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20화 신첨어 (5)
초설이 수락하자마자 장 총관은 말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아직 초설과 홍설이 만난 것도 아니지만, 얼마나 영향력이 대단하면 제자를 받아들이자마자 임무가 선 완료 되었을까.
“저 때문에 호법 장로직까지 수락하시고······.”
초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여린의 품에 안겼고, 마치 아기가 어리광을 부리듯 얼굴을 비볐다.
품에 안긴 초설의 뒤통수를 쓸어내리던 여린은 양손으로 살포시 초설의 뺨을 잡고는 장난치듯 꼬집었다.
“너 때문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할 생각이었어. 그보다······ 호법 장로의 제자가 되면 뭘 해야 하는지 아니?”
“흐븝 증르?”
양 뺨이 붙잡힌 탓일까.
초설의 발음은 뭉개졌고, 의도치 않았겠으나 보는 사람에겐 무척이나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건 비단 시후 혼자 느낀 감정이 아니었는지, 볼을 붙잡은 여린의 입꼬리도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일단, 놔주셔야 대답을 할 것 같은데······.”
슬쩍 끼어들려 했지만, 전여린이 초설과 시후를 대하는 온도의 차이는 극명했다.
‘망할.’
여린이 붙잡은 볼을 놓아주자, 초설은 조금 붉어진 볼을 문질렀다.
“호법 장로가 우리 하오문을 지켜 주는 역할을 한다는 건 알지만, 제가 뭘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모를 수 있지. 누가 잡아먹기라도 해? 어깨 쭉 펴!”
“그렇지만······ 제가 지금부터 무공을 배우면 늦지 않을까요?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지만, 막상 생각해 보니 무공을 배우기에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싶어서······.”
“설아, 사람에게는 각자 자기에게 맞는 무공이 있는 법이야. 어차피 네게 내 무공을 전수해 줄 생각은 없었어.”
“그럼요?”
“너에게는 음공(音功)을 가르쳐줄 거야. 일정 수준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삼류 무사보다 약하지만, 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비약적인 성장을 노릴 수 있지.”
나왔다.
초설은 이제 전여린의 제자로 들어가 음공을 익히게 될 것이고, 2년 뒤 ‘난주혈사’에서 죽임을 당하겠지.
하지만 이미 시후가 개입한 이상, 그건 사라진 선택지에 불과했다.
“그보다······ 넌 뭐야?”
“아, 그분은······.”
“소개는 아까 드렸던 그대로이고, 초설의 언니인 홍설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시후는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시후의 대답에 전여린은 손가락을 튕겼다.
“정주에 있는?”
“언니를 아세요?”
전여린이 다시 질문을 던졌지만, 시후의 대답보다도 더 빠르게 초설이 질문을 던졌다.
뒤늦게 자신이 대화에 끼어들었음을 알아차린 초설이 입을 가리며 몸을 움츠렸지만, 여린은 그런 초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제자가 될 설이와 관계된 사람인데 어찌 안 알아봤을까. 다만, 무공 전수에 집중하기 위해 알려 주지 않으려고 했단다.”
“그럼, 언니는······.”
“물론,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하진 않을 거야. 뒤에서 동기들 교육하는 쪽으로 빼놓으라고 말을 전한 참이니까.”
“스승님······.”
초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여린은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초설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늦게 시작한 만큼 오늘부터 열심히 달려 볼까? 우선 네게 가르쳐 줄 무공은······.”
“내일부터 하면 안 될까요?”
여린은 초설이 자신의 말을 끊자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초설을 바라봤다.
다만, 초설은 그 이유를 말하기 어려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기······ 달을······.”
“달? 아, 그래! 설이 네가 배울 심법은 월광추애심결(月光追愛心訣)이란다. 늦은 시기에 익혀도 충분히 성과를 볼 수 있는 무공이지. 어때? 마음에 들지?”
여린의 말에도 푹 숙인 초설의 고개는 들릴 줄 몰랐고, 잠시 고민하던 여린의 입술이 초설의 귓가에 붙어 달싹였다.
초설이 몸을 한차례 움찔하더니, 곧이어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끄덕이기를 반복했다.
“나가 있어.”
여린의 단호한 태도에 시후는 영문도 모른 채 방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지, 문 너머에서는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분명 기막을 펼쳤을 것이다.
전여린이야 시후에게 별 관심이 없을 테고, 지금 쫓겨난 건 분명 초설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뭐지? 내가 실수한 거라도 있나?”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걸리는 건 없었다.
조금 오그라드는 연기를 하긴 했지만, 자신을 향한 초설의 눈빛과 태도가 좋았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고민하는 사이,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초설은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여린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고, 여린은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후를 쳐다보던 여린은 팔짱을 풀었고, 오른쪽 검지를 까딱이며 시후에게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제기랄, 개가 따로 없군.’
시후는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잠자코 방으로 들어섰다.
“달을 줬다지?”
“아, 그렇죠.”
“그래서, 주기로 했던 것 말인데. 초설이 지금 내 제자가 되었으니, 그 약속을 지키기가 조금······.”
말꼬리를 흐리는 여린을 보며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 때문이었나.
어쩐지 보상을 지급해 주는 대상이 초설과 홍설이 아니더라니.
시후로서는 이편이 훨씬 좋았다.
오히려 초설에게 보상을 받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주어지지 않겠는가.
“그럼, 초설 대신 여린 선배님께 받으면 되는 겁니까?”
“뭐?”
“초설을 대신해서 보상을 주신다는 거 아닙니······ 어라?”
말을 하던 시후는 잔뜩 일그러진 여린의 얼굴에서 짙은 혐오감을 보았고, 여린의 어깨너머에선 풀이 죽은 표정으로 축 늘어진 초설이 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 덕분에 시후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는 걸 깨달았다.
‘초설의 소원’의 보상은 분명 ‘머리를 올릴 기회를 준다’라는 것이었는데, 초설을 대신해서 보상을 준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상처와 오해는 깊어질수록 치료하기 힘들다.
과연 자기 혼자만의 오해일까.
그렇다면 여린의 눈빛이 저러진 않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닥쳐!”
급히 팔을 내저으며 오해를 종식하고자 했지만, 방안에 들이닥친 광풍은 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 * *
“하하하, 그래서 얼굴이 그 모양인가?”
“그 모양이라뇨······.”
남궁천의 말에 시후는 삶은 달걀로 눈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무공이 경지에 다다른 그녀의 주먹에 ‘맵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맞을 때까지만 해도 어딘가 부러지겠거니 생각했지만, 지금 확인해 보니 부러진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오해를 풀었으니 얼굴이 이 모양이 되었어도 살아왔죠.”
“다른 의미로 들리기에 충분했네. 설마, 노리고 한 말은 아니겠지?”
“미치지 않고서야······ 어휴.”
대답하던 시후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천은 술병을 기울여 비어 버린 자신의 잔을 가득 채웠다.
술잔을 들어 올린 남궁천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질문이라기보단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가 말하는 대상은 아마 초설일 테지만, 어그러트린 이상 원래대로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예상할 수는 없었다.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막 던질 수는 없으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하는 탓에 남궁천은 홀로 술을 홀짝였고, 시후가 가지고 왔던 미미주는 어느새 동이 났다.
“쩝, 나 혼자 다 먹었군.”
“아, 어차피 저만 먹으려고 산 건 아닌걸요.”
“그렇게 말해 주니 내 마음이 조금 편하군. 그보다 차 소협, 이후에 갈 곳은 어떻게 되는가?”
‘널 따라서 용봉지회에 가야지.’
하마터면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구겨 넣은 시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자신이 동행을 제의해서는 곤란하다.
“그냥 강호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거죠.”
시후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었다.
말도 제법 편하게 주고받으며 가까워지지 않았던가.
“싫지 않다면, 우리와 함께 황학루와 등왕각을 둘러보지 않겠는가?”
기대감은 현실이 될 때 가장 달콤한 법.
시후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저야 좋죠.”
“좋군, 좋아. 마음 같아서는 술잔을 더 기울이고 싶지만, 점소이도 이만 쉬어야 할 터이니 자리를 파하세.”
미미주 때문일까? 남궁천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으로 올라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후는 객잔 밖으로 나와, 보상으로 받은 백후원보(百猴元步)를 꺼내 들었다.
한참을 쥐고 있자, 비급이 사라지며 무공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보법(步法)을 배울 수 있었다.
[백후원보를 익혔습니다.]
“무공창.”
[등급 : 절정]
[무공 : 백후원보]
[종류 : 보법]
[상태 : 비활성화]
[0성]
「원숭이와 한평생을 함께 하였던 후왕(猴王) 손육공이 창안한 보법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원숭이의 움직임도 각기 특색이 있고, 그들 중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한 녀석을 본떠 만들었다.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상대의 시각을 파고들어, 그 허점을 이용하는데 적합한 무공이다.」
무공의 등급이 무려 ‘절정’이었다.
여린에게 두들겨 맞은 게, 보상의 등급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음이 분명했다.
창술의 기본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보법이기에 더욱 기대되었다.
‘꼴을 보니 창을 익힌 거 같은데, 발재간이 그러면 죽지 않는 게 다행이지. 이거나 받아.’
다만, 보상을 받을 때 여린이 했던 말은 대단히 속을 긁었다.
“언젠가 갚아 줄······ 수 있을까?”
문제는 여린이 검후(劍后)에 미치지야 못할지라도, 여자 무림인 중에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물론 나중에야 이길 수 있겠지.
하지만, 그때라면 마교와 으쌰으쌰 하면서 싸우기 바쁠 것이다.
“잊자, 잊어.”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킨 시후는 백후원보를 활성화하려다가, 마땅한 곳이 없자 곧장 지도를 펼쳐 기초 무관을 찾아갔다.
머무르는 객잔이 악양 중심지에 가까운 덕분에, 기초 무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기초 무관 앞에 다다른 시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상적으로 게임을 했다면 이런 무관에서 시작했을 테지만, 비정상이라는 말조차 뛰어넘은 자신의 상황에 웃음이 나온 것이다.
자조적인 웃음을 짓던 시후는 무관 정문을 밀고 들어섰다.
[‘기초 무관’에 입장하였습니다. 천무 온라인 이해를 돕기 위해 준비된 영상이 있습니다. 본 영상은······.]
쓸데없는 알람 창을 모조리 닫았다.
어차피 무공에 관한 설명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임무였기에 볼 필요조차 없었다.
“백후원보 활성화.”
[절정 등급의 무공입니다. 바닥에 새겨지는 족적(足跡)의 순서에 맞게 움직이면 무공이 활성화됩니다. 본 족적은 10초 후부터 순차적으로 생성됩니다.]
‘천무’ 온라인에서의 무공은 기본적으로 심법과 보법처럼 활성, 비활성이 가능한 상태성 무공과 검법, 도법 등 초식이 있는 무공으로 나뉘었다.
십창처럼 초식으로 나뉜 무공은 초식을 ‘제대로’ 펼쳐야 1성으로 바뀌었고, 그 뒤에는 사용 빈도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로 성취가 상승했다.
그렇다면 초식이 없는 심법과 보법의 경우에는?
‘제대로’ 펼치면 활성화로 바뀐다는 점은 같았다.
초식이 있는 무공과 달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취가 올라가니 딱히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익히기가 괴이할 정도로 힘들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백후원보의 족적이 나타납니다.]
알람과 동시에 바닥엔 시후의 발 크기와 비슷한 발자국이 하나씩 새겨졌다.
당당하게 첫걸음을 옮겼지만, 스무 걸음도 옮기기 전에 시후는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활성화에 실패하셨습니다.]
절대 등급 이하의 무공에는 페널티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실패의 문제는 없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큰 문제가 있었다.
백후원보는 무공 이름에 충실해도 너무 충실했다는 점이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원숭이의 움직임으로 무공을 만드냐고······.”
푸념을 털어놓던 시후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더니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썅.”
- 21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