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01화 열쇠 (2)
비령은 피곤하다며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등장한 충격이 강렬했기에, 다들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침묵을 깨고자 남궁천은 죽엽청 한 병을 시켰다.
곧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으나, 마실 생각이 없는지 애꿎은 잔만 매만졌다.
“검후와 비견될 만한 여 고수라면 누가 있을까?”
남궁천은 일렁이는 술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혼잣말이되 혼잣말이 아니었다.
제갈려가 반응을 보였으니 말이다.
“글쎄요? 아무리 이름 높은 여 고수라고 한들, 팔황과 견줄 만한 분이 있을까요?”
“무림을 떠난 뒤 갑자기 벽을 깨트렸다면?”
“아무리 못해도 강 소협을 낳기 전에 은거했을 텐데, 그렇다면 못해도 이십 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할 텐데요······.”
제갈려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십 년 전이라면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남궁천도 일곱 살에 불과했다.
그 말에 남궁천은 피식 웃으며 잔을 비웠다.
최소가 이십 년이다.
고수는 내공으로 노화를 억제할 수 있으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일 수도 있다.
“개방이나 하오문에 물어볼까요?”
“강 공자를 직접 깨운 것도 아니고, 혈을 눌러 달라고 한 걸 봐선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듯하니, 그러지 말거라.”
남궁천은 남궁미의 제안에 완강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제갈려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시후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계속 강반고의 모친에 관한 대화가 이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시후는 남궁천의 앞에 놓인 죽엽청으로 손을 뻗었다.
남궁천은 그보다 더 빨리 병을 낚아채 시후의 잔을 채워 줬다.
“그보다, 왜 이곳까지 찾아오셨는지 슬슬 말해 주실 때가 된 듯한데요.”
“그야 약소하지만, 보답을 전해 주기 위해서지.”
병 주둥이가 살짝 흔들렸다.
역시, 워낙 성정이 올곧았기에 이런 거짓에 능하지 못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는 하지 마시고요.”
시후의 말에 남궁천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답을 찾는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자신이 유추한 답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것.
시후는 남궁미를 슬쩍 바라봤다.
“혹시 미아를······.”
“커험! 피곤할 텐데 이만 올라가서 쉬는 게 어떻겠냐?”
남궁천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남궁미의 등을 떠밀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남궁미는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지만, 남궁천도 사력을 다해 밀었기에 연신 계단으로 밀려났다.
“안 피곤해요!”
“안 피곤해도 올라가서 쉬거라. 차 아우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도 들을······.”
“이번에 따라오면서 아버지께서 뭐라 했는지 잊었더냐?”
그 말에 힘껏 버티던 남궁미는 입술을 삐쭉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이어서 제갈려도 힐끔 바라봤다.
“저도요?”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려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곧 피식 웃음 짓곤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남궁천은 제갈려가 방으로 올라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짐작은 했겠지만, 미아도 자네에게 호감이 있고······.”
“제 의견은요?”
“혹, 마음에 둔 여인이 있던가?”
순간, 시후의 머릿속으로 홍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바로,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전혀 아니다.
전여린의 거듭된 강요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다.
“우리 미아가 어디 내놓아도 빠지는 외모도 아닐뿐더러······.”
시후는 손을 급히 휘저으며 남궁천의 말을 끊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부터 설명해 주시죠.”
“보통 강호인들이 늦게 결혼하기야 한다지만, 미아는 이미 혼기가 꽉 찬 나이지 않은가?”
그 말도 맞다.
반영된 시대에서 여성은 십육 세 전후로 결혼하니, 오히려 늦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되려 제갈려나 비령이 이상한 것이다.
물론, 일반인의 기준이지만 말이다.
“그야 그렇지만······.”
“괜찮은 혼사가 있다면 냉큼 물어야 하는 법이거늘, 차 아우 정도면 차고 넘친다고 생각해서 내 아버지께 적극적으로 권했네.”
남궁미를 보냈다는 건, 남궁선유도 허락했다는 말이었다.
확실히 남궁무의 시신을 찾게 해 준 게 주효했다.
물론, 남궁미를 바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시기에? 뭐 때문에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셨는지 설명이 필요한데요?”
“크흠······.”
남궁천은 헛기침하며 곁눈질로 비령이 들어간 방을 바라봤다.
시후는 그 시선의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검후께서 천 소저를 두고 떠나지 않았나? 아우야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말이 많네.”
“말이 많다는 게 혹시······.”
“천 소저와 아우를 이어 주려고 의도적으로 자리를 비켜 줬다는 소문이 돌고 있네.”
“······ 그럴 리가요.”
“아닌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는 말이 있지.”
“누가 그런 소리를 퍼트렸는지 몰라도 주둥이를 뭉개 버려야겠네요.”
시후는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들었지만, 가슴은 더욱 무거워졌다.
“당장 돌아갈 것도 아니니, 바로 답해 주지 않아도 괜찮네.”
“그 말은 답을 듣기 전까진 같이 다니겠다는 말이네요.”
“하하하,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세나. 자, 잔 받게.”
남궁천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술을 권했다.
구렁이 담 넘듯 대답을 피하는 그 모습에 시후는 피식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시후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가기 싫어지면 어쩌지?’
* * *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반고가 찾아왔다.
연신 허리를 숙이는 그에게 괜찮노라 계속 말했지만, 반고의 사과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무엇이든, 남발하면 값어치가 떨어지는 법입니다.”
남궁천의 말에 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시후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입을 닫으라는 소리는 아니었을 텐데,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정 그러면, 어제 사기로 했던 저녁을 사시죠?”
“아! 어제 식사는 차 소협께서 계산하셨겠군요.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어허, 또 사과하시네.”
“죄송합······.”
반고는 말을 하다 말고 자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미가 피식 웃었다.
못 들으려야 못들을 수도 없었다.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고작 몇 걸음 차이였으니깐.
반고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남궁천이 뒤를 돌아 남궁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혀를 빼꼼 내미는 모습이 어젯밤 방으로 들여보낸 데 복수하는 듯 보였다.
“제 동생이 아직 철이 없습니다.”
“아, 아닙니다.”
이번에는 남궁천이 사과했다.
남궁천의 사과에 반고는 당황해서 허둥지둥거렸다.
사과를 마쳤고, 저녁에 다시 볼 것도 약속했지만, 반고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쭈뼛거렸다.
“혹,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 식전이긴 합니다.”
“어제 어머니께서 다소 날 선 반응을 보인 거 같다며, 아침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자 하셨는데, 괜찮으신지요?”
“식사는······.”
남궁천은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특히 비령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딱히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반고도 그 사실을 눈치챘다.
“어차피 한번 권해 보라 하신 것이니, 부담은 안 느끼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가죠.”
남궁천이 거절하려 했으나, 시후가 그의 말을 끊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상하 관계는 아닐지라도, 시후는 이 무리의 구심점이었다.
“난 찬성이에요.”
남궁미는 당연히 시후의 의견에 찬성했다.
제갈려와 남궁천은 동시에 어깨를 으쓱이며 한발 물러섰다.
기권이다.
그에 반해 반대는 명확했다.
비령은 고개를 저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난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 없어.”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지.”
“미아 혼자만 찬성했잖아?”
비령의 말에 다들 쓴웃음을 지었다.
시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난 안치냐?”
* * *
객잔에서 반고 집까지는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집은 크지 않았다.
아니, 주변 집과 비교한다면 큰 편에 속하긴 했다.
아무리 못해도 중견 세가 수준의 규모 정도는 되었으니깐.
반고가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안은 특이했다.
건물들이 담을 따라 쭉 지어져 있었다.
덕분에 중앙에 있는 연무장은 집 크기와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넓어 보였다.
“이쪽입니다.”
반고는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구석진 건물로 안내했는데, 음식을 만들고 있는지 뿌연 연기가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제갈려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많이 조용하네요.”
“아, 가끔 청소를 도와주는 시비를 고용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와 저밖에 없습니다.”
반고의 말에 다들 주변을 둘러봤다.
못해도 백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공간에 단둘이 살아간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고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난주에서 이만한 연무장을 가진 집이 없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관리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겠네요.”
“아, 물론 어머니 혼자서 이 넓은 곳을 맡으실 순 없으니, 청소를 도와주는 시비를 고용하긴 하죠.”
반고의 말에 비령은 뭔가 맘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삐쭉거렸다.
가난으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그녀로선, 이를 돈 낭비라 생각할 것이다.
불만을 가질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느 정도 연기가 올라오는 건물로 다가가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반고의 모친은 문을 열어 준 뒤,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반고는 모두 들어갈 때까지 문을 잡아 주었고, 시후와 함께 가장 뒤에서 걸었다.
“그리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어머니께선 요리 솜씨가 좋지······.”
시후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반고가 몸을 한차례 떨었다.
필시 전음을 받았을 것이다.
눈을 마주친 반고가 어색하게 웃었다.
복도를 따라 방에 다다르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식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아침 식사로 부담이 될 기름진 음식도 적었고, 종류 또한 다채로웠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낌새를 보일 때 말려야 했는데, 말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이가 또래의 강호인을 처음 봐서 반가운 마음에 그랬으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식기 전에 드십시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남궁천의 말에 반고의 모친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반고의 모친이 젓가락을 들자, 다들 앉은 자리에서 짧게 고개를 숙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음식을 하나 집어 먹은 시후는 곧 반고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지만, 꼭 맛있으라는 보장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시후의 생각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다들 젓가락질이 시원치 않았다.
“음식은 사십 년을 넘게 해도 별반 나아지지 않더군요.”
다들 어색하게 웃어 주다가 표정이 굳어졌다.
사십 년.
나이가 사십이 넘었다는 말인지, 음식을 만들어 본 지 사십이 넘었다는 말인지 불명확했다.
특히 비령은 유난히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본 반고의 모친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너로구나.”
비령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경지와 비교하면, 기세를 매우 잘 읽는구나. 어디 문하더냐?”
“현월문입니다.”
비령은 위축됐음에도 목소리만은 또박또박했다.
그 대답에 반고의 모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송의 제자더냐?”
그 질문에 비령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검후의 본명을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름을 쉽사리 꺼낼 수 있는 자는 그보다 더욱 적었다.
- 102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