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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98화 (80/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98화 난주행 (1)

“그래서?”

“뭘 그래서야?”

시후는 제갈려의 질문에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슬쩍 바라보자, 달빛 아래 잔뜩 부풀어 오른 볼이 눈에 띄었다.

“내가 고른 건 알려 줬잖아? 너도 알려 줘야 공평하지.”

“내가 말해 달라든?”

“그건 아니지만, 그······ 뭐랄까. 우리의 관계가 좀 더 돈독해지기 위해선······.”

“충분히 돈독해진 거 같아.”

제갈려는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시후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거부했다.

그 후로 몇 번이고 알려달라고 칭얼거렸음에도, 시후는 한결같은 태도를 보이며 거부했다.

하지만, 제갈려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었다.

이대로 뒀다간 밤새도록 시달릴 게 분명했기에 시후는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왜 그런 걸 고른 거야?”

“그런 거라니?”

“용상에 있던 금룡천잠의나 나오기 직전에 발견했던 만변기 같은 게 좋지 않아? 고작 시집이라니.”

“고작 시집이라고!? 이 난정서(蘭亭序)가!?”

발끈하는 모습을 보니 화제 전환에 성공한 것 같다.

문제는 이전보다 더욱 시끄러워졌다는 점이다.

“이것 보여? 행서의 극에 달했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이 글자가? 같은 글자는 있어도 똑같이 쓸 글자는 단 한자도 없는 서성 왕희지 선생님의 글자를 보고도 그런 말을······.”

어차피 혼잣말에 가까운 이야기일 테니 시후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걸었다.

하지만, 제갈려는 적당히 하지 않았다.

가만히 뒀다간 밤새도록 떠들겠다 싶었다.

“이제 쓸 일 없을 거 같으니까 이거 가져가.”

측천파흑선을 건넸다.

황릉으로 진입하며 봉인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다만, 이제는 시후에겐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

어차피 황릉으론 다시 못 들어갈 테고, 소지할 때 지니는 이점은 시후에겐 의미 없는 능력이었다.

오히려 제갈려가 가진다면 몇 곱절은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주긴 조금 이른 감이 있었다.

하지만, 품에서 썩게 놓아둘 바에 제갈려의 손에 들어가야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저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다물게 하는 덴 이것보다 좋은 물건이 없었다.

“진짜? 무르기 없어!”

제갈려는 얼굴을 바로 코앞까지 들이밀며 물었다.

눈은 초롱초롱하다 못해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어깨를 쭉 밀어냈다.

“그거 들고 진법 펼치면 몇 배는 견고해질 거야. 집중력도 어마어마하게 올라갈 거고.”

“느껴져······.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언제?”

“왜인지 물으면 나도 모르고, 언제냐면 무자비에서 나온 빛을 흡수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지.”

“와······. 그럼 이건 달의 힘이 깃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니, 그쪽 계열 진법을 펼칠 때 효과적이겠는데?”

제갈려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 측천파흑선은 그녀에게 ‘측천무후의 필체가 담긴 고풍스러운 부채’에 불과했다.

하지만, 봉인이 풀린 지금은 ‘영기(靈氣)가 느껴지는 신묘한 부채’로 인식이 바뀌었을 것이다.

제갈려는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히죽거리며 측천파흑선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시후도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침묵은 먼동이 희끄무레 밝아오기 시작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보다,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시후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물었다.

두서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제갈려는 단박에 알아차린 듯 인상을 찌푸렸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했다.

황릉 돌파라는 목적을 위한 협력관계.

그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이제 둘 사이를 이어줄 끈은 사라졌다.

“그걸 지금 물어야 해?”

제갈려가 톡 쏘듯 물었다.

그 말도 맞다.

아직 서안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성급했다.

하지만, 시후는 짚고 넘어가야 할 시기라 생각했다.

돌아갈 마음이 있다면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며 뭉그적거릴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미리미리 이야기하자는 거지. 이 대화를 비령을 옆에 두고 할 거야?”

“그건 아니지만······. 혹시,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만 가라는 말이야?”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갈 생각이 있더라도 조금 더 남아 줬으면 좋겠어.”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갈려는 낮게 비명 지르듯 물었다.

시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별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네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말을 마치고 나자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시후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발언을 되짚어 봤다.

그리고 제갈려의 얼굴을 바라봤다.

차가운 대지를 데워 주는 햇살의 등장 때문일까?

아니다.

단언컨대 그 때문은 아니었다.

시후 자신의 발언에 분명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나, 나는······.”

“잠깐.”

시후는 다급히 제갈려의 말을 끊었다.

두 손을 들어 올려 진정하라는 시늉했다.

“내 말은 네가 가면 비령이랑 단둘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검후가 바라는 상황이 아닐 거 같단 말이지. 게다가 배교의 일도 아직 완벽히 끝난 게 아니잖아?”

시후의 말에 제갈려의 입꼬리가 괴이하게 비틀렸다.

웃음 짓는 것 같기도 하고,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시후의 감각은 후자라고 외쳤다.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 * *

“이제 코앞인데······.”

시후는 일부러 혼잣말을 크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슬쩍 곁눈질로 훔쳐봤지만, 여전히 제갈려의 표정은 싸늘했다.

무안한 마음에 애꿎은 말 옆구리를 살짝 걷어찼다.

그런 시후의 심술에도 흑마는 투정 없이 속도를 유지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갈기를 쓰다듬었다.

마장에서 관리를 잘했는지 윤기가 흘렀다.

돈을 제법 쥐여 준 보람이 있었다.

어색하게 걷던 사이, 서안 성내에 들어왔고 빌렸던 장원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시후는 제갈려에게 말을 거는 걸 포기하고 장원으로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오는 걸 연락받은 것인지 몰라도, 말에서 내리기 무섭게 시비가 문을 열고 나왔다.

말 고삐를 건네주는데 표정이 매우 밝아 보였다.

그 시선을 눈치챈 시비는 밝게 웃으며 안을 가리켰다.

“마침 아침에 방에서 나와 씻을 물을 준비해 달라고 해서 아직 씻고 계십니다.”

“혹시 우리가 어디 갔는지 물어본 적 있나?”

“없습니다.”

시기적절하게 도착했다.

뒤를 돌아보니 제갈려도 어느새 말에서 내려왔다.

입을 맞춰야 했다.

“잠시, 비림에 다녀온 거야.”

“오늘 아침 일찍 말이지.”

“그전까지는 방해되지 않게 자리를 피해 있던 거고.”

“연락을 받자마자 황급히 돌아온 거야.”

며칠간 동고동락한 탓일까.

손발이 척척 맞았다.

안채로 들어가서 비령이 씻고 나오길 기다렸다.

아직 씻고 있다고 했으니 곧 나올 것이다.

예상대로 차 한잔을 비우는 사이 비령이 나타났다.

불그스름한 뺨과 촉촉한 머리칼은 막 목욕을 끝낸 티가 역력했다.

“축하해.”

“아, 고마워.”

“정리는 잘한 거야?”

“물론이지.”

시후의 물음에 비령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진 않았다.

자세히 살피면 요동치는 기운이 느껴졌지만, 확실히 살짝살짝 물이 튀는 정도에 불과했다.

깨달음을 완벽히 정리하고 나면 고요해질 것이다.

이전보다 훨씬 깊고도 고요하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안 보이던데 어디 갔다 온 거야?”

눈치를 보니 으레 던지는 말에 불과하다.

제갈려에게 눈짓을 보냈다.

“너 방해될까 봐 조용히 비림이나 다녀왔지. 왜 서운했어?”

“아냐, 서운할 게 뭐 있어.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지.”

“미안할 게 어딨어? 우리도 이 기회에 서안 구경 좀 하면서 놀았는걸.”

“그래도 나 때문에 이곳에서 며칠간 발이 묶인 건 사실이니깐······.”

“아냐, 정말 괜찮아.”

자신이 더 미안하다며 경쟁 아닌 경쟁을 하는 가운데, 비령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후와 제갈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위아래를 쭉 훑었다.

곧 코를 킁킁거리더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두 사람 옷도 그대로고······. 그날 이후로 씻지도 않은 거야?”

비령의 말에 제갈려는 평정이 깨어진 듯 요동치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얼굴은 비령을 향했지만, 그 시선은 갈 곳을 잃어 방안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어? 그, 그게······.”

“옷이야 한 번 입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니, 갈아입다 보면 같은 옷이 나오는 건 당연한 거지. 그리고 땀 좀 흘릴 수 있는 거 아냐? 네가 나왔다는 소리에 비림에서 급하게 달려왔는데, 고작 땀 냄새가 난다고 타박하는 거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밖에 있죠? 따뜻한 물 준비해 줘요! 야, 너도 나와. 어디 냄새나는 데 여기 앉아있어?”

시후는 비령이 뭐라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바로 제갈려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며 방을 나섰다.

비평이 뒤따라 나오려 했지만, 시후가 거칠게 문을 닫았기에 그러지 못했다.

문 너머 기척을 확인해보니 안절부절못하는 게 여과 없이 전달됐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친 다음 동시에 소리 없는 한숨을 토해냈다.

* * *

“내일 감숙으로 갈 거니깐 알아 둬.”

시후의 통보에 가까운 말에도 비령은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생각보다 제갈려도 연기를 잘해 주었다.

비령이 잔뜩 풀이 죽은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시후는 슬쩍 장원을 빠져나왔다.

실영보를 익히긴 했지만, 활성화하기 위해선 제대로 펼칠 공간이 필요했다.

지도에서 마땅한 장소가 있는지 찾아보자, 바로 근처에 기초 무관이 있었다.

위치를 확인한 뒤 시비를 찾았다.

“내가 부탁한 건?”

“내일 점심 중으로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곤란하다.

시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일 감숙으로 갈 건데 중간쯤에서 받아보는 거로 부탁할게.”

“배를 타고 가실 예정입니까?”

“천수까지는 배를 타고 가려고.”

“그렇다면 천수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시비의 대답에 시후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난주에 도착해서도 받아도 상관없지만, 계획을 세우려면 미리 받아보는 편이 좋다.

“말들은 딱히 관리가 필요 없을 테고, 아침 일찍 배를 탈 거니깐 간단한 요깃거리와 육포 몇 조각 좀 준비해 줘.”

시비는 말없이 물러났고, 시후는 곧바로 기초 무관으로 향했다.

쭉쭉 떠오르는 창을 죄다 꺼버린 뒤 몸을 풀었다.

“실영보 활성화.”

[고금 등급의 무공입니다. 바닥에 새겨지는 족적의 순서에 맞게 움직이면 무공이 활성화됩니다. 본 족적은 10초 후부터 순차적으로 생성됩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절정의 백후원보를 익힐 때 적잖이 고생하긴 했지만, 그건 신법 특유의 괴이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이번엔 자신 있었다.

[실영보의 족적이 나타납니다.]

발자국이 새겨졌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아주 가느다란 호흡이 이어졌다.

그마저도 점차 느려지더니 거의 숨을 쉬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발자국은 끝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시후는 처음 발자국이 생겼던 위치에 섰다.

그리고 아주 느릿느릿 한 걸음씩 옮겼다.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머릿속에 욱여넣은 기억을 고스란히 꺼내어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열, 스물, 오십.

내딛는 걸음이 더해질수록 시후의 뺨에 맺힌 땀방울은 그 굵기를 더해갔다.

굵은 땀방울이 바닥을 촉촉하게 적시다 못해 작은 웅덩이를 만들 때쯤.

[고금 등급의 무공을 최초로 습득하셨습니다. 내공 한계치가 10 상승합니다.]

[실영보가 활성화됩니다.]

[상위 무공이 활성화되어 기존 백후원보는 자동으로 비활성화됩니다.]

- 99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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