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00화 열쇠 (1)
시후는 목함을 내려다봤다.
별 볼 일 없는 외견과 달리, 안에 든 물건은 소문이 난다면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물건이 들어 있었다.
무가지보(無價之寶)라 부를 만한 소림의 보물인 대환단.
흑백선자의 머리를 보내 준 것과 더불어 남궁무의 시체를 수습하게 해 준 보답이었다.
남궁세가의 위치와 재력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줘야 했다.
하지만, 그 물건을 지금 그것도 남궁천이 가져다줘야 하냐면 ‘아니올시다’였다.
“진실을 말씀하시죠.”
“어허, 차 아우가 날 이리도 못 믿다니, 이 우형이 그리도 못 미덥던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뿐이죠. 지금 남궁세가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아쉬울 텐데, 천이 형님이 선물이나 주시려고 왔다? 세상천지에 그 말을 믿을 바보천치가 어디에 있어요?”
남궁세가는 안휘와 절강, 그리고 강소성까지 담당하고 있기에 남궁천이 돌아다닐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남궁미였다.
백번 양보해서 배교의 잔당들을 어느 정도 정리했다고 한들, 남궁미를 데리고 움직일 만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남궁선유가 그를 용인했다는 건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
시후가 곁눈질로 남궁미를 바라봤으나, 남궁미는 헤헤거리며 바라볼 뿐 딱히 뭔가를 아는 눈치가 아니었다.
결국, 남궁미를 데려온 이유는 남궁천만이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보다 이 소협은 누구신가?”
하지만, 남궁천은 말을 돌렸다.
말해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나 남궁천이 이 먼 곳까지 왔는지 궁금하긴 해도, 반고와 친교를 쌓는 게 먼저였다.
시후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반고를 바라봤다.
반고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난주에서 나고 자란 강반고라고 합니다. 이렇게 위명이 쟁쟁한 남궁세가의 삼공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명에 불과하지요. 한데, 강 소협께서는 혹 공동파의 문하입니까?”
“예? 하하, 그러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아닙니다.”
그 대답에 남궁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뭔가 더 물으려 입술을 뗐지만, 시후가 한 발 더 빨랐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아, 그러시죠.”
대답하는 반고의 눈에는 남궁천이 합석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시후와 반고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남궁미는 자연스레 시후의 옆에 앉았으니깐.
그로 인해 남궁천도 자연스레 합석하게 되었다.
음식이 주문한 뒤 반고가 가볍게 운을 뗐다.
“사실 난주는 비단길의 관문 도시이다 보니, 지나는 상단은 많아도 이름 높은 문파나 세가는 없는 편입니다.”
“비단길을 지나온 상인들이 들르는 곳이니만큼 별의별 물건들이 다 모인다고 들었소.”
“아,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이 들어오긴 하지만, 그런 물건들의 값은 상상을 초월하지요. 아, 일전에 봤던 물건 중에는······.”
사람 사귐을 좋아하는 남궁천이기에 시후는 한 발짝 물러나 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반고가 말을 걸었던 이유와는 한참 어긋난 대화가 이어졌지만, 그는 남궁천을 만난 것 자체로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보다 차 아우는 어찌 알게 되셨소?”
“아, 그게 알았다기보다는 백탑사에서 처음 뵀는데, 강호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이렇게 따라오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차 아우가 해 줄 이야기가 참 많겠군.”
남궁천이 슬쩍 발을 뺐다.
왜 그런가 봤더니, 머리에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는 난주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노라 말하는 듯했다.
곁에 앉은 남궁미의 머리도 엉망이었다.
심지어 정수리에선 심기를 어지럽히는 냄새가 뭉클뭉클 올라오고 있었다.
시후는 남궁미의 팔을 슬쩍 옆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남궁미는 정확히 밀어내는 만큼 달라붙었다.
같은 행동을 몇 번 반복한 뒤, 시후는 남궁천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
남궁천은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야, 잠시 와 보거라.”
남궁미는 남궁천의 부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갔다.
이내 남궁천이 귓가에 뭐라 속삭이자, 남궁미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도망치듯 방으로 올라갔다.
남궁천은 점소이를 붙잡아 씻을 물을 올려달라 말하곤 씻고 오겠다며 방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당분간 안 내려올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는지, 반고는 계단을 올려다봤다.
남자의 관심은 달갑지 않지만, 목적에 따라선 그 관심도 반갑게 받아들여야 했다.
“최근 강호 이야기를 하자면 일단 배교의 일을 빼놓을 수 없죠.”
“앗, 맞습니다. 가장 뜨거운 감자는 바로 배교죠. 이번에 들리는 바로는······.”
반고는 자신이 아는 바를 말했다.
그가 아는 건 매우 적었다.
배교가 암약하고 있고 정의맹에서 그를 응징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활약했던 시후였기에, 반고가 가려워하는 부분을 정확히 긁어 줄 수 있었다.
“최초로 놈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건······ 밤을 꼬박 새우며 지켜본 비밀통로에서······ 검후께서 검 한 자루만을 든 채로······.”
이야기는 길어졌다.
그사이 식사가 나왔고, 시후는 목이 마른다는 핑계로 술을 시켰다.
그렇게 반고는 시후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을 홀짝홀짝 들이켰다.
* * *
반고는 생각보다 술이 약했다.
아니, 무척이나 약했다.
고작 죽엽청 한 병이었다.
자세히 따진다면, 둘이서 나눠 마셨으니 고작 반병이었다.
이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시후가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객잔 문이 열렸다.
제갈려의 비령이 돌아온 것이다.
두 사람은 시후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더니 살짝 방향을 틀었다.
누가 봐도 일행이라고 생각기 힘들 만큼 떨어져 앉았다.
시후는 뭐라 말하기도 귀찮았기에 묵묵히 남은 음식을 집어 먹었다.
“세 사람의 사이가 안 좋았던가?”
남궁천의 목소리에 세 사람은 동시에 위를 올려다봤다.
놀란 표정을 보아하니, 둘은 남궁천과 남궁미가 온 일을 몰랐던 것 같았다.
“그보다, 강 소협은 술이 약하군.”
“못 먹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죠.”
“하하, 그 말이 맞네. 그보다 깨어날 때까지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겠군?”
남궁천은 반고 옆에 앉았다.
곧 젓가락을 들어 올려 시후와 같이 식사했다.
다만, 분주히 젓가락을 움직이면서도 연신 반고를 힐끔거렸다.
그 모습에 시후는 피식 웃었다.
“직접 물어보시죠.”
“아무 말도 안 했네만.”
“크흠.”
이번에는 남궁천이 빙긋 웃었다.
그는 음식을 몇 점 더 입에 넣더니 곧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확실히 강 소협이 누구에게서 무공을 사사하였는지 궁금하군.”
남궁천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이 보기엔 반고는 단순히 취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궁천의 성격상 쓸데없는 헛소리를 늘어놓진 않을 것이기에 둘은 슬그머니 자리를 이쪽으로 붙였다.
눈을 마주친 두 사람 중 먼저 질문을 던진 건 비령이었다.
“그보다, 화동 지역은 정리가 끝난 건가요?”
“원래 끊어진 잔뿌리를 찾아내기가 더욱 힘든 법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쪽으로 오실 여유가 있으신가요?”
“차 아우는 우리 집안의 크나큰 은인이니, 사람을 보내어 감사 인사를 전하는 건 실례지요.”
남궁천의 말에 제갈려는 시후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남궁무의 시신을 찾게 해 준 일은 남궁세가를 제외하면, 제갈려와 시후 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고개를 좌우로 내젓던 제갈려의 시선이 계단으로 향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남궁미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제갈려의 얼굴엔 반가움 대신 의아함이 어렸다.
제갈려는 남궁미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남궁천을 바라봤다.
제갈려의 눈치는 보통이 아니었다.
남궁미는 묘한 기류를 느꼈는지, 시후의 옆에 앉자마자 제갈려를 힐끔 바라봤다.
“려 언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우리도 조금 전에 돌아와서 별다른 이야기한 것도 없었어. 그보다, 가주님이 용케 밖으로 나오는 걸 허락해 주셨네?”
“먼저 말씀 꺼낸 건 제가 아니라 아버지세요. 보답을 전하고 싶은데 천이 오라버니와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그 대답에 시후는 더욱 골치 아팠다.
남궁미가 떼쓰고 남궁천이 거들어준 게 아니라, 남궁선유가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게 중요했다.
왜 이 시기에 남궁미를 보냈는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전적으로 내 책임······ 책임?’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시후는 남궁천을 바라봤다.
남궁천이 경직된 웃음과 함께 시후의 시선을 피했다.
의혹이 확신으로 변하려 했다.
시선을 회피하는 남궁천의 앞으로 다가가려는 찰나, 객잔 문이 열렸다.
아주 흔하디흔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곧 시후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신지요?”
그에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중년 여인은 남궁천의 인사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탁자에 엎어져 있는 반고를 내려다봤다.
남궁천은 그 반응을 보곤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아, 강 소협의 모친 되시나 봅니다. 술을 강권한 건 아니고······.”
“그이를 닮았다면 술이 터무니없이 약할 테지요.”
“하하, 급히 마시느라 취기가 빨리 올랐을 겁니다. 그리 많이 마시진 않았으니, 조금 기다리면······.”
“혈을 눌러서 깨워 주시겠어요?”
남궁천은 반고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기에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모친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혈을 눌러 술을 깨게 해 주었다.
반고의 모친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조금 뒤척이는가 싶더니, 반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머니.”
“처음 뵈는 분들 앞에서 이 무슨 추태더냐?”
“죄송합니다.”
“사과는 이분들께 해야지.”
반고가 허리를 숙이려 했지만, 남궁천이 손을 급히 휘저었다.
“아닙니다. 추태랄 것도 없었습니다.”
“소협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만. 너도 인사드리고 나오거라.”
반고의 모친이 객잔을 나섰다.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았기에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반고는 모친의 뒷모습과 남궁천을 바라보며 잠시 갈등했지만, 이내 포권을 취하며 작별을 고했다.
“아······. 실례 많았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강 소협도 살펴 가십시오.”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는 아쉬움이 여실 없이 묻어 나왔다.
시후는 다소 꼬여 버린 상황에 인상을 찌푸렸다.
다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람은 시후 혼자만이 아니었다.
“령아, 왜 그래?”
제갈려의 말에 옆을 돌아보니, 비령이 검병을 꽉 움켜쥔 채 객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병을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손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비령은 제갈려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 입구만 바라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어?”
제갈려가 어깨를 툭툭 치면서 묻자, 비령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입구를 향해 있었다.
“강 소협의 어머니셨죠?”
“그렇겠지. 그런데 왜?”
“강 소협에게 무공을 가르친 게······ 아마도 강소협의 어머니일 것 같아요.”
“에이, 설마······.”
“아마도 맞을 거예요.”
제갈려가 의심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비령은 확신하는 듯했다.
“천 소저, 그게 무슨 말인가?”
둘의 대화를 들은 남궁천이 보이며 물었다.
비령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 사부님 정도의 고수였어요.”
- 101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