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61화 모용세가 (1)
강소성에서 요녕까지 가는 길은 절대 쉽지 않았다.
일단, 바다를 건너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강에서 배를 타는 것과 가까운 해안에서 배를 타는 것과는 또 달랐다.
개주(蓋州)에 내렸을 땐 다들 초주검이 되었지만, 그 누구 하나 불평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건 투덜대기 일쑤였던 제갈려도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쉽사리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을씨년스럽네.”
그런 그녀의 입술이 열린 건 심양을 지나 저 멀리 모용세가가 나타났을 때였다.
장원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컸다.
차라리 조그마한 성이라 부르는 편이 맞을 듯했다.
연나라 황족의 계보를 잇는 만큼, 입이 떡 벌어지는 엄청난 규모였다.
하지만, 이제는 주인 없는 빈집에 불과하였다.
“어?”
제갈려의 손끝이 성문을 향했다.
성인 남자 두 명이 힘껏 밀어야 밀릴 법한 거대한 문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병장기에 손을 올렸다.
긴장은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의 얼굴을 보더니 추나행이 앞서 달려간 것이다.
“아는 얼굴이야. 할아버지 고희(古稀) 때 찾아오셨었어.”
게다가 제갈려도 아는 얼굴이라 증언하자, 다들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병장기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안도하는 주변 사람들과 달리 제갈려의 표정은 점점 묘하게 변해 갔다.
그녀는 시후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저기 보여?”
곧 손끝을 뻗어 성벽 위를 쭉 훑었다.
시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몰랐기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시후의 모습이 답답했는지, 가슴을 두들기던 제갈려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모용세가가 멸문을 당했는데, 성벽이며 성문이며 아무런 흠집조차 없잖아. 이거 이상하지 않아?”
물론, 속삭임의 정도가 컸지만 말이다.
그 말을 기점으로 다시금 병장기에 손을 얻는 자들이 늘어났다.
주변에서 반응을 보인 덕분인지, 제갈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물론, 새벽에 기습을 당했을 수도 있지만······ 압도적인 힘에 짓눌렸다면? 우리도 지금 대단히 위험한 상황인 것 아니야?”
꼴딱꼴딱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시후는 그녀의 추측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기에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다만, 제갈려는 점점 자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아지자 더욱 신나서 떠들어 댔다.
그러는 사이 성문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반쯤 열린 성문 너머로 대단히 수려하게 꾸며진 정원이 어렴풋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갔던 추나행이 그 틈으로 빠져나왔다.
“운허, 교 장로, 목 장로······.”
추나행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원들을 모조리 불러 모았다.
시후와 제갈려를 잠시 흘겨보며 잠시 고민하던 그는 둘에게도 따라오라는 듯 짧게 손짓을 했다.
추나행에게 불린 인원은 그를 따라 성문을 지난 뒤, 우측으로 꺾어 들어갔다.
낮은 담벼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쭉쭉 나아간 끝에는 굳게 닫힌 문이 존재했다.
문 앞에는 개방도로 보이는 인물이 여럿 서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가장 최초에 모용세가 성문을 열어 주었던 자였다.
“이곳은 모용세가의 대 연무장입니다.”
문 앞에 선 그가 설명과 함께 문고리를 부여잡았다.
다만, 문을 열기에 앞서 다시금 뒤돌아봤다.
“소리는 지르지 마시길······.”
한껏 목소리를 내리깔며, 그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이곳은 수백에 달하는 식솔들이 모여야 하기에 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끄윽······.”
제갈려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끅끅대는 소리가 손을 비집고 새어 나왔던 탓이다.
목일자는 이마를 짚으며 몸을 비틀거렸고, 교초혼 또한 넋이 나간 채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그나마 멀쩡한 운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대 연무장을 훑어봤다.
넓디넓은 연무장 바닥에는 수백의 시체가 잠을 자는 듯 누워 있었다.
추나행은 고개를 푹 숙였고, 그런 그를 대신해 문을 열어 주었던 거지가 입을 열었다.
“심양 분타주 쌍호라고 합니다. 설명해 드리자면······ 개방에서는 모용세가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이외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끝없는 침묵 속에 운허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며 말을 꺼냈다.
“사인(死因)은?”
“모릅니다.”
쌍호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하자, 운허는 곧바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당패철을 끌고 시체로 다가갔다.
“독에 관해 아는 것은 있더냐.”
“기본적인 건 어느 정도 알지만······.”
당가라고 죄다 독과 암기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대답에 운허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당가의 핏줄이니 보통 사람보다는 아는 게 많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시체에 다가가 짧게 합장했다.
“옷을 벗겨야 합니다.”
그의 말에 운허도 짧게나마 망자에게 예를 취한 뒤 검을 뽑아 들었다.
검 끝에 손톱만 한 검기를 두른 채, 피륙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옷을 갈랐다.
“음······.”
시체 상태를 보아하니, 조금 전에 죽었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상태가 깔끔했다.
추운 날씨라 그런지 부패는커녕, 시반(屍斑)조차 생기지 않고 있었다.
당패철은 품에서 조그만 나무통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기다란 은침 여러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하나를 견정혈(肩貞穴)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잠시 후 뽑은 침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 후로도 이곳저곳 침을 여럿 찔러 넣어 봤지만, 침의 색이 변하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찔러 넣었던 복부에 침을 제거한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에 당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독에 당했을 시 나타나는 증상을 보이는 시체는 단 한 구도 없었습니다.”
당패철의 말에 운허는 곧바로 시체의 팔을 잡았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운허는 시체 안으로 내기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두 눈을 감고 집중하던 그의 얼굴이 점차 침중하게 변해 갔다.
한참이나 앉아 있던 그가 잡고 있던 팔을 내려놓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씁쓸한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어 보였다.
“부검을 해 봐야겠네.”
“나행!”
추나행의 말에 운허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운허의 반응에도 추나행은 기필코 강행하겠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게다가 목일자는 거기에 한술 더 뜨듯 말했다.
“부검을 꼭 해야 한다면, 모용문약으로 하세나.”
“목 장로!”
목일자의 말에 기함할 듯 소리친 자는 다름 아닌 교초혼이었다.
평소 딴지를 걸고넘어질 때와 달리, 진심으로 놀란 듯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추나행과 더불어 목일자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저승에 가거든 그에게 용서를 구할 테니 내 말대로 하세. 게다가······ 항상 솔선수범을 우선시했던 친구이지 않았나. 그도 이해해 줄 걸세”
억지로 쥐어 짜낸 듯한 목소리에는 촉촉하게 물기가 맺혀 있었다.
하기야, 목일자라고 결정을 내리기 쉬웠겠는가.
모두의 침묵을 동의 삼아 목일자는 자신의 친우에게 다가갔다.
“문약, 부디 날 원망하고 저주해 주게나.”
그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는 모용문약의 몸 아래로 양팔을 넣었다.
* * *
잘 여민다고 여몄지만, 냉기라는 녀석은 조그만 틈만 있으면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며 옷깃을 조금 더 촘촘히 여미었다.
“춥네.”
중철의 그 말이 기점이었을까.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의 부정한 모든 것을 지워 버리겠다는 듯이.
흰 천으로 덮인 시체 위로 소복소복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무풍 사형.”
“왜 그러느냐?”
“짐작하는 바라도 있으십니까?”
중철의 질문에 무풍은 며칠째 감지 못한 머리를 슬쩍 긁었다.
웃어른들은 말을 아꼈고, 그로 인해 쓸데없는 억측만이 맴돌았다.
모용세가에서 새로운 무공을 익히다가 전부 다 주화입마에 든 것이라는 둥, 원한이 있던 독공의 고수가 독을 풀었다는 둥 괴소문은 끝이 없었다.
어차피 죄다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하였다.
“죄다 헛소문에 불과하니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말거라.”
“사형도 다 듣긴 하셨군요?”
중철의 말에 무풍의 얼굴이 다소 붉어졌다.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리는 걸 어쩌겠는가.
다행히 화톳불이 타올라, 붉어진 얼굴을 들킬 일은 없었다.
“행여나 들은 이야기를 입에 올릴 생각 하지 마라. 남의 불행을 가지고 지레짐작하는 건 소인배가 하는 짓에 불과하니.”
무풍의 말에 중철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제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는 무풍은 조금 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사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모든 언행을 주의해야 한다는 사부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면, 더는 입을 열지 말거라.”
사부님을 거론하자 중철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그 엄중한 경고 덕분인지 몰라도 중철은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무풍은 최소한 이틀은 효과가 가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기, 무풍 사형.”
또다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이번엔 따끔하게 혼쭐을 낼 생각으로 중철을 돌아봤지만, 중철의 시선은 무풍이 아닌 연무장을 향해 있었다.
“이번에는 왜 또 부르느냐?”
무풍의 물음에도 중철의 시선은 연무장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더니 연무장 우측 끝을 가리켰다.
누가 오기라도 했나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흰 눈이 소복이 쌓인 시체만이 가득했기에 중철의 귀를 잡아당겼다.
“요놈아, 어딜 장난을 치려고······.”
“우, 움직였습니다!”
중철의 다급한 목소리에 무풍은 다시금 연무장을 바라봤다.
중철의 귀를 놓은 무풍은 연무장을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서늘한 바람이 가득한 연무장에는 눈송이만 흩날릴 뿐이었다.
또다시 장난에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그의 고개가 다시 연무장을 향했다.
그도 보았다.
움직이는 무엇인가를.
혹여 시체를 갉아먹으려는 쥐새끼가 아닐까.
얼핏 움직임이 느껴졌던 그곳을 뚫어지라 주시했다.
하지만, 그 후로 뭔가 움직이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내공을 넓게 퍼트려 보았다.
시선이 닿은 곳까지 뿌리기엔 그의 경지가 얕았다.
“가서 확인하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사, 사형!”
“쥐새끼일 수도 있으니 호들갑 떨지 말고······.”
말하는 도중에도 저 멀리, 시체가 있는 곳의 천이 다시금 들썩였다.
중철은 놀라서 무풍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쥐새끼가 맞는 것 같으니 어서 가서 잡고 오마.”
“사, 사형. 쥐가 아닌 거 같아요.”
중철의 목소리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제야 소매를 통해 중철의 떨림이 전해졌다.
몸을 돌려 중철을 바라보자, 어느새 그 시선은 우측이 아니라 좌측을 향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풍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귓가에 천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풍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반듯이 누워 있던 시체 중 하나의 손이 위로 들려 있었다.
“농담이지?”
그의 중얼거림에 화답이라도 하듯, 모든 손이 사방에서 위로 솟구쳤다.
무풍은 뒤로 황급히 물러나다가 발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와 동시에 상체를 일으키는 시체 한 구.
무풍은 덜덜 떨리는 손을 목으로 뻗어 호각을 입으로 옮겼다.
삑! 삑! 삑!
무풍이 호각을 짧게 세 번 끊어 부는 사이, 중철은 품에서 신호탄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붉은 불꽃이 하늘을 어지럽게 뒤덮었고, 그와 동시에 수백에 달하는 시체가 완벽히 몸을 일으켰다.
- 62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