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64화 모용세가 (4)
흑백선자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악착같이 뛰었기에 금방 대 연무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대 연무장 안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검후는 다시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를 본 흑백선자는 머리를 붙잡은 채 도리질을 해 댔다.
곧 드러날 거짓말을 왜 하겠느냐는 눈빛이었다.
그 사이, 운허는 검을 뽑은 채 대 연무장 담벼락에 올라섰다.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검을 놓쳤다.
“이, 이게 무슨······.”
그의 요동치는 감정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정확히 전해졌다.
충격과 공포, 혼란스러운 감정을 잔뜩 담은 그의 뒷모습에 시후와 검후 등은 너나 할 것 없이 담벼락에 올라섰다.
전투가 끝났지만, 정의맹 인원들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운허가 대 연무장으로 내려섰다.
그는 곧바로 내공을 잔뜩 끌어올려 진각을 밟았다.
흥분하여 조절을 잘못했는지, 전방에 바닥이 깨어져 돌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덕분에 분주히 움직이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게 뭣들 하는 짓이냐!”
운허는 당장에라도 울 듯한 얼굴로 비명처럼 외쳤다.
대 연무장의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강시의 목과 사지를 자르고 있었다.
“크크큭.”
목불인견의 참상을 지켜보던 흑백선자가 입이 더 찢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본 검후는 그의 머리끄덩이를 뒤로 잡아당겼다.
볼이 쭉 찢어진 탓에 그의 머리는 기이한 각도까지 뒤로 젖혀졌다.
“크어어어어!”
“아혈을 점하지 않은 건 다 이런 이유가 있어서다. 즐겁더냐? 그럼 실컷 웃거라. 나도 네 비명을 들으니 즐겁구나.”
검후가 조금만 더 강하게 잡아당긴다면, 중력에 의해 흑백선자의 뒤통수와 목이 닿을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흑백선자는 안간힘을 쓰며 머리를 붙들고 있었다.
그 괴기스러운 모습에 강시의 목을 자르던 인원들은 주변을 둘러보곤 팔을 떨구었다.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누가 이런 덜떨어진 명령을 내렸지?”
검후의 목소리는 대 연무장 전체에 퍼졌다.
누구 하나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은 없지만, 모두의 시선은 한곳을 향했다.
수백 쌍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교초혼 장로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다가왔다.
어찌나 열심히 강시들을 베어 넘겼는지, 그의 검은 검게 죽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화산? 조만간 양가 이 개자식을 보러 가야겠군.”
검후가 말하는 양가는 아마도 화산의 장문인 양적림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 수많은 귀가 듣고 있는 가운데 화산의 장문인을 개자식이라 불렸지만, 교초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멸문해 버린 모용세가에서 따지지는 못하겠지만, 그가 속해 있는 화산에서는 이 결과를 놓고 어떻게 생각할까.
교초혼이 애써 변명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보다 한발 먼저 나선 사람이 있었다.
“내가 분명히 운허 장로님이 강시 술사를 처리한 거 같다고 말했는데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한다면서 저렇게······.”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갑자기 나타난 제갈려가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다만, 그 귓속말은 검후의 귀까지 들렸기에 그녀의 몸에선 싸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덕분에 교초혼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시후 일행에게 추나행이 다가왔다.
그는 육체적으로 피곤하기보다는 정신적으로 피폐해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추나행의 인사에 검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장 입이 쭉 찢어진 흑백선자를 바라봤다.
“이자가 강시 술사입니까?”
시답잖은 안부를 묻는 건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검후도 허례허식을 중시하는 인물은 아니었기에, 흑백선자의 등을 뻥 차서 앞으로 밀었다.
“고문을 해서라도 알아볼 게 있으면 알아봐라.”
“물론입니다.”
“내공을 금제해 놨으나, 한 시진 후면 풀릴 것이다. 단전을 박살 내든지 약을 먹이든지 맘대로 하거라.”
친절한 그녀의 설명에 추나행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흑백선자를 데려갔다.
화산파 제자들은 넋이 나간 교초혼을 부축하여 자리를 떴다.
덕분에 정리는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었다.
“망자의 시신이 뒤섞이지 않도록 주의해라! 혹시라도 모르니 이인 일조로 움직여, 멀쩡한 강시를 이쪽으로 옮겨라.”
교초혼이 없으니, 목일자의 말에 딴지를 걸 인물도 없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정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애초에 멀쩡히 남은 강시가 얼마 없었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자 목일자가 다가왔다.
대부분 병장기에 진득한 검은 피를 묻히고 있는 것과 다르게, 그는 피곤한 기색은 있을지언정 검날은 깨끗했다.
검후는 그런 목일자를 바라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시선에 목일자는 얼른 검을 집어넣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네가 책임자는 아니겠지?”
“딱히 누가 책임자라는 건 없지만, 사단 중 현무단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음······.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데 무공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낮아도 너무 낮은데?”
과거 천비령이 용봉지회에서 보여줬던 개념출타화법(槪念出他話法)의 기원을 찾았다.
하긴, 그녀가 배우면 어디서 배웠겠는가.
악의 없는 어투였지만, 목일자의 얼굴은 붉게 타올랐다.
“넌?”
시후는 갑작스러운 검후의 지목에 당황하여 바로 대답하질 못했다.
대신, 시후의 대변인으로 천비령이 나섰다.
“사부님, 제가 일전에 말씀드린 적 있죠? 요번 용봉지회에서 검을 섞었다가 저기 제남까지 같이 온 창수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 검후는 천천히 시후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아이를 만났을 때, 비령과 좋은 경쟁자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이 녀석도 만만치 않구나. 낭인이라고 했더냐?”
“낭인이긴 하지만······. 지금은 황제의 명으로 암약하는 무리를 뒤쫓고 있죠.”
“황실의 개?”
검후의 직설적인 표현에 시후는 할 말을 잃었다.
시후는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주워 담으며, 이 골 때리는 아군을 활용할 방법을 모색했다.
* * *
정리를 마친 뒤, 시후는 흑백선자를 심문하고 있던 추나행을 찾아갔다.
흑백선자의 몰골은 정상이 아니었다.
분근착골(分筋錯骨)의 경우 촌각을 펼치더라도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기 마련이다.
하물며 반 각도 아닌 일각 동안 펼치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
“윽······. 냄새.”
소변은 물론이거니와 대변까지 지려 버린 흑백선자의 모습에 비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흑백선자의 찢어진 입가에는 피거품이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검후가 지풍을 날려 분근착골을 해제해 주었다.
“아직 안 불었지?”
“그렇습니다. 아주 지독한······.”
“고작 분근착골만 행하니깐 문제지.”
검후는 비령에게 손을 뻗어 봇짐을 받은 뒤, 안에서 나무통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한 뼘 길이는 될 법한 긴 대침부터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침까지, 다양한 길이의 침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히 분근착골만 하면 별로 안 아파하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반응도 영 시원치 않단 말이야.”
그 모습에 흑백선자가 뭐가 말을 하려 했지만, 검후가 지풍으로 아혈을 점하는 게 훨씬 빨랐다.
검후는 대침을 가볍게 튕겼다.
대침이 흑백선자의 고관절을 관통했다.
흑백선자의 몸에 팔십여 개에 달하는 침이 꽂히는 데는 일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분근착골을 하면 행복의 노래를 부른단 말이야.”
검후는 지독했다.
흑백선자가 눈을 좌우로 굴렸지만, 검후는 그 눈을 무시한 채 분근착골을 감행했다.
십 초도 지나지 않아 흑백선자가 까무러쳤지만, 검후는 진기를 주입하여 다시 깨웠다.
검후는 이 순서를 세 번 반복하고 나서야 분근착골을 풀어 주었다.
“이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된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검후의 해맑은 미소에 시후는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 옆에는 비령이 잔뜩 인상을 구긴 채로 서 있었다.
“네가 이 정도라서 다행이야.”
“무슨 의미야?”
비령의 물음에 시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북경에서 비령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비령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저렇게 덩어리져 꿈틀거렸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기 싫었으니깐.
약간의 잡담을 나누는 사이, 흑백선자는 눈동자를 미친 듯이 위아래로 움직였고, 검후는 곧바로 아혈을 풀어주었다.
“나, 나는 배교의······.”
흑백선자가 곧바로 실토하려고 했지만, 검후는 다시금 아혈을 점했다.
“고독에 걸리지 않는 수준부터 말해. 숨겨야 할 비밀은 나중에 한 번에 말해 주면, 고통스럽지 않게 목을 잘라 줄 테니까.”
뭔가 대단한 선심을 쓰는 듯한 말에 흑백선자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검후가 다시 아혈을 풀어 줬음에도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원래 당사자는 알기 어려워. 이미 내기와 동화가 돼 있거든.”
“나, 나 정도 위치에 있다면······.”
“실험해 보기엔 너무 고통스럽지 않겠어? 나도 얻는 게 있어야 네 고통을 덜어 주던가 할 텐데 말이야.”
검후의 말에 흑백선자는 고개를 떨궜다.
배교의 고독은 머릿속에 잠들어 있다가, 비밀을 실토하는 순간 신경을 갉아 먹는다.
그 통증을 겪어 보진 못했지만, 방금 당한 분근착골에 비해 수십 수백 배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선택해.”
그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개였다.
결말은 하나지만.
“우리는······.”
* * *
엉망이 되어 버린 모용세가를 정리하는 데는 꼬박 사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다른 건 둘째치고 토막이 난 시체를 묻어 주는 것에 가장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조심히 실어.”
거의 맨몸으로 왔지만, 그들이 모용세가를 나설 때는 짐 마차 두 대가 필요했다.
마차 뒤에는 때깔 좋은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관(棺)이 실려 있었다.
온전한 시체는 다섯 구에 불과했기에 모조리 하남으로 운반키로 했다.
“고독이라······.”
추나행은 마차 위에서 흑백선자가 발작 직전에 읊었던 말을 되뇌고 있었다.
모용세가를 어떻게 멸문시켰냐는 질문에, 고독이라는 말만 남기고 발작을 일으켰기에 숨을 끊어 주었다.
그렇기에, 조금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동원해 부검하기로 했었다.
행렬의 분위기는 처음 요녕에 들어섰을 때 보다 더욱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도망치는 것 같군.”
추나행의 중얼거림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모용세가를 떠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으니깐.
그의 말에 목일자는 뒤를 돌아봤다.
“당장에 배교도 그렇지만, 세 외 무림들이 그 빈자리를 치고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 점이 걱정이긴 하나, 장백파에서 조금 더 신경을 써 주면 괜찮지 않겠소?”
“워낙 폐쇄적인 집단인지라······.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나라가 다른데, 그들이 이쪽을 신경 써 준다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끄응······.”
목일자의 지적에 추나행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지적대로 추나행의 말은 바람에 불과했다.
“게다가 모용세가가 일시에 당했다는 걸 상정한다면, 배교의 힘이 상상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고독으로 어떻게 모용세가를 집어삼켰는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겠군.”
“아무래도······ 모르는 상태에서 당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게 없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두 사람과 달리, 시후는 다른 의미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무공이 여전히 부족하게 느껴졌다.
엄밀히 말하면, 파양도와 흑백선자는 시후가 상대해야 하는 인물이 아니었지만, 모든 건 핑계에 불과했다.
실력으로 따지면 이제 겨우 천비령과 비등한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겠는가.
안정적인 성장이 아니라, 위험을 감내할 시점이 온 것 같았다.
- 65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