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97화 측천무후의 황릉 (5)
제갈려는 문을 반쯤 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여기 들어온 지 며칠째지?”
“이틀하고도 열 시진 반 각쯤 흘렀을 테니, 이제 막 해시로 들어섰겠네.”
제갈려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말문이 턱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제갈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문을 밀었다.
둥근 공간이었다.
가운데 바닥에는 큼지막하게 ‘애통(哀痛)’이라 적혀 있었고 사방에는 문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방이 아니라 육방(六方)이다.
지금 이 둥근 공간에는 여섯 방향으로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기 문에는 이름이 있었다.
“홍익, 무명, 현덕, 현신, 단천, 월영이라······.”
제갈려는 문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오래 고뇌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알고 있다.’
시후는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제갈려가 깜짝 놀라며 소매를 잡으려 했지만, 시후는 그보다 빨리 팔을 들어 주변의 문을 가리켰다.
“이름이야. 무후 자식들의 이름.”
제갈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후는 이어서 설명했다.
“월영은 무후의 막내딸이지. 그리고 무후의 아들들은 각기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현(李顯), 이단(李旦)으로 이름이 외자인데 저 문을 보면 각기 앞에 그 이름이 들어가 있는 거 보여? 단순히 뒤에 한 글자 추가해서 의미를 부여한 거야.”
“아! 그렇다면······.”
제갈려의 시선이 두 번째 문으로 향했다.
무명문(無名門).
무후의 둘째 아이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도 짓기 전에 죽었으니깐.
그녀가 성큼성큼 무명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다면 여기가 맞겠네?”
“그렇지.”
답은 알아냈지만, 제갈려는 바로 문을 열기보다는 혹시라도 숨겨진 무엇인가를 찾으며 두리번거렸다.
어차피 여기에 숨겨놓은 건 없기에 시후는 대충 찾는 시늉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결국, 제갈려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무명문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돌연 죽었으니, 무후가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틀렸다.
둘째는 무후의 손에 죽었다.
그 죽음을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왕 황후에게 덮어씌워 제거하였고, 그로 인해 황후에 올라 정치적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둘째의 죽음을 이용한 것이다.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인 비정한 어미라 손가락질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대로 잠자코 있었다면 필시 왕 황후의 아들인 이충이 황위에 올랐을 때, 그녀는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모두가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론 둘째를 희생하여 모두를 지켰다.
다만, 제 손으로 자기 자식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얼른 가자.”
제갈려가 잘못 알고 있었지만, 굳이 정정해 주진 않았다.
어찌 알고 있던 이 문을 지나는 게 옳은 선택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으니깐.
제갈려는 문 앞에서 짧게 합장한 뒤 힘차게 문을 밀어젖혔다.
“어?”
문을 열자마자, 제갈려가 얼빠진 목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봤다.
이전과 달랐다.
안은 마치 집안처럼 꾸며져 있었다.
제갈려가 주춤거리는 사이, 시후는 그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리고 곧장 왼쪽으로 틀어 화장대 위에 놓인 거울 방향을 살짝 돌려놓았다.
시후는 주변을 둘러봤다.
거울은 곳곳에 있었다.
거침없이 거울을 휙휙 돌렸다.
뒤늦게 제갈려가 다가와 물으려 했지만, 시후는 이미 방에 있는 거울을 죄다 돌려놓은 뒤였다.
“무슨 짓을······.”
제갈려는 할 말을 잊었다.
거울은 천장에 박힌 각각의 야명주 빛을 반사했다.
그 빛이 향하는 곳은 정중앙.
정확히 말하자면 빛은 중앙 탁자 위의 향로로 향했다.
사방에서 반사된 빛은 향로의 조그만 구멍으로 들어갔고, 향로에선 연기가 피어올랐다.
뿌연 안개 같던 연기는 탁자 주변을 휘돌기 시작했다.
제갈려는 한참을 넋이나 간 듯 있다가 정신을 차리곤 허겁지겁 다가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왠지 이럴 거 같았어.”
“아니, 보자마자 알아차린다는 게 말이 돼?”
“네가 찾는 걸 보다 보니 익숙해졌어.”
의심의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부터는 시후가 손댄 곳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시후는 의심 어린 제갈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연기 속으로 주저 없이 걸어 들어갔다.
다음도 마찬가지였다.
대충 훑어보는 시늉을 하곤, 기울어진 천칭에 비녀를 올리는 것으로 중심을 잡았다.
제갈려가 답을 찾을 때보다 몇 배는 빠르게 방을 넘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이어지자 제갈려는 시후를 인정했다.
“여기는 어떻게 지나가야 할까?”
“저기 기울어진 천칭 보이지? 저기 위에······.”
“잠깐만, 이번에는 내가 추측해 볼게.”
천칭이라는 단서를 쥐어놨으니 제갈려도 금방 답을 찾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갈려는 기울어진 천칭에 옥비녀 하나를 올려놓아 균형을 맞췄다.
시후는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 않는 수준으로 제갈려에게 기회를 주며 나아갔다.
“문?”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문이었다.
이전 무후의 자식들의 이름을 딴 문처럼 각기 문 위에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문의 숫자는 수십에 달했다.
그중 가장 가운데 가장 거대한 문 위에 적힌 이름은 다름 아닌 무후의 남편이자, 당나라 3대 황제에 올랐던 고종 ‘이치(李治)’였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너른 공동 가장 높은 곳에 걸려있는 현판에 적힌 글귀였다.
[일인일문에 일인일물이니, 그 이상 탐하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하리.]
모든 방엔 각기 다른 물건이 있다.
그중 물건은 한 가지만 고르고 나갈 수 있기에 선택은 신중해야 했다.
제갈려도 현판을 올려다보더니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돼? 고작 하나 가져가려고 내가 이 고생을 한 줄 알아?”
씩씩거리는 모습이 절대 곱게 나갈 것 같진 않았지만, 시후는 내버려 뒀다.
어차피 두 개를 잡으려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쥐지도 못할 것이다.
제갈려는 씩씩거리며 고종의 이름이 적힌 방으로 들어갔다.
저 방은 돈이 되는 물건은 가득하겠지만, 정작 시후에게 필요한 실속 있는 물건은 없었다.
시후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적인걸(狄仁杰).
무후가 가장 총애했고 신뢰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
일평생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무후였지만, 그에게만큼은 양보하며 뜻을 굽혔다.
무후는 그를 ‘국로(國老)’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고, 그가 늙은 아픈 무릎을 핑계 삼아 사직을 청했으나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며 절을 올리지 않아도,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했을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시후는 그런 그의 문 앞에 섰다.
곧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진득한 묵향(墨香)이었다.
그다음으론 빼곡히 자리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의 모든 책을 한곳에 모은 듯했다.
시후는 그런 책들을 지나쳐 가장 안쪽에 자리한 사당으로 향했다.
위패가 놓여 있었다.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양국공(梁國公) 적인걸]
길기도 더럽게 길다.
시후는 옆에 놓인 향 하나를 주워들곤 품에서 화섭자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향에서 나온 연기는 위패를 맴돌더니 곧 시후의 몸을 휘감았다.
[‘적인걸의 위패’에 예를 차렸습니다.]
[‘측천무후의 방’이 개방됩니다.]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지만, 공동 중앙의 바닥이 꺼지기 시작했다.
시후는 적인걸의 위패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주저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은 제법 길었다.
길고 긴 계단의 끝자락까지 내려서자 내부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석주(石柱)가 중간중간 천장을 받쳤고, 그 석주에 조각된 용은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듯 생동감이 넘쳤다.
사방에는 금은보화가 흩뿌려져 있었고, 그 무엇하나 화려하지 않은 물건들이 없었다.
시후는 수많은 보물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운데 높이 쌓아 올린 단(壇)에 올라서자,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 무조(武曌)라 적힌 위패가 놓여 있었다.
시후는 위에 옆에 적인걸의 위패를 조심스레 놓았다.
몸을 맴돌던 연기가 위패로 옮겨가더니 그대로 스며들었다.
[무후의 축복으로 선택할 수 있는 보상이 두 개로 늘어납니다.]
제갈려의 말마따나 보상이 너무 적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 없이 바닥에 뿌려진 금화 같은 걸 주워들지 않는 이상, 한 개 한 개의 물건은 그 값어치를 톡톡히 한다.
찾아보면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자운유성창 같은 물건이 십수 개는 더 나올 것이다.
“여긴 뭐야!”
뒤를 돌아보자 제갈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지팡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래를 훑어보는 그녀의 눈에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곧 울상으로 변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하나 이상을 집어보려고 엄청난 시도를 했던 게 분명했다.
“갖다 놓고 와.”
“어? 그래도 괜찮을까?”
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제갈려는 후다닥 위로 올라갔다.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럴 리 없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제갈려가 챙길 수도 있었다.
시후는 뒤편 대전(大殿)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대전으로 들어가자마자 좌측으로 꺾었다.
용상(龍床)에 걸쳐진 금룡천잠의(金龍天蠶衣)는 무척이나 탐나는 물건이지만, 시후에겐 저것보다 더욱 필요한 물건이 있었다.
무후의 개인 서재로 들어왔다.
일평생 모았던 서책들을 그대로 가지고 왔기에, 서재의 공간은 대전의 삼분지 일을 차지했다.
시후는 기억을 더듬어 책장을 살피다가 손을 뻗어 한 권을 빼냈다.
그 상태로 잠시 가만히 있자 책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실영보(失影步)를 익혔습니다.]
익힌 무공을 확인하려는 찰나, 대전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후가 인기척을 내자마자 제갈려는 후다닥 서재로 들어왔다.
“와······. 무슨 책이······.”
제갈려는 넋이나 간 듯 책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함부로 뽑아 들진 않았다.
겉을 매만지는 건 상관없지만, 안에 내용을 읽는 순간 보상으로 간주할 거란 걸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제갈려가 제목을 음미하듯 한자씩 천천히 훑어보는 사이, 시후는 슬금슬금 서재를 나섰다.
워낙 집중하는 통에 자신이 나온 것도 모르는 듯했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시후는 대전을 빠져나와 가장 가까이 자리한 석주로 향했다.
“여긴가?”
자세히 보니 아니다.
천장을 받치고 있는 석주는 총 아홉 개가 있었는데, 시후가 찾는 석주는 다섯 번째 석주였다.
석주에 조각된 용의 꼬리를 타고 허리까지 오르자, 내부가 숨겨진 글자가 보였다.
지금 시후가 있는 위치에서 아래에 보이는 길에 먹을 뿌린다면, 한가지 글자로 완성될 것이다.
조(曌).
밝을 명(明) 아래 빌 공(空)을 넣어 무후가 직접 만든 문자이자, 그녀의 이름으로 쓰인 글자가 보였다.
그리고 시후의 눈에는 유독 밝은 한 곳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시후는 위치를 몇 번이고 머릿속에 되새겼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외운 다음에야 석주 아래로 내려갔다.
최단 거리로 나아갔다.
근처에 도착한 뒤, 확인해 두었던 지물을 둘러봤다.
해태와 기린의 사이.
다만, 기린에 가깝게.
그 상태에서 조금 더 담벼락으로 걸었다.
얼굴을 거의 땅에 처박듯 나아갔다.
어느 순간 눈이 부셨다.
시후는 뺨을 땅에 그대로 붙이곤 다른 방향을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빛이 눈을 간지럽혔다.
시후는 즉시 몸을 일으켜 창으로 땅을 찔렀다.
그리 강하게 찌르지 않았음에도 바닥엔 금이 쫙쫙 번졌다.
창을 내려놓고 손으로 돌 조각을 살살 치우자, 밑에는 삭을 대로 삭은 목함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 98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