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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120화 (10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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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20화 가혹한 겨울의 땅 (3)

“더 안 붙네.”

제갈려의 심드렁한 말에 시후가 뒤를 돌아봤다.

시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첫날은 정확히 오십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뒤에 따라붙는 숫자는 늘어만 갔다.

도대체 왜 따라붙는 것이냐 물으려 다가가면, 시위에 화살을 거는 통에 묻지도 못했다.

원치 않는 꼬리를 달고 북으로 올라갈 뿐이었다.

“이 정도면 호위 아냐?”

“세상천지에 활을 겨누는 호위가 어딨어?”

“뭐, 어찌 되었든, 지켜 준다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제갈려의 남다른 관점에 시후는 고개를 저었다.

나흘이 된 지금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있었다.

오백이 훌쩍 넘었다.

저들 중 대단히 뛰어난 기세를 뿜어내는 인물도 있는 것으로 봐선, 어중이떠중이는 절대 아니었다.

초원의 근간이 되는 거대 열두 부족의 핵심 인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저기서 더 늘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게 전부인가 보네요?”

“여기서 더 붙나 붙지 않나 똑같지 않겠나?”

남궁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달관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승산은 없다.

하지만, 달아날 생각이라면 저들도 쉽게 붙잡진 못한다.

소지할 수 있는 화살은 한정되어 있기에, 화살을 다 막아 낸다면 도망칠 가능성은 열린다.

물론, 짐을 전부 다 버린 뒤에야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그런데 이대로 사흘만 더 가면 아라사의 국경 지대잖아요?”

“그렇지.”

“만약에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도, 전력으로 달리면 내일이면 도착할 수 있겠네요.”

제갈려의 말에 시후는 인상을 찌푸렸다.

긍정적으로 들리기 힘든 말이었으니깐.

아니나 다를까, 곁눈질로 초현 공주를 확인하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시후는 제갈려에게 눈을 부라림과 동시에 초현 공주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제갈려 또한 아주 눈치가 없진 않았기에, 실수를 깨닫곤 아차 싶었는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다만,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기에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시후는 주변을 살피다가 다시 초현 공주를 바라봤다.

“확실히 이 정도면······.”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저들이 한 번씩 접근할 때야 진법으로 숨겼지만, 계속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초현 공주를 숨길 방법은 없다.

어쩔 수 없이 남장을 해야 했다.

단, 단순히 남자처럼 옷을 입었다고 한들 미모를 숨길 수 없었다.

얼굴에 흙을 펴 바르고 그 위에 숯검정을 덧칠했다.

그런 뒤에야 미모를 죽일 수 있었다.

“어? 웬 또 새가······.”

주변을 살피는 능력은 아무래도 제갈려가 가장 뛰어난 듯했다.

시후가 고개를 들자 이제는 익숙해진 새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다들 금방 관심을 거뒀다.

오백이나 붙어 있는 상황에서 조금 더 붙는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었으니깐.

“어?”

다만, 조금이 아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일전의 본 적 없던 먼지구름이 피어났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따라오던 오백의 인원들도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마차를 멈춰라! 갑(甲) 자 대형으로 마차를 배치하라! 생문은 북!”

그 와중에 중환은 빠른 판단을 내렸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병사들답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마차로 방벽을 세웠다.

최소한 눈먼 화살에 맞아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현 공주는 공포에 질려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공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숫자가 많긴 하나, 못 뚫어낼 정도는 아닙니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물론, 실제로 뚫어낼 확신이 없더라도 공주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거짓이라도 늘어놔야 했다.

중환은 여전히 떨고 있는 초현 공주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는 마차 틈 사이로 다가오는 두 무리를 바라봤다.

마차로 방벽을 세워서일까.

놈들은 활을 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려, 일단 공주님과 같이 숨어 있어.”

“이 상황에서?”

“네가 손을 보탠다고 나아질 상황은 아니잖아.”

제갈려에겐 진법이라는 가장 든든한 벽이 있으니, 차라리 초현 공주를 안전하게 지켜 주는 게 나았다.

제갈려는 뭐라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시간이 촉박함을 모르진 않는지 곧바로 초현 공주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그 사이, 발바닥을 통해 진동이 느껴졌다.

먼저 도달하는 쪽은 뒤에서 따르던 녀석들이다.

시후는 좌측에 서 있는 남궁천을 바라봤다.

둘이라면 제갈려까지 살리겠지만, 하나를 살려야 한다면 남궁천을 살리겠노라 생각했다.

시후는 자운유성창을 꽉 움켜쥐며 결의를 다졌다.

놈들이 이십 장 반경까지 들어왔다.

시후가 스멀스멀 내공을 끌어올리자 금빛 휘광이 몸을 감쌌다.

앞으로 십 장.

짧게 숨을 내뱉으며 앞으로 창을 들이밀었다.

“와······ 라?”

거리감이 이상한 것일까.

놈들은 멈춰선 마차를 지나쳤다.

지나친 녀석들이 향하는 곳은 전방에서 달려오는 무리였다.

순간적으로 제갈려가 호위 아니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두 무리는 달리는 속도를 줄이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제갈려가 진법을 빠져나와 물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답하진 못했다.

마주한 두 무리의 관계에 관해선 아무도 모르니 말이다.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저들이 왜 마주하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할 텐데, 도통 이유를 모르니 섣불리 짐작하기도 어렵군요.”

“막아 주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정말로 그런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애초에 말해 줬을 거 같습니다.”

남궁천은 중환의 질문에 헛된 희망을 심어 주기보단, 현실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중환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하지만, 분명한 건 뒤따르는 자들은 우리를 적대할 생각은 크게 없는 거 같습니다. 애초에 목적은 저들을 만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시후네 쪽으로 중간중간 시선을 주긴 했지만, 대치한 두 무리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는 못 느낄 수가 없었다.

“저들이 왜 이 자리까지 우리를 끌고 왔는지가 중요하겠네요.”

시후의 말에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단순히 앞에서 달렸을 뿐, 이곳으로 인도한 건 저들이니깐.

* * *

두 진영이 마주한 가운데, 거대한 게르가 세워졌다.

한평생 떠도는 유목민족답게 뭔가 골격이 갖춰지는가 싶더니, 족히 오십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거대한 게르가 순식간에 세워졌다.

그러나 천에 다다르는 인원을 수용하기엔 터무니없이 작은 크기였다.

하지만, 이들이 모인 목적을 생각한다면 굳이 게르에 다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 자리는 두 진영의 회담 장소였으니 말이다.

서로 의견이 갈리는 두 진영이 만난 만큼, 게르 주변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같은 유목민족인 그들끼리도 그러한데, 외인이라 할 수 있는 남궁천과 시후를 바라보는 시선은 오죽하랴.

“확실히 우리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거 같네요.”

시후는 쏟아지는 시선을 받아넘기며 낮게 속삭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북쪽에서 내려온 자들은 적의를 띄었고, 시후네를 뒤따라온 자들은 경계심이 가득했다.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오리 알 신세였다.

두 사람도 그들이 원해서 이곳을 찾은 건 아니었다.

타이차무.

북원의 거대한 열두 부족들 가운데 하나인 오르오드족의 족장이자, 명을 공격하자는 쿠발라이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은 여섯 부족의 구심점인 그가 이곳으로 불렀기에 온 것이었다.

“저 안에 그자도 있겠군.”

“아마도 그렇죠.”

“정말 이렇게 무기가 없이도 괜찮겠나?”

“목숨을 위협하면 칭기즈 칸의 후예가 무기도 들지 않는 자를 핍박하려 드냐고 윽박지르면 될 일이죠.”

시후의 말에 남궁천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분명 칸을 들먹인다면 건드리진 못할 것이다.

저들의 정신을 하나로 이어 주는 인물이니깐.

문제는 그 자리를 탈출하고 나서였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을 잘해야겠군.”

“언제는 말 못 했나요. 어깨 펴요.”

“이렇게 말인가?”

“에이, 아직 움츠러들었는데요?”

“하하, 여기서 더 폈다간 탈골될 것 같으니 봐 주게.”

남궁천은 긴장을 훌훌 털어냈는지 너스레를 떨며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 게르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천막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가자 수십 쌍의 시선이 내려꽂혔다.

시후는 좌우로 나뉘어 앉아 있는 그들을 번갈아 보다가 깨달았다.

누가 쿠빌라이인지 말이다.

“타이차무, 냄새나는 한인족 놈들을 이 자리에 부른 이유가 뭔가?”

틀렸다.

냄새가 난다면 쿠빌라이의 몸에서 날 게 분명했다.

물이 워낙 부족한 곳이다 보니, 제대로 씻지 못하니깐.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딴지를 걸어 봤자 백해무익했기에 시후는 입을 꾹 닫았다.

지금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할 때였다.

“쿠빌라이 자네는 한족은 죄다 자기 잇속만 챙기기 바쁜 놈들이라고 욕하지 않았나? 그런데 보게. 여기 이 한족은 배를 곪고 있는 우리 형제들을 위해 곡식을 가득 싣고 북으로 올라왔네.”

“그 또한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함이다!”

“타라후!”

쿠빌라이가 버럭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 행동을 예상한 듯 타이차무는 태연하게 누군가를 불렀다.

그 대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후와 남궁천의 눈썹이 살며시 모였다.

닷새 전 보았던 자였다.

남궁천의 얼굴이 밝아졌다.

“닷새 전, 저자는 제게 칸의 후예들을 위해 곡식과 털을 교환하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들에게는 식량만 있을 뿐 털을 실은 마치는 없었습니다. 우리 오르오드족의 영역 근처까지 오면서 단 하나의 부족도 만나지 않았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역시 거짓을 일삼는······.”

쿠빌라이가 남궁천을 향해 삿대질하며 욕하려 했지만, 아직 타라후의 말은 끝나지 않았었다.

“돌아가는 길에 받겠노라 하더군요. 광활한 이 대지에서 다시 만날 걸 어떻게 기약하겠습니까? 거짓이면 다 죽일 생각으로 밑에 자리 잡은 할하라족과 우량카이족에 매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남궁천이 했던 행동은 헛되지 않았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타이차무 쪽에 앉은 사람들의 눈빛이 점차 호의적으로 변해 갔다.

그에 반해서, 쿠빌라이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터질 듯 붉어졌다.

“쿠빌라이.”

“우리의 것이다! 기생충과도 같은 놈들이 우리의 땅을 빼앗은 걸 잊은 것이냐?”

“우리 땅은 이곳이네.”

“헛소리! 저 위대한 칭기즈 칸께서 세웠던 업적을 부정할 셈이더냐!”

“부정하진 않네. 허나, 우리의 고향은 이 땅이라는 것은 칸께서 돌아온다고 해도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쿠빌라이, 자네의 고향은 어디인가?”

타이차무의 질문에 쿠빌라이는 허를 찔린 듯 주춤거렸다.

하지만, 곧바로 팔을 쭉 뻗으며 남쪽을 가리켰다.

“나의 고향은 이곳이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칸의 유산을 돌려받을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형제들이여!”

“맞습니다! 우리는 선대의 유산을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땅을!”

쿠빌라이 주변에 앉아 있던 자들이 동조하면 나서자, 타이차무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실수에서 배우지 않았나. 잠시 짓밟을 수 있을지언정 다스릴 순 없네.”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확신하나!”

“선대에서 배우지 않았나? 선조들이 무능하여 실패했다곤 하지 않겠지.”

“선조들이 실수했을 수도 있다.”

“우리가 흘릴 피를 생각해 보게.”

타이차무의 말에 쿠빌라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드디어 넘어왔나 싶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나는 적어도 우리 후손들에게, 매년 찾아오는 이 가혹한 겨울이라는 유산을 넘겨줄 순 없다.”

쿠빌라이의 말에 타이차무는 몸을 흠칫 떨더니 입을 닫았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매넌 반복되는 가혹한 겨울은 그들에게 악몽이었으니깐.

타이차무가 침묵하자 쿠빌라이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올렸다.

남궁천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이들은 보내 주게. 우리를 돕고자 찾아오지 않았나.”

“보내 주면······.”

“남으로 말고 북으로 보내면 될 일이지 않은가. 저 북쪽의 아라사로 잠시 쫓아내면 될 일이네. 우리는 그사이에 명을 치면 되지 않겠나.”

쿠빌라이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타이차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 꽉 끌어안았다.

그는 타이차무가 ‘우리’라고 말한 것에 흥분한 것이다.

그에 반해, 시후도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얼떨결에 아라사로 쫓겨나게 됐으니깐.

- 121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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