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06화 태동 (1)
한 달.
낙양에 머무른 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났다.
그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혜아는 철요의 미친 듯한 교육열에 나날이 초췌해졌다.
애초에 그가 혜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천주방으로 쌍괴를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다만, 시후의 저지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렇기에 헛되이 소모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혜아를 몰아붙였다.
지쳐서 떨어져 나가든지, 모든 걸 배우든지 둘 중 하나다.
물론, 혜아는 후자였다.
그리고 처음과 달리 혜아의 순수한 학구열 때문인지 몰라도, 철요도 가르치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오늘도 저녁 드시고 가시려나······.”
서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공부방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가 다다르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방을 나오던 철요는 서괴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서괴도 덩달아 묵례했다.
“가는 게요?”
“예, 오늘 손님이 오신다 들었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리고 아침에 말씀드렸듯이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려 합니다.”
“아이코, 내 정신 좀 보게. 철 선생, 어서 가시구려.”
서괴가 옆으로 비켜서자 철요는 그대로 그를 지나쳤다.
그리곤 정원을 지나 정문으로 향했는데, 막 주방을 나오던 시후와 눈이 마주쳤다.
그 모습에 시후는 피식 웃음 지었다.
당시에는 변명이었겠지만, 지금은 정말로 후세를 위해 가르침을 베풀고 있었다.
철요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연유를 모르는 서괴는 문밖까지 배웅해 주고 돌아온 뒤, 살짝 열린 주방 문틈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비령을 바라보곤 혀를 찼다.
“유난을 떠는구나.”
“쟤한테는 꽤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응? 반고 그 녀석의 어미라고 안 했더냐?”
“그랬죠.”
“그런데 저 아이와 무슨 상관이······.”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곧 흥미로운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는 헛짚었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조금 더 재밌는 광경을 보기 위해 참았다.
서괴가 안채로 돌아가자, 곧바로 외출 나갔던 후괴가 돌아왔다.
그도 반쯤 열린 주방을 바라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아이가 왜?”
똑같은 의문에 시후는 똑같은 설명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응은 서괴와 동일했다.
시후는 실실 웃는 그를 방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라 말하며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후괴는 안채로 들어가는 대신 공부방으로 다가갔다.
방에선 오늘 배운 걸 복기하는 듯, 혜아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왔는데, 후괴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을 요량인 듯했다.
시후는 그에게 관심을 거둬 주방으로 들어갔다.
단순히 문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공기가 바뀌었다.
냄새 때문이 아니다.
살을 저며오는 날카로운 기세.
그 중심에는 비령이 있었다.
비령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조금의 움직임조차 없었다.
시후는 밀려 나오는 한숨을 억눌렀다.
“누가 보면 싸우는 줄 알겠다.”
“어? 어.”
비령은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거렸다.
창틀 사이로 들어오던 노을은 이제 가겠노라 인사를 고하고 있었다.
이제 배가 도착했을 시간이다.
“아직이야?”
“거의 다했어.”
비령의 말대로 대부분 요리는 이쁘게 담아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주요리라고 할 수 있는 수자어는 아직 손도 안 댔다.
도마 위에 놓인 초어(草魚)는 이미 움직임이 멎어 있었다.
비령은 연신 왼손을 움찔거리며 뻗었지만, 일정 거리를 좁히진 못했다.
시후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비령의 손에서 부엌칼을 빼앗았다.
“어휴, 물고기도 못 만지면서 무슨 수자어(水煮魚)를 한다고. 어떻게 해 줘?”
“칼을 비스듬히 쥐고, 비늘을 이렇게 긁으면서 벗긴 다음에······.”
평소와 달리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진 않았다.
시후는 비령의 지시대로 손을 놀렸다.
비늘을 제거한 뒤, 머리와 뼈를 발라내고 살을 얇게 저몄다.
그리고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비령은 다음은 자기가 하겠다고 말하며 고마운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잠시 지켜보던 시후가 손을 헹구고 주방을 나서자, 막 복기를 마친 혜아가 방에서 나왔다.
혜아는 쪼르르 다가오더니 주방 안을 들여다보곤, 어디서 본 듯한 웃음을 지었다.
시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어린 나이에 쌍괴에게 이상한 물이 들었다.
“아직 멀었으니깐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
“다된 거 아니에요?”
“조금 더 걸릴 거야.”
“그럼 조금 더 기다릴게요. 냄새도 좋고 바람도 시원하고······ 에츄!”
바람이 한차례 불자 혜아가 한차례 재채기를 했다.
아직 바람이 차다.
시후는 그 뒤에 서 있는 후괴에게 방으로 데려가라고 눈짓을 보냈지만, 후괴는 그보다 더욱 간단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혜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곧 혜아의 뺨이 보기 좋을 정도로 붉어졌다.
내공을 불어 넣어 준 것이다.
혜아는 후괴의 배려를 눈치채곤 그에게 매달려 이마를 비볐다.
후괴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혜아의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표정을 굳히며 대문을 바라봤다.
그는 몸을 돌려 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안채에 있던 서괴가 문을 박차고 나왔다.
“뭐야?”
그는 황급히 후괴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모르기도 모를뿐더러 곧장 문이 열렸으니 말이다.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은 남궁 남매였다.
둘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쌍괴를 보며 주춤거렸다.
덕분에, 그 뒤를 따르던 반고와 그의 모친인 설련은 문 앞에서 멈춰야만 했다.
“어?”
후괴가 손가락을 앞으로 뻗으며 설련을 가리켰다.
아무리 집주인이라고 한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설련도 후괴를 가리켰다.
서괴는 기억이 안 나는 듯 머리를 싸매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풍파광검(風波狂劍)?”
설련의 손끝에서 지풍이 쏘아졌다.
서괴는 예상이라도 한 듯 머리로 날아오는 지풍을 손등으로 쳐 냈지만, 충격이 작지 않은지 반대쪽 손으로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문질렀다.
“성격은 여전하네.”
“그 주둥이도 여전하군.”
“젠장, 진즉에 강호를 떠났다고 들었는데 무공은 왜 아직도 우리 위야?”
“무공은 재능이지.”
“개뿔.”
다들 어색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들었다.
비령은 막 주방에서 나오더니 대치하고 있는 쌍괴와 설련을 번갈아 바라봤다.
누구 하나 나서서 묻지 않는 가운데, 혜아가 손을 뻗어 서괴와 후괴의 옷을 잡아당겼다.
덕분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후괴는 쓴웃음을 지으며 혜아를 안아 들었고, 서괴는 인상을 쓰면서 옆으로 비켜섰다.
* * *
맛깔스러운 음식이 식탁 가득 놓여 있었지만, 그 누구 하나 쉽사리 손을 뻗지 않았다.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시후의 젓가락은 분주히 움직였다.
이 음식 저 음식을 탐하던 젓가락이 손질을 도왔던 수자어로 향했다.
시후는 푹 익은 살점을 음미하더니 비령을 다그쳤다.
“야, 매워지기 전에 빨리 고추 건져! 여기서 더 우러나면 혜아 못 먹겠어.”
“어? 어.”
비령은 수자어를 담은 그릇에서 빈 그릇으로 고추를 덜어내기 시작했다.
시후의 부산스러움 때문일까.
분위기는 다소 완화되었다.
다들 슬슬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사람 중 먼저 말은 꺼낸 쪽은 설련이었다.
“얼마 만에 보는지 알아?”
“쉽게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지.”
후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설련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
“태무(泰武) 사 년.”
“그렇다면 대충 사십 년인가?”
“정확히는 사십이 년이지.”
“세세히도 기억하는군”
후괴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지만, 설련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한기가 묻어나올 정도로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해야지. 그때 얻은 상처로 그이의 몸이 안 좋아졌으니깐.”
그 말을 기점으로 다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분위기가 이전보다 더욱 무거워졌다.
서괴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게 꼭 우리 잘못이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때 도와주는 시늉만 했어도, 그이가 칼에 찔리는 일은 없었을 거야.”
“일초반식조차 익히지 못한 서생이 시비를 먼저 걸었는데,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도와야 할 이유는 없지.”
“의(義)를 행하는 모습을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금수와 다를 게 무엇일까.”
설련이 씹듯이 말을 내뱉으며 서괴를 노려봤다.
이야기를 들으니 다들 머릿속에 상황이 그려졌다.
설련의 남편이 불의를 보고 나섰을 테고, 설련이 쌍괴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둘의 성격상 도왔을 리가 없었다.
어찌어찌 이기긴 했을 테지만, 설련의 남편은 그때 상처가 몸을 갉아 먹었을 것이다.
“사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꺼내서 우리가 잘못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서괴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억울한 듯 말했다.
그도 그럴 법했다.
강호에서 타인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지 않은가.
다들 침을 삼키는 가운데, 설련은 식탁 위에 팔꿈치를 올리며 깍지를 낀 채로 분위기를 더했다.
“그때 내가······.”
“이거 맛있네.”
“이거 맛있네라고······.”
설련을 말끝을 흐리며 시후를 노려봤다.
시후는 모르는 척 젓가락을 놀렸다.
무거웠던 공기를 퍼낸 듯, 조금 가벼워졌다.
그래 봤자 한 바가지 정도지만.
숨 막히는 분위기 때문일까.
혜아가 계속해서 서괴와 후괴의 팔을 잡아당겼다.
“먼저 실례 좀 하지.”
서괴는 그런 혜아를 안아 들고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련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괴의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우리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최소한 칼에 찔리게 두진 않았을 테지.”
후괴는 젓가락으로 다소 식어 버린 수자어 한 점을 건져 냈다.
그는 곧 입으로 집어넣어 몇 번 우물거린 뒤 꿀꺽 삼켰다.
그러곤 다시금 젓가락을 뻗어 한 점 더 건져 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 변해 버린 요 녀석처럼, 사람도 주변에 생긴 일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
그는 잠시 말을 끊고는 다시 수자어를 음미했다.
그리곤 젓가락을 들어 수자어를 가리켰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이 녀석도 시간이 지나 식었는데, 그대도 조금 화가 누그러졌다면 대화를 나눠 보지 않겠나?”
“대화는 무슨······.”
퉁명스레 말했지만, 이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덕분에 다들 눈치를 살피며 다시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분명 우리는 그 당시에 그대의 부탁을 외면했지.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탓에 괴라는 별호를 얻었고 말이야.”
후괴는 팔을 뻗어 술병을 집었다.
앞에 놓인 잔을 채운 뒤, 팔을 쭉 뻗어 설련의 잔도 채워 주었다.
눈썹을 찌푸렸지만, 거부하진 않았다.
“그 탓일까, 우리 주변엔 아무도 없었네. 별 상관없었지. 저 빌어먹을 추가 놈이랑 그렇게 오십 년 가까이 살았는데 말이야.”
후괴는 자조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에 설련은 서괴가 나갔던 문을 살짝 돌아보았다.
“저 아이?”
“정확히는 그 아이의 어미 때문이지. 그 때문에 저 아이를 키우게 되었고 우리는 지난 과오를 깨달았네.”
설련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닫히길 반복했다.
마음이 심란할 것이다.
내심 쌍괴가 이전과 같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야 계속해서 원망할 수 있을 테니깐.
하지만, 쌍괴는 변했다.
그렇기에 원망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남편이라면 그러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꽉 움켜쥐었던 그녀의 주먹이 스르륵 풀렸다.
“말로는 뭔들 못할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에 힘이라곤 실리지 않았다.
후괴의 태도에서 진실한 마음은 제대로 전해졌으니깐.
설련은 화가 나는 듯 가득 채워진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그에 맞춰 후괴도 잔을 비웠다.
“허울뿐인 말로만 과오를 털어 낼 생각 따윈 하지 않았네.”
“그럼?”
후괴는 말 대신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잔을 채우고는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서괴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혜아의 아비를 찾아 준 다음. 괴(怪)라는 별호를 벗어 던질 때까지 정의맹에 들어가려고 하네.”
- 10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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