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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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모용세가 (3)
태극혜검.
무당의 수많은 무공 중 다섯 개를 고르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손에 꼽을 무공이었다.
하늘(天)과 땅(地), 양(陽)과 음(陰)이 그렇듯, 세상 만물은 제각기 그에 대응하는 짝이 있기 마련이었다.
태극은 양과 음이 하나로 어우러진 것을 의미했다.
그와 같이 태극혜검은 모든 공격을 받아들여, 자신과 하나 되어 어우름을 바탕으로 하는 무공이었다.
‘태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태극혜검은 방어할 때 빛을 발휘하는 무공이었다.
“큭.”
하지만, 운허는 태극혜검을 펼쳤음에도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세상천지를 뒤져 봐도 태극혜검의 방어를 뚫을 무공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그 말은 못 뚫을 것도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대표적으로 지금 그의 눈앞에 펼치는 광참절검(光斬絶劍)이 그러하였다.
빛을 베고 끊어 버린다는 이 광오한 무공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물론, 무공을 펼치는 사람 간의 수준이 같았다면 태극혜검이 버텼겠지만.
“흡!”
운허는 태극혜검의 초식 중 하나인 운산등령(雲散登嶺)을 펼쳤다.
그의 검이 구름처럼 흩어지며 잔영을 만들었다.
구름이 흩어졌으니, 산을 올라야 하는 법.
운허의 검은 맞닿은 흑백선자의 검을 거슬러 올라갔다.
상대의 지독할 만큼 빠른 쾌검을 막기 위해선, 상대의 검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이 상태로 등천감하(登天瞰下)를 이용해 검을 휘감아 내던지던, 천지절폐(天地絶廢)를 이용해 닿은 면의 내공을 폭발시켜 검을 못 쓰게 함이 옳았다.
하지만, 흑백선자의 검은 그보다 반 박자 빠르게 빠져나갔다.
몇 번이나 비슷한 수법들로 묶어 두면, 상대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분명 처음보다 운허가 잘 버티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착 상태가 불편한 두 사람과 달리, 시후는 지금 현 상황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차라리 뒤로 확 물러나게.”
시후는 뒤에서 보조해 주려 자리를 잡았지만,, 운허는 이마저도 짐처럼 느껴졌는지 멀어지라고 부탁했다.
시후는 다소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운허가 불편하다면 그의 말을 따르는 게 맞았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는 와중에 제갈려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무너진 성벽 근처로 다가갈 때쯤, 대 연무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 순간, 흑백선자는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걷어찼다.
“얕은수!”
운허는 즉시 건원지(乾元指)로 날아오는 돌멩이를 박살 냈지만, 흑백선자의 노림수는 조금이라도 거리를 좁히는 데 있었다.
돌멩이는 그 목적을 달성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운허는 버젓이 자신의 목젖을 찔러 오는 흑백선자의 검을 피해 현천보(玄天步)를 밟으며 검면으로 공격을 흘려 냈다.
그 순간, 흑백선자의 눈이 번뜩였다.
여태껏 운허가 노렸던 방법을 이젠 흑백선자가 역이용하고 있었다.
흑백선자는 흡자결을 운용한 채 운허의 검을 놓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주도권을 넘겨준 건 큰 타격이었다.
운허는 자신의 검에 달라붙은 흑백선자의 검을 떼어내기 위해 손목을 부드럽게 돌렸다.
휙.
상대의 검을 떼어냈지만, 흑백선자의 발이 노렸던 돌멩이는 놓치고 말았다.
그가 차올린 돌멩이가 운허의 안구를 정확히 노렸다.
운허는 급히 고개를 돌려 정통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오른쪽 눈썹 위를 스쳐 지나가며 살가죽을 대차게 갈랐다.
불에 덴 듯한 화끈한 고통은 둘째치고, 흘러내린 피로 인해 순식간에 운허의 오른쪽 시야가 단절되었다.
“헛, 흡!”
졸지에 한쪽 눈을 봉쇄당한 운허의 거리감은 엉망이 되었다.
쓸데없이 동작이 커졌고, 그 빈 곳을 메우기 위해 쓸데없는 검기를 마구잡이로 날렸다.
운허의 위기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흑백선자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흑백선자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검을 찔러 넣었다.
“철판교!”
시후의 외침과 운허의 선택이 일치했다.
하지만, 철판교는 단 한 번의 회피만이 가능했다.
운허의 검이 방향을 틀었다.
“파월아!”
간결하며, 정확하게.
어느새 곁으로 도착한 시후가 흑백선자의 가슴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흑백선자가 목숨을 도외시한다면, 운허의 목에 칼을 꽂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귀어진보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는 길을 택했다.
카앙!
창과 검이 부딪힘과 동시에 담겨 있던 내공이 환하게 흩어지는 장관이 연출됐다.
시후에겐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죽일 수 있었는데.’
시후와 흑백선자는 같은 생각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건방진······. 네놈 따위가 내 바짓단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더냐?”
시후라고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아니,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운허가 밀리는 상대를 자신이 어떻게 버티겠는가.
하지만, 이대로 운허가 죽는 걸 수수방관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믿는 구석도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청홍검.
이 녀석과 함께라면 운허가 지혈할 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시후는 창을 치켜들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 말은 어느 정도 수준이 맞는 상대에게나 통용되는 것이지, 시후와 흑백선자의 차이에선 씨알도 안 먹힐 말이었으니깐.
흑백선자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간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젠장.’
어쩔 수 없이 시후가 먼저 공격을 해야 했다.
언제라도 창을 회수할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고 창을 찔렀다.
흑백선자는 시후의 창을 피하고자 무릎을 굽힌 뒤 상체를 숙였다.
찌르기를 피한 그는 땅을 걷어차며 몸을 옆으로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흑백선자의 검이 시후의 창대를 노렸다.
시후가 창을 잡아당겨 내빼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까가가강!
“뭐라!?”
눈이 시릴 정도로 강기가 둘린 검과 희미하게 어려 있는 시후의 창이 부딪혔지만, 시후의 창이 잘리긴커녕 표면에 긁힌 자국조차 생기지 않았다.
놀란 흑백선자가 그대로 멈추었기에 다행이지, 팔이 뒤로 크게 젖혀진 시후는 무방비로 노출됐었다.
뒤늦게 그가 검을 뻗으려 했지만, 좌측에서 날아온 검기에 급히 허리를 뒤로 젖혀야 했다.
흑백선자의 뺨이 크게 베였다.
“아쉽군. 극도로 기척을 죽인다고 죽였는데 말이야.”
“놈······.”
흑백선자가 좌측을 노려봤다.
운허가 검을 휘두른 자세로 싱긋 웃어주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도발을 하네.’
시후의 생각대로 흑백선자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곧 뺨을 쓰다듬어 진득하게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오냐. 목을 반듯하게 베어 무당에 전해 주려 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갈기갈기 찢어서 육젓을 만들어 주마.”
그의 말에 시후는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흑백선자라는 존재는 천무에 거의 언급조차 안 되었지만, 자신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이유를.
창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네놈이지?”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남궁무의 목을 벤 녀석이 네놈이냐고.”
분노에 휩싸여 있던 흑백선자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히죽 웃었다.
일자로 뻗쳐 있던 눈썹이 둥그스름하게 휘어진 걸 보니, 정말 기쁨에 찬 웃음을 짓는 모양이었다.
“낄낄낄,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칭찬해 주지. 그래, 내가 죽였다. 길림에서 남궁무를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오 년 내로 우리 목을 죄어올 정도로 성장했겠지. 무난히 성장했다면 미래의 팔황의 자리에 올랐을 테니, 그런 행운이 또 없었지. 아, 너희들에겐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아직 마르지 않은 피딱지를 건드리다가, 제법 쓰라린지 인상을 찌푸리며 운허를 노려봤다.
“그 녀석은 내 자비로 인해서 목이라도 곱게 돌아갔지만, 네놈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의 서슬 퍼런 경고에 시후가 웃음을 보였다.
시후의 반응에 흑백선자가 발끈하려고 했지만, 어차피 죽을 놈이라는 생각에 검을 들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까이 오거나 말거나 시후의 시선은 딴 곳을 향해 있었다.
그건 운허도 마찬가지였다.
흑백선자는 두 명이 짜고 자신을 속이는 걸까 생각도 해 봤지만, 자신의 감각이 무언가 있다고 소리쳤다.
흑백선자는 혹시 모를 기습을 방지하기 위해, 뒤로 살짝 물러나며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무너진 성벽 위에는 죽립을 쓴 인영이 서 있었다.
“네가 그 아이를 죽였다고 했느냐?”
죽립 덕분에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있는 거라곤, 여인의 목소리라는 점과 달빛 아래 미약하게 드러난 몸의 윤곽이 전부였다.
끽해야 서른 전후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특색 없는 장검은 흔하디흔한 여 무림인의 표본이었다.
그녀가 삿갓을 풀어 뒤편으로 던졌다.
소싯적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법한 중년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악! 사부님 그렇게 멀리 던지면 어떻게 해요!”
성벽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 덕분에 시후는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흑백선자는 여기서 죽는다.
“왜······. 왜 여기에······.”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듯, 흑백선자도 몸을 벌벌 떨었다.
그는 용모파기로 수없이 보았지만, 실제로는 처음 보는 그녀의 별호를 나지막이 읊었다.
“검후.”
흑백선자가 그녀의 별호를 불렀을 때, 그녀는 이미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검후는 허리춤에 검을 뽑지도 않은 채 팔짱을 낀 채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댕그랑.
흑백선자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검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검후가 팔짱을 풀자 흑백선자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붙잡았다.
“커헉, 헉.”
흑백선자는 마치 한바탕 생사를 넘나드는 격전이라도 치른 듯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얼굴이었지만, 휘청거리면서도 끝까지 서 있었다.
“네가 그 아이를 죽였다고?”
“크, 크흐흐, 그래. 내가 죽였다. 크큭,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했······.”
흑백선자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검후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뽑혀 있었다.
“그 주둥이는 당분간 못 놀리겠지?”
바닥을 나뒹구는 흑백선자의 입은 옆으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입을 찢어 버린다’라는 말을 들어는 봤어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 섬뜩한 광경에 시후는 입을 가린 채 뒷걸음질을 쳤다.
다만, 운허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별래무양(別來無恙)하셨습니까.”
“공진 진인께선 잘 있으시고?”
“예, 스승님께선 잘 지내고 계십니다만······.”
운허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대신해서 시후가 앞으로 나섰다.
“이 녀석이 강시를 조종하는 술사예요. 안에는 한참 강시들이 날뛰고 있고요.”
“강시? 배교의 후예인가? 강시를 멈추거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검후는 찢어진 입을 붙잡고 있는 흑백선자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혹시라도 죽기 살기로 거부하거나 협상을 하려 들면 어쩌나 싶었지만, 흑백선자는 검후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흑백선자는 입가에 피를 질질 흘리는 와중에도 우여곡절 끝에 피리를 불었고, 대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멎었다.
[돌발 임무 ‘여명을 기다리며’가 완료되었습니다.]
검후의 개입 덕분에 강시를 모두 처리하지 않고도 임무가 깔끔하게 완료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사부님!”
운허의 말을 끊으며 뚫린 성벽 사이로 천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죽립을 든 채로 씩씩거리며 나타난 그녀는 시후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지금 심각한 분위기를 못 읽을 정도로 아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대 연무장으로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운허의 말에 검후는 바닥에 쓰러진 흑백선자를 발로 툭툭 찼다.
자신감의 발로일까.
검후는 일어난 흑백선자의 아혈과 마혈을 점하지 않았다.
그 대신, 흑백선자의 허리에 지풍을 날렸다.
“내공만 금하였으나 달리는 데는 문제 없을 것이다. 다만, 뒤처지는 거리만큼 입을 더 찢을 테니 열심히 달려 보아라.”
살벌한 검후의 말에 흑백선자는 얼른 머리를 붙잡고 대 연무장으로 뛰어갔다.
시후도 한 가지는 제대로 배운 것 같았다.
악인을 다룰 때는 상대보다도 더욱 잔혹해져야 한다는 것을.
- 6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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