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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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모용세가 (2)
“왔다.”
[돌발 임무 ‘여명을 기다리며’가 발동됩니다.]
시간은 넉넉했다.
제한 시간은 나오지 않았으나, 내일 아침까지 해결해야 하는 임무일 게 뻔했다.
시후가 방을 나서자 천천히 사그라들고 있는 붉은색 신호탄이 보였다.
자신보다 빨리 나온 자들은 이미 대 연무장으로 뛰어가고 있었고, 늦게 나온 자들 역시 그 뒤를 쫓았다.
시후는 적당히 주변을 살피며 대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어느새 뒤에 바짝 붙은 제갈려가 눈곱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자신이 대충 달린 탓도 있지만, 제갈려의 경공은 확실히 뛰어났다.
시후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유를 알 것이라 예상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는지, 제갈려는 심각한 표정으로 품에서 천로수변을 꺼내 들었다.
대 연무장의 주변은 이미 혼란 그 자체였다.
입구를 틀어막고 담벼락에 올라서서 연신 안쪽을 향해 무기를 집어 들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
제갈려는 무슨 일이냐 물어보기도 전에 사람들 틈 사이로 안의 광경을 봤다.
새하얀 백의에 수놓아진 목련.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줄지어 누워 있던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시후는 그들의 뒷모습을 빠르게 훑었다.
“운허 장로님!”
찾을 수고를 덜었다.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후는 인파를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놀란 제갈려가 그 소매를 붙잡았지만, 시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 안으로 들어가려고 그래······.”
제갈려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끝까지 시후를 따라갔다.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소매를 붙잡고 있는 제갈려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수백의 시체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아니, 움직이는 시점에서부터 시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강시 아닙니까?”
“배교가 등장했다는 말이오? 하지만, 강시라고 보기엔······. 문약을 부검해 보지 않았소이까?”
“물론, 흔적을 찾진 못했지만······.”
추나행을 비롯한 인원들은 긴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움직이지 않아서였다.
“저것들이 움직이기 전에 행동을 취해야······.”
교초혼 장로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시체가 몸을 돌린 것이다.
다들 무기를 뽑아 들었다.
단순히 서 있는 것과 움직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운허!”
목일자가 낮고 강하게 그를 불렀다.
그제야 운허는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운허의 검이 휘둘러지기도 전에 그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새까맣다.’
사라진 눈꺼풀 아래 흰자위라곤 단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들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하지만, 운허는 오히려 이를 꽉 깨물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담장에서 내려와 동문끼리 진을 펼쳐라!”
내공을 실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정심한 그의 내공 덕분일까.
담장 위에서 어물쩍거리는 인원보다, 대 연무장 안으로 뛰어드는 숫자가 곱절로 많았다.
덕분에 잠시 주춤하던 인원들도 뛰어내리는 사형과 사저들을 보곤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내리고 있었다.
나한진과 칠성검진을 비롯한 각종 진법이 사방에 펼쳐졌다.
“자리를 지켜라!”
운허의 외침에 마른침을 삼켜가며 억지로 무기를 치켜들었다.
지척의 거리에 멈춰서 있었지만, 그 누구 하나 섣불리 검을 휘두르진 않았다.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역시나 운허였다.
그의 검이 수평으로 휘둘러졌다.
“뭣?”
단순한 휘두르기였기에 막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막혔기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상대가 받아 낸 수법이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수법이었기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재차 검을 찔렀지만, 역시나 똑같은 방법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
뭔가 빠진 듯 딱딱하기 그지없었으나, 모용세가의 비연권이 확실했다.
“강시들이 무공을 펼친다! 다들 주의해라!”
무공을 펼치는 강시라면 전설로 내려오던 생강시(生僵尸)가 분명했다.
게다가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허가 급히 내공을 끌어올리자,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의 검기가 전방을 할퀴었다.
팔다리가 허공에 비산하고, 검게 죽은 피가 눈을 물들였다.
운허 자신이 만들어 낸 참상이었기에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혼세참월!”
그런 그의 옆으로 금빛 창기가 날아갔다.
사자(死者)에게 다시금 죽음이라는 안식을 내려 주는 기운이었다.
첫 죽음과 달리, 두 번째 죽음은 목이 달아나야만 맞이할 수 있었기에 더욱 참담했다.
“운허 장로님! 제가 파훼법을 알고 있습니다!”
운허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의 옆에는 온몸에서 은은한 금빛을 뿜어내는 시후가 서 있었다.
“술사(術士)를 죽여야 합니다! 갑자기 강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주변에 술사가 있을 겁니다! 그를 찾으면······.”
시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운허는 뒤로 물러나 눈을 감았다.
시후는 강시를 상대하면서도 간간이 뒤를 힐끔거리며 운허를 관찰했다.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강시를 내버려 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술사를 죽여야 했으니까.
그는 한참이나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천에 달하는 숫자가 바로 곁에서 움직이는 만큼, 집중력을 끌어올리기가 더욱 힘들 것이다.
“운허!”
전방에서 강시를 상대하던 추나행이 그를 찾았다.
그의 빈 공백을 시후가 채우고야 있지만, 뒤편에 있는 그에게 신경이 반쯤 쏠린 터라 연신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적잖은 시간이 지나자, 운허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곧 담을 넘었다.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내빼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가장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운허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분명 남은 이들의 사기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운허 장로님이 술사를 처리한다면 곧 조용해지겠네! 그때까지 잘 막고 있어야지!”
혼잣말이라기엔 시후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컸다.
누가 내공을 실을 채 혼잣말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시후의 의도는 주변에 확실하게 먹혀들었다.
방진은 더욱 견고해졌고, 강시를 죽이겠노라 달려들었던 인원들은 방어에 집중했다.
덕분에 시후도 빠져나갈 틈이 생겼다.
시후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전선에서 이탈했다.
“후, 내공을 많이 썼더니······. 잠시 운기조식이라도 해야지.”
빈말이 아니라, 시후는 운허의 시선을 끌기 위해 날렸던 혼세참월을 필두로 화려한 무공을 연이어 펼쳤었다.
시후의 활약은 확실했고 눈부셨기에, 어쭙잖은 핑계가 아닌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담벼락까지 물러난 시후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입구로 향했다.
시후의 계획은 훌륭했다.
제갈려가 자신의 뒤를 붙잡기 전까지는.
“어디가?”
그녀의 질문에 시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문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짐짓 표정을 굳힌 뒤, 검지를 천천히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고 들어. 난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깐, 누가 물어보거든 밖에서 운기조식을 하는 중이라고 둘러대 줘. 부탁할게.”
어깨를 두들기며 지나치려고 했지만, 제갈려가 소매를 붙잡았다.
역시, 분위기를 잡아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진실을 말해 줄 때까진 절대 놓아 줄 것 같지 않았다.
진실을 말할 수 없다면.
‘최소한 믿을 수 있을 거짓말을 늘어놔야 할 테지.’
“궁금하면 따라와.”
시후가 선택한 건 도발이었다.
기어코 대 연무장까지 따라 들어왔던 그녀라면 다시 쫓아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때완 또 달랐다.
그래도 대 연무장 안에 믿음직한 사람들이 있었고, 주변엔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가는 곳엔 제갈려와 시후 둘밖에 없을 게 분명했다.
막연한 두려움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젠장.’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이 빗나갔다.
제갈려는 잠시 멈춰 있는가 싶더니, 이내 후다닥 달려와 자신의 뒤에 바짝 붙어섰다.
“강시 술사한테 갈 거니깐 알아서 해.”
시간도 촉박했기에 에둘러 말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말은 제갈려를 찰나조차 멈추지 못했다.
시후는 어쩔 수 없이 혹 덩어리를 달고 질주할 수밖에 없었다.
* * *
콰과과광!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에 시후와 제갈려가 잠시 멈춰 섰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바로 지척이었다.
조심스럽게 담벼락으로 다가간 두 사람은 까치발을 하며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뿌연 먼지구름과 반쯤 주저앉은 성벽이었다.
그보다 시선을 조금 더 집중하니, 운허와 함께 연신 뒷걸음질을 치는 상대가 보였다.
자세히 상대를 관찰하자, 검은 머리와 대조적으로 새하얀 눈썹이 눈에 확 띄었다.
‘흑백선자.’
그에게 할당되었던 짧은 언급의 절반에 해당하는 특징이 맞아떨어졌다.
운허가 상대의 움직일 공간을 미리 점하고 휘두르는 듯, 흑백선자는 속절없이 뒤로 물러났다.
얼핏 본다면 운허가 몰아치는 거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은 전혀 달랐다.
운허의 움직임이 상대보다 배는 많았다.
검을 휘두르는 횟수조차도.
그 말은 체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흑백선자를 제압하진 못했다.
“이거 실망인데? 고작 이정도로 무당제일검을 논하는 건가?”
“입 닥쳐라!”
눈에 뻔히 보이는 그의 도발에 섣불리 달려들던 운허는 앞섬을 크게 베였다.
천만다행으로 피륙이 상하진 않았지만, 방금 한수로 위축되었는지 이전처럼 공격이 매섭진 못했다.
“어이쿠, 날도 추운데 옷 좀 잘 여미지 그랬나?”
한 번 당한 것으로 족했다.
운허는 기수식을 바꾸었다.
그 모습을 본 흑백선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태극혜검? 좋지. 하지만, 언제까지 저들을 두고 볼 텐가?”
시후는 냉큼 담 아래로 머리를 숨겼다.
의도한 건 아닐 테지만, 그가 자신이 있는 쪽을 가리킨 것이다.
대 연무장이 있는 곳에선 여전히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진하게도, 내가 이걸 안 불면 강시가 멈출 거로 생각한 건가?”
슬쩍 고개를 다시 내밀어보자, 흑백선자는 어느새 무음필대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를 본 시후는 황급히 품을 뒤적여 무음필대를 꺼내 들었다.
상대가 운허를 흔들고 있는데, 자신도 상대를 흔들어놔야 하지 않겠는가.
제갈려에게 손짓, 발짓을 동원해 숨어 있으라고 설명했다.
그녀가 까치발로 살금살금 이동하여 숨어들자, 시후는 무음필대를 입에 물었다.
“자, 지금이라도 모용세가의 시체를 토막 내러······.”
‘멈춰라.’
담벼락 너머로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흑백선자가 동요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도발하던 그 주둥이가 멈췄으니깐.
“한눈을 팔다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운허가 달려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가 평정심을 잃었다고 한들, 그 혼자선 곤란했다.
시후는 쉬지 않고 무음필대를 불어 재꼈다.
‘뒤에 적.’
‘뒤가 아니라 서쪽.’
‘대 연무장에서 사람들이 접근 중.’
다음 거짓을 준비하려는 찰나, 시후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굴렀다.
파사삭.
조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담벼락에 얇은 선이 생겨났다.
검기가 담벼락을 뚫고 지나간 것이다.
시후는 다시 앞으로 내달렸다.
조금이라도 멈추는 건가 싶으면 검기가 날아들었다.
“나와라!”
조금 더 신경을 긁을까 했지만, 눈이 회까닥 돌아서 자신을 향해 무작정 달려들거나, 운허를 빠르게 처리하려고 한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흘러갈 것이 분명했다.
눈치를 잠시 살피곤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
흑백선자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낮췄다.
“당장 목을······.”
하지만, 그의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운허가 검기 다발을 흩뿌려 그를 물러나게 한 것이다.
게다가 곧바로 자신이 있는 담벼락으로 붙어 주었다.
그의 배려에 시후는 안전하게 땅에 내려설 수 있었다.
“저자가 왜 저러는지 묻진 않을 테니, 차 소협이 한쪽을 맡아 줄 수 있겠나?”
운허의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청색 무복이 조금씩 피로 물들고 있었다.
깊은 상처는 없었지만, 얕은 상처가 빽빽하게 나 있었다.
‘차라리 제갈려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말할걸.’
흑백선자가 붉게 충혈된 눈을 번뜩이며 다가왔다.
시후는 창을 고쳐잡으며 운허의 등 뒤에 섰다.
어차피 옆에 있으면 방해만 될 테니, 차라리 뒤편에서 보조를 맞추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한쪽을 맡는 건 무리지만······ 일단 버텨 보죠.”
“그럼 무슨 방도가 생기는가?”
“네. 생깁니다.”
시후의 말에 운허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눈빛으로 물었다.
그의 의문 어린 시선에 시후는 씩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기사(技士)님이 오죠.”
- 63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