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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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태동 (3)
시후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바람마저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경내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헛짓거리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경고했다.
슬며시 눈을 뜨며 세 사람을 관찰했다.
눈을 감기 전과 변함은 없었다.
고개 숙인 설련과 그 앞에 선 검후.
비령은 그 사이에서 어찌할 줄 몰라 눈치만 살피다가, 시후의 시선을 느꼈는지 도와달라고 입을 뻐끔거렸다.
시후는 눈을 좌우로 굴렸다.
비령의 눈매가 표독스러워졌지만, 갈등은 당사자끼리 풀어야 할 문제였다.
종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별로 안 변했네.”
검후가 무심하게 한마디 던졌다.
하지만 유구무언인지라, 설련의 침묵은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검후는 끝까지 인내했다.
긴 시간이 흐른 뒤, 설련은 푹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고마워.”
“뭐가?”
“스승님이 날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으실 수 있었을 테지. 하물며 무공을 폐하지도 않은 상태로 내버려 둔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검후는 대꾸 없이 가만히 있었다.
시후가 있는 쪽에서는 등만 보였기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돌연 웃음 짓는 비령의 얼굴과 다소 붉어진 검후의 귓바퀴를 보니 분위기는 좋아 보였다.
“사저 때문이 아니라, 날 위해서 한 행동이니깐 착각하지마.”
검후는 생각지 못한 칭찬을 들은 악동처럼 퉁명스레 말했다.
설련은 고개를 픽 돌린 검후를 바라보다가 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제자가 날 꾸짖더구나.”
그 말에 비령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설련의 어투에는 힐난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바라보는 눈빛엔 따스함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현월문의 문도로서 의무를 다한 적 있냐고, 그런데 왜 문파에서 무공을 회수하지 않은 거 같냐고 다그치는데, 내가 네게 얼마나 큰 죄를 짓고 도망쳤는지 깨달았지.”
“흥!”
검후는 코웃음을 쳤지만,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후는 더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일부러 엿들은 게 아니란 듯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멀어졌다.
검후는 시후를 슬쩍 바라보곤 관심을 거뒀다.
설련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비령은 그런 시후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검후에게 뭐라 귓속말을 건넸다.
뒤통수에서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애써 무시하며 신의가 기거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길목을 지키는 무승들을 만나긴 했지만, 시후와 신의의 친분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영감님!”
시후는 건물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신의를 불렀다.
안에서 잠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신의가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곧 시후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자네 왔는가? 낙양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네만, 요즘 도통 시간이 없어서 편지 한 통 못 썼다네.”
호감도가 높은 만큼 격하게 반겨 주었다.
적당히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진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왔군.”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 무시하려 했지만, 진류는 할 말이 있는지 헛기침을 해 댔다.
“편지는 잘 전해 줬나?”
시후는 뜬금없는 질문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신의도 자신의 이마를 두들겼다.
“아! 그렇군. 편지가 도움이 되었는가?”
“그냥 죽 쑬 뻔했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됐죠.”
“허허, 고 녀석이 도움이 됐다니 정말 다행이군.”
도움이 된 정도가 아니다.
어의의 도움이 없었다면 측천파흑선은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이룬 것 중 태반은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편지는?”
“안 그래도 전할 게 있으면 달라고 했는데도, 신세 지기 싫다고 끝끝내 사양해서 편지는 못 받아 왔는데······. 아직 안 왔어요?”
“또 수중에 돈이 없는 모양이로구나. 하긴, 겨울에 가난한 아이들을 입히려면 돈이 오죽 나가겠냐마는······. 쯧쯧.”
신의는 가볍게 혀를 차며 시후를 안으로 잡아끌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지간한 약방이 무색할 정도로 짙은 약 향이 맴돌았다.
다만, 그 사이로 다소 역겨운 비릿한 냄새 또한 코끝을 자극했다.
“조금 성과가 있네.”
신의는 부모에게 칭찬을 듣고 싶은 아이처럼 시후의 팔을 잡아당기며 안으로 데려갔다.
시후는 안에 있던 천지아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신의에게 그간의 성과를 듣느라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그의 말은 장황했지만, 요약하자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예방이 가능하다?”
“그렇네! 그렇게 된다면 놈들이 제아무리 은밀히 음식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문제없지!”
고독이 몸에 자리 잡을 수 없도록 만든다.
아직 시험 단계라 확신할 순 없지만, 고독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청혈서에게서 그 해답을 찾았다고 했다.
“아직 청혈서 대변의 독성을 어떻게 중화시켜야 할지는 생각해 봐야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시후는 신의 말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금정단(禁正團)은 정말, 모르고 먹는 게 약이었다.
주재료가 쥐똥이었으니 말이다.
* * *
시후가 지객당 문을 넘기 무섭게 소림사 구경을 나섰던 세 사람도 돌아왔다.
눈이 반짝반짝한 반고와 달리, 남궁미는 연신 하품을 찍찍해 댔다.
시후에게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눈을 비비며 방으로 들어갔다.
“신의께선 어떠신가?”
“뭐, 여전히 똑같죠.”
“하하, 건강하다는 말로 이해하겠네.”
“그보다 미아는 왜 저래요?”
그 말에 남궁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중간에 스님 한 분께 붙들려서 설법을 조금 들었더니 졸려서 휘청휘청하더군.”
“좋은 말씀을 해 주셨을 텐데······ 어이구.”
“정말 금과옥조 같은 말을 해 주셨다네. 나중에 따로 찾아가 볼까 하네만, 같이 갈 텐가?”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듣더라도 시후는 깨달음으로 성장할 수 없다.
조건을 충족해야 성장할 수 있으니 말이다.
“생각이 바뀌면 말하게.”
남궁천이 한 번 더 권하곤, 잠시 연무장으로 가겠다며 다시 밖으로 나섰다.
반고도 그 뒤를 쫓아갔다.
둘이 앞다투어 연무장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니 뭔갈 얻긴 한듯했다.
“그에 반해 쟤는······.”
남궁미도 기본적으로 남궁세가의 직계인 만큼, 노력하면 순식간에 올라갈 여지가 있었다.
실제로 잠재력이 높은 편이기도 하니 말이다.
다만, 무공을 싫어하니 방법이 없었다.
시후는 혀를 차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문을 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검후가 시후의 방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시후는 혹시 방을 잘못 온 게 아닌가 싶어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안에 놓인 짐들은 분명 자신의 방이 맞았다.
“들어와.”
시후는 군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검후는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시후가 고분고분 자리에 앉자, 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후에게 다가왔다.
“현월문에 관심이 많았나?”
앞뒤 다 잘라먹으면 누가 알아들을까.
역시, 소검후의 지랄 맞은 화법도 검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시후는 무슨 의미로 묻는지 몰랐기에 고개를 저었다.
“현월문에 관심도 없는데 연 사저가 난주에 있다는 걸 알았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딘가를 통해서 알아보지 않았다면, 이건 네 녀석 나이대에선 알 만한 일은 아닐 텐데?”
검후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직 본격적인 의심이 아니라 압박감은 덜했지만, 이미 저 맹수 같은 눈빛만으로도 충분한 압력이 전해졌다.
시후는 뇌가 타들어 갈 정도로 머리를 굴렸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군.”
그 말에 시후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검후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다.
더 시간을 끄는 건 독이었다.
“현월문에 관심은 없지만······.”
“없지만?”
잠깐 말끝을 흐리기가 무섭게 검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이판사판이다.
시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비, 비령에겐 관심이 있어서 조금 알아봤습니다.”
검후가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여전히 싸늘한 표정일까.
그도 아니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짐작이 안 됐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후의 귓가에 작게나마 웃음소리가 들렸다.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비웃음과 다소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단언컨대 적대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시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틀리지 않았다.
검후의 입가에는 실낱같은 웃음이 맺혀 있었다.
“비령이를 좋아한다?”
엎질러진 물이다.
시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검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비령이가 말하는 걸 들어보면, 오히려 싫어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던데?”
“역으로 노림수를 던진 겁니다. 그 있잖습니까, 좋아하는데 아닌 척하면서 관심을 유도하는 거 말입니다.”
“애 같은 짓이군.”
“남들과 다른 방법일 뿐이죠.”
“으흠······.”
검후는 진의를 파악하듯 노려봤다.
시후는 쑥스러워하는 척 시선을 피했다.
정적이 이어졌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 소싯적을 보는 듯하군.”
시후는 아부하는 대신 침묵을 고수했다.
더 거짓을 말하자니, 양심이라는 녀석이 너무나도 간절히 애원하는 것 같았다.
그 대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알아본 정도가 거기까지 다다랐다면, 우리 문파의 문규 또한 잘 알고 있겠군.”
“물론입니다.”
“모용세가에서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참 재밌는 녀석이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들린다니 귓구멍에는 문제가 있군.”
시후는 머쓱한 얼굴로 콧잔등을 긁었다.
검후는 잠시 고민하듯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오라는 스님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게 해 줬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너도 지금 비령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물론입니다.”
검후는 시후를 쓱 흩어보곤 방문을 나섰다.
문을 닫기 직전, 틈 사이로 눈이 마주쳤는데, 마치 지켜보겠노라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후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어차피 비령은 곧 종주에 나설 것이다.
제법 오랜 기간 볼일이 없을 테고, 나중에 다시 묻거든 그사이에 맘이 바뀌었다고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시후는 땀을 식힐 겸 밖으로 나왔다.
다만, 마주치기 껄끄러워 얼른 지객당을 나섰다.
남궁천과 반고가 있는 연무장으로 향할까 했지만, 방해나 다름없음을 알았기에 방향을 틀었다.
소림에 아는 사람이라곤 신의밖에 없기에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다시 신의를 찾아가자니 그 또한 방해 같았다.
시후는 적당히 소림사를 배회했다.
앞으로 일을 어떻게 벌일지에 대해 고민하는데, 저 멀리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중에는 상당히 익숙한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이 공(空) 하여야 합니다. 본디 깨달음이란 같은 말을 나눠 들어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따라······.”
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남궁천과 반고가 어디서 깨달음을 얻어 왔는지 알아차렸다.
오대산으로 떠났던 초오 대사가 어느새 소림에 도착한 것이었다.
시후가 다가가서 확인하자, 이야기를 듣는 스님은 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무승이 아니라 학승이었다.
아직 입소문이 덜 퍼진 탓이다.
나중에는 건물 한 채에 소림승을 가득 채우곤 깨달음을 설파할 것이다.
시후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발길을 돌렸다.
구태여 아는 척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자박자박 지객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후의 머리 위로 전서구 한 마리가 휙 지나가더니 불이각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불이각에서 맑은 종소리가 세 번 울려 퍼졌다.
[배교가 멸문하였습니다.]
흑련회의 한 축이 완벽히 무너졌다.
이제 슬슬 곁다리를 부술 때였다.
- 10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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