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05화 귀인 (3)
시후의 젓가락은 접시 이곳저곳을 분주히 오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식은 점점 줄어들었다.
파죽지세의 기세로 움직이던 젓가락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거, 체하겠네요.”
시후는 접시에서 시선을 돌려 천주방주와 철요를 바라봤다.
천주방주의 시선은 열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
그와 반대로, 철요는 마주한 눈만 아니라면,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감정을 절제했다.
그런 두 사람 중 먼저 움직인 건 역시나 천주방주였다.
그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병을 기울여 잔을 그득히 채우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병 주둥이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의 목울대가 연신 꿀렁거렸다.
거꾸로 들어 올린 병이 입에서 떨어졌지만, 주둥이에 맺힌 술 방울은 안이 비었노라 말했다.
천주방주는 병을 내려놓으며 따라놓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자네가 도통 술을 마시지 않으니 내가 대신해서 술을 마셨네. 그러니 이제 표면 아래 있는 이야기를 나눠도 될 법하지 않겠나?”
뜸을 이 정도까지 들였으면 충분하다.
뭐든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니 말이다.
시후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지금 시기가 너무 좋죠?”
두서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천주방주는 그 말뜻을 알아차린 듯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해일세.”
“오해라고 보기엔, 천주방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분께서 지나치게 혜아에게 붙어 있던데요? 그것도 정체를 숨긴 채 말이죠.”
“묻지 않으니 밝히지 않은 것이고, 배운바 가르침을 후세를 위해 돌려주려는 것뿐이오.”
시후는 철요를 갑작스레 들먹였지만, 그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대꾸했다.
미리 준비한 듯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시후는 저런 대답이나 듣고자 이 자리를 찾은 건 아니었다.
다시 천주방주를 바라봤다.
“어차피 배교 정리가 막바지긴 해도 다 끝나려면 족히 한 달은 걸릴 테고, 아직 바다로 도망쳤던 수로채도 남아 있잖아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시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오해는 무슨 오해요?”
“천주방은 변함없이 이대로 지낼 걸세.”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요.”
“정말일세.”
진전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천주방주가 기막까지 펼쳤다.
“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믿어줄 텐가?”
“다시 천주방을 일으킬 생각이 없으시다고요?”
“그렇네!”
천주방주는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시후가 계속했던 말을 끝없이 반복했던 이유는 그의 평정을 깨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지금, 때가 되었다.
“그런데 왜 다섯 패주에게 연락을 취하고 계신데요?”
천주방주가 쓰고 있던 가면에 금이 갔다.
그는 뒤늦게 표정 관리에 들어갔지만, 부서진 가면은 쉽사리 붙지 않았다.
과거 정파와 맞붙기 전, 사파에는 육패(六覇)가 있었다.
천주방은 그중 하나였다.
“다섯 패주에게 연락하는 저의가 무엇일지 저만 궁금할까요?”
천주방주는 침묵했다.
그의 침묵은 긍정과 다르지 않았다.
시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그를 대신해 철요를 바라봤다.
천주방주의 뒤에 시립해 있던 그가 앞으로 반걸음 나섰다.
“방주께서 다섯 패주와 워낙 친분이 두터워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니, 차 소협께서 곡해하지 마시길 바라오.”
“정의맹에 그대로 전해 드려요?”
그 말에 천주방주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굳어졌다.
하지만, 철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정의맹에선 이 사실을 모른다는 말로 들리오만?”
“모르니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라고 말하는 거죠.”
“차 소협은 지금······.”
철요는 하던 말을 끊으며 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곧 자리에 앉아있는 천주방주에게 귓속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천주방주의 표정에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철요의 속삭임은 길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천주방주의 눈빛 또한 깊어졌다.
말을 끝마친 철요는 다시금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천주방주는 꺼슬꺼슬한 턱수염을 뽑을 듯이 쓰다듬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소협은 정의맹의 사람이 아니었소?”
“그렇긴 한데, 천주방이 힘을 모은다고 다시 정의맹에 덤빌 건 아니잖아요?”
“크흠.”
과거에도 주위에서 헛바람을 불어넣는 자들 때문에 나선 것이지, 그가 주도적으로 정의맹과 맞서겠노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랬다면 애초에 천주방이 명맥을 이어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긴 한숨을 토해냈다.
“맞소. 천주방을 다시 일으키고자 연락을 돌렸소. 다만······.”
천주방주는 할 말이 있다는 듯 말끝을 흐렸지만, 꾹 다문 입술은 열릴 줄 몰랐다.
사실, 이러저러한 말을 늘어놓아 봤자 단순한 자기변호에 불과했다.
어차피 시후도 그의 변명엔 관심이 없었다.
천주방이 어서 빨리 다섯 패주와 힘을 합쳐서 ‘사도련’이라는 이름 아래 모이길 빌 뿐이었다.
그래야 최소한, 방패막이로 쓸 수 있을 테니깐.
* * *
“아무리 생각해도 저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어.”
제갈려는 창틀에 턱을 괸 채로 중얼거렸다.
그 시선이 닿은 곳은 혜아의 공부방이었다.
혜아를 저 사람이라 칭하지 않았을 테니, 그녀가 말하는 건 아마 철요일 것이다.
“주기적으로 관직 제의도 받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천주방에 몸을 담고 있는 거지? 게다가 낮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인재 끌어모으랴, 밤에는 천주방 일을 돌보랴······.”
철요의 인망은 정말이지 두텁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되었다.
낙양은 경제, 문화, 학술의 중심지로서 내놓으라는 명사들이 모인 곳이었다.
철요를 소개해 줬던, 시독학사를 지낸 종 대인을 시작으로, 그는 수많은 명사에게 관직을 제의받는 인물이었다.
제갈려는 그런 그가 천주방에게 몸을 담고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시후도 그 점에 관해서는 몰랐기에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공부방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던 이야기 소리가 잦아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곧 작게나마 혜아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치 교육을 마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며 철요가 나왔다.
그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창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그는 제갈려의 어깨너머의 시후를 발견하곤 살짝 묵례했다.
그에 시후도 살짝 고개를 숙여 답했다.
“어이쿠, 벌써 수업이 끝났나 보군요.”
혜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안채에서 후괴가 달려 나왔다.
그는 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늘 배웠던 것을 물었다.
후괴는 허허 웃곤, 혜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문까지 철요를 배웅해 주었다.
제갈려는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돌연 몸을 돌렸다.
“그보다 천주방을 일으키려는 목적이 뭐야?”
“강호의 평화와 안녕.”
“사파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게 강호의 평화와 안녕이라고?”
“대국적인 측면에서 그렇지.”
제갈려의 물음에 시후는 진지한 태도로 답했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는지 대화가 끊겼다.
“도대체 뭐가 대국적인 거냐고 따지고 싶지만, 대답하진 않겠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시후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제갈려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려는 듯 문으로 가더니, 문고리를 붙잡곤 고개를 힐끔 돌렸다.
“오해 사지 않도록 조심해.”
“내 걱정을 다 해 주고 별일이네. 고마워”
“네 의도가 그게 아니더라도, 오해받기에 십상이잖아? 게다가 나까지 얽힐 거 같으니까 하는 말이야.”
제갈려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으며 나갔다.
나가기 직전 살짝 붉어진 귓불이 얼핏 보였다.
곧 정적이 찾아왔다.
시후는 창문으로 다가가 주변을 살핀 뒤 문을 닫았다.
주변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품에서 삭을 대로 삭은 목함을 꺼내 들었다.
살며시 표면을 쓰다듬자 말라붙은 흙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소도(小刀)였다.
크기는 한자를 간신히 넘길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소도는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곡선과 직선의 아름다운 조화의 정수였다.
시후는 소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기 직전.
소도는 뱀처럼 팔을 휘감아 오르기 시작했다.
“어? 어?”
시후가 잠시 당황한 사이, 녀석은 눈 깜빡할 사이에 가슴까지 다다랐다.
그와 동시에 전해지는 격렬한 고통.
시후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들부들 떨며 침은 질질 흘렸다.
턱을 타고 흐른 침이 조금씩 앞섬을 적셨다.
“끅······. 끄흑······.”
심처의 끝자락에서 죽어가는 망자의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소리를 크게 낼 수도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들 있으니 말이다.
비명을 억누르며 영겁과도 같은 시간을 이겨 냈다.
간신히 움직이기 시작한 손으로 우여곡절 끝에 상의를 벗어 던졌다.
불끈거리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단단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건 아니다.
왼쪽 가슴 아래, 정확히 소도 크기만큼의 살이 볼록 솟아 있었다.
살 아래 무엇인가가 있다는 느낌이 영 좋지 않았지만, 놈이 가라앉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시후는 조심스럽게 가슴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분명, 가슴 속에는 비천보어검이 들어 있었다.
시후는 계속해서 가슴을 어루만지던 사이, 가슴 속에서 느껴지던 이질감이 한순간에 날아감을 느꼈다.
[비천보어검(飛天保御劍)이 몸에 동화되었습니다.]
[금사박투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금사박투의 봉인이 풀린 건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시후는 일단 비천보어검의 능력을 확인했다.
[비천보어검]
「소유자 능력 밖의 공격을 막아 냅니다. 이는 월 2회로 제한됩니다.(최초 발동 후 보름마다 1회씩 충전됩니다.)」
- 능력이 잠겨 있습니다.
- 능력이 잠겨 있습니다.
- 능력이 잠겨 있습니다.
당장에 쓸모 있는 능력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하나는 때에 따라서 무궁무진하게 사용될 가능성이 컸다.
시후가 다른 물건을 다 제쳐 두고 비천보어검을 얻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월 2회라는 조건이 있지만, 능력 밖의 공격을 막아 준다는 건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을 가능케 할 것이다.
마교 특유의 짙은 공격성을 생각한다면, 여분의 목숨을 들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것보다 이런 고통이 동반된다는 건 몰랐는데.”
시후는 상의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손을 통해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에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 뒤,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손에 끼고 있는 금사박투를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개방에 좋아해야 하지만, 아쉽게도 개방된 능력치는 하나였다.
「내공 소모 시, 일정 확률로 소모한 내공을 전부 돌려받습니다.」
금사박투는 아무래도 확률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이전의 살해 시 내공 회복도 수상했는데, 이건 더욱 쓸모없었다.
그래도 다른 기능들이 준수하니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옷이······.”
시후는 항상 갈아입을 옷을 침대 맡에 두는 습관이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옷이 보이지 않았다.
깜박한 건가 싶어서 그 옆에 있는 서랍을 뒤지니 부드러운 천 조각이 나왔다.
속옷이었다.
그것도 여자의.
시후는 깜짝 놀라 방을 둘러봤다.
“아, 려 방에 잠시 왔었지······.”
몸이 굳었다.
어디서 찬 바람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문이 열려 있었다.
문 앞에는 이 방의 주인이 서 있었다.
시후는 손에 들린 속옷과 제갈려를 번갈아 바라봤다.
누가 봐도 현행범이었다.
시후는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변명해야 했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가까이 오지 마! 아니, 나가!”
제갈려가 손바닥으로 시후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맨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시후가 속옷을 내려놓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상의를 주워들었지만, 제갈려는 속옷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갖고 꺼져!”
속옷은 막 문을 지나는 시후의 머리 위에 떨어졌고, 소란을 듣고 나온 남궁 남매와 비령, 반고가 정면에서 나타나 시후를 마주했다.
비령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고, 남궁천은 옆을 힐끔 바라보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반고는 눈치를 살피더니 남궁천을 따라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하나.
남궁미와 눈이 마주쳤다.
시후는 머리 위에 올려진 속옷을 천천히 끌어 내리며, 오늘 하루가 참 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 106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