탁이 아니더라도 알아봐야겠구나.”
통안파파는 이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낯빛을 굳힌 채 천장에 매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구를 지키던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곧 통안파파가 자리를 비워 달라는 눈빛을 보냈기에 세 사람은 조용히 밖으로 나와야 했다.
“팽가로 찾아갈까요?”
제갈려가 화제를 돌릴 겸 슬쩍 물었다.
시후는 상관없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남궁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시간에 찾아가는 건 아무리 친분이 두텁다고 한들 실례일 테니, 객잔에서 하루를 지내고 명일 찾아가는 게 좋겠구나.”
“에이, 한밤중도 아닌걸요.”
보통 ‘한밤중’이라 말하는 건 자정을 넘긴 시간을 뜻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갈려가 무영묘적으로 활동하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녀로선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남궁천은 제갈려의 남다른 시간관념에 맞춰 줄 생각이 없다는 듯, 팽가의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122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