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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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명진제의 진노 (1)
무한 선착장에 내린 시후는 말을 끌며, 남궁천 일행과 나란히 서쪽으로 걸었다.
익숙한 길을 지나자, 저 멀리 황학루가 보였다.
얼마 전 떠나온 무한에 다시 돌아왔지만, 시후에게 불만은 없었다.
아니, 불만은커녕 오히려 기대감이 앞섰다.
거지들에게 전부 빼앗겼던 규화계를 먹어볼 수 있으리란 생각 덕분이었다.
“차 아우는 며칠 전에 황학루를 지나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죠. 닷새쯤 된 거 같네요.”
“황학루에선 뭐가 가장 인상 깊었는가?”
“음······ 열간면?”
시후의 대답에 남궁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소 기분이 찜찜했다.
뭐가 잘못된 건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남궁천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각필정(擱筆亭)은 안 가보았는가?”
‘그게 뭐야.’
시후가 모르는 눈빛을 보내자 옆에 있던 남궁미가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젠장. 저놈의 눈깔.’
남궁미와 본의 아닌 눈싸움을 벌이는 도중 철우가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렸다.
“저도 모릅니다.”
“철우야, 무인이 무공 수련을 게을리할 수야 없겠지만, 최소한의······.”
“상식은 쌓고 살아야 한다.”
얼마나 입버릇처럼 말했는지, 철우의 입에서 남궁천의 다음 말이 튀어나왔다.
덕분에 남궁천이 멋쩍게 웃었다.
“황학루에 올라 날이 좋지 않아 풍광을 감상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각필정을 본다면 본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미묘하게 달랐지만,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다.
시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남궁천의 상식 공부가 시작되었다.
“최호라는 시인을 아느냐?”
“모릅니다.”
“시선(詩仙) 이백은 알겠지?”
묵묵부답.
때론 침묵이 천 마디보다 효과적이었고, 철우는 침묵의 묘미를 아는 남자였다.
결국, 남궁천은 진심을 담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학루에는 최호 시인의 황학루라는 시구가 걸려 있는데, 이백이 그 시를 보고 붓을 꺾은 곳이 바로 각필정이다.”
“시구를 보고 애꿎은 붓은 왜 꺾는답니까?”
철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덕분에 할 말을 잃은 남궁천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 * *
황학루는 선착장에서 멀지 않았다.
종종걸음으로 10분도 안 걸릴 거리였고, 막 점심시간이 지난 지라 황학루는 제법 한산해 보였다.
“말 고삐는 이리 주십시오.”
이제 말을 타고 다닐 날이 머지않아 보였기에, 시후는 점소이에게 말 고삐를 건네주며 먹이를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부탁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을 걸러서 그런지 몰라도 철우는 대단히 허기져 보였고, 자리에 앉자마자 점소이를 불렀다.
“추천할 만한 요리가 뭐가 있지?”
“열간면을 추천해 드립니다. 황학루에 올라 날이 좋지 않아 경치를 감상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열간면 한 젓가락이면······.”
점소이의 말에 다들 눈이 마주쳤고, 시후는 남궁천이 말할 때 느꼈던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점소이의 소개는 조금 전, 남궁천이 했던 말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덕분에 구박받던 철우의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다.
“천이 형님, 풍광이 좋지 않은 날에는 열간면을 먹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각필정을 보는 게 옳습니까?”
남궁천은 말이 없었다.
신이 난 철우는 열간면 일곱 그릇을 주문했고, 시후는 주문을 받고 돌아가려는 점소이를 붙잡았다.
“규화계 한 마리 추가.”
“규화계는 조금 늦게 나오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시후는 짧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림이 길수록 달콤해지지 않겠는가.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 번, 거지 놈들에게 빼앗겼던 규화계를 먹을 생각에 젓가락을 부러뜨릴 것 같았다.
곧이어 조리가 간편한 열간면이 나오자 시후는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최 이사는 말했다.
‘열간면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두 번 먹어보라’라고.
시후는 그 말을 지금 충실이 이행했고, 철우는 두 번째 그릇을 들어 올리며 조금 다른 의미로 두 번 먹고 있었다.
“응?”
젓가락에 면을 돌돌 감아가며 먹던 남궁미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시후도 덩달아 고개를 돌리니, 황학루 입구에는 웬 거지가 서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이결 매듭을 보자, 시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찾아온 게 아니길 빌었건만, 거지의 발걸음은 기어코 자신이 앉아 있는 탁자로 향했다.
“개방에서 무슨 일이십니까?”
다가오는 거지를 향해 남궁천이 물었지만, 그는 시후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차시후 소협이 맞으십니까?”
제기랄.
표면적으로는 물음의 형태를 띠었지만,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추나행 장로님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벌써?”
“예, 한시라도 빨리 뵙고자 제게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직이다.
열간면이야 거의 다 먹었지만, 아직 규화계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시후의 기분을 알았는지, 아니면 단순히 먹기 위함인지, 철우가 고개를 휘저으며 나섰다.
“우린 아직 식사가 안 끝났습니다만······.”
“급한 일이라고 하지 않느냐? 배는 언제든 채울 수 있지만, 지나간 시간은 붙잡을 수 없는 법. 어서 가보자꾸나.”
“그럼, 시킨 규화계는······.”
“개방분들께서 드시면 되지 않겠느냐? 개방의 소협께선 혹시 혼자 오셨소?”
남궁천의 말에 이결 제자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시후는 속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 * *
개방과 하오문 등, 중원 전역에 자리 잡은 문파의 경우에는 대부분 분타가 존재했다.
하오문은 비밀을 추구하기 때문에 ‘고래 문양’을 찾아야 했지만, 개방은 그와 반대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이결 제자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구릿한 냄새가 맴도는 다리 근처였다.
“이 아래에 계십니다.”
‘왜 후각은 고통에 포함이 안 되는 걸까.’
시후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코를 틀어막았다.
거지 수십이 생활하는 개방 분타의 악취는 상상을 초월했다.
결국, 남궁미는 바닥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우욱.”
“거, 굳이 안 따라오셔도 됩니다. 어차피 소저에겐 볼일 없으니.”
실례였다.
퉁명스레 말하는 이결 제자가 아니라 남궁미의 실례.
아무리 냄새가 난다고 한들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헛구역질하는 건, 면전에서 욕을 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남궁미는 뭐라 변명하려고 했지만, 지독한 악취에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동정심을 자극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후는 품을 뒤지는 척, 인벤토리에서 홍설에게 받았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낡은 나무 부적을 감싸 주었던 손수건.
“코라도 막아.”
남궁미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시후를 힐끗 바라보았지만,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곧장 받아 코를 틀어막았다.
손수건은 홍설이 지니고 있었던 만큼 사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남궁미의 안색이 한결 편하게 바뀌었다
“······ 마워.”
앞에 말을 흐지부지 끊어 말했기에 의미는 불명확했으나, 살짝 내리깐 눈에 담긴 감정은 고마움이 분명했다.
이럴 때 생색을 내기보단 별거 아니라는 듯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게 좋으리.
다만, 너무 고개를 치켜든 탓일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이놈의 돌멩이가!’
“저기 계십니다.”
그런 시후를 조금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결 제자는 앞쪽에 가장 큰 움막을 가리켰다.
다가간 거리만큼, 악취는 심해졌다.
“거, 온 거 알면 좀 나오시죠!”
시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움막 입구를 덮고 있던 거적이 치워지며 추나행의 얼굴이 드러났다.
시꺼먼 얼굴에서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그의 눈 밑에는 짙은 음영이 져 있었다.
“이놈아, 소리를 왜 지르누? 뒤에 아이들은······ 어라?”
“무림의 말학, 남궁천이 독안비객 추나행 선배님을 뵙습니다.”
“아! 남궁가의 셋째? 십오 년 전에 보았는데, 혹시 기억하느냐?”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남궁천의 대답에 추나행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고놈, 어릴 적부터 제법 똘똘해 보이더니, 기억력도 비상하구나. 그럼, 저 뒤에 있는 아이는 막내일 테고? 주먹만 하던 아이가 벌써 저리 컸구나. 팽가 놈들이 덩치는 언제봐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군.”
“남궁미라고 합니다.”
“팽철우입니다.”
가볍게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눈 추나행은 괴로워하는 남궁미 때문인지는 몰라도, 냄새가 덜한 강변 쪽을 향해 앞장서 걸었다.
제법 서늘하면서도 맑은 공기가 폐부로 들어오자, 시후를 비롯한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아졌다.
눈치를 살피던 남궁미도 슬쩍 손수건을 치우고 조심스레 숨을 들이마시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손수건을 손에 쥔 채, 잠시 꼼지락거리더니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세탁해서 줄 테니까······.”
시후는 빨래도 할 줄 아느냐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남궁천과 달리 남궁미와 친해질 필요는 없었지만, 일부러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도 없지 않은가.
다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추나행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아냐, 이 영감탱이야.’
“왜 불렀어요?”
“이놈아, 무사히 다녀왔느냐고 먼저 물어보는 게 도리 아니냐?”
“멀쩡해 보이는데······ 굳이 물어봐야 해요?”
“고얀 놈. 나머지 녀석들은 여기에 있고, 네 녀석만 따라오너라.”
추나행의 말에 세 사람은 자리를 지켰고, 시후는 앞서 걷는 그를 따라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를 힐끔 바라보더니, 추나행이 품에서 누르스름한 종이를 꺼내 들었다.
[기막이 펼쳐졌습니다.]
“뭔데요?”
“왜 이리 까탈스러운 게야?”
“곰곰이 생각해 보시죠?”
“설마, 그깟 닭 한 마리 때문에 이러는 게냐?”
“한 마리라뇨? 두 마립니다. 아니, 이제는 세 마리죠.”
시후는 지금쯤 뼈만 남았을 자신의 규화계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다만, 추나행은 그 상황을 알 턱이 없었다.
“헛소리 말고 읽어 보기나 하거라.”
[흑련회의 비밀 지령(4)을 획득하였습니다.]
[암호 해독 능력(상급)이 필요합니다.]
[아직 암호가 해독되지 않아 읽을 수 없습니다.]
종이를 건네받자 떠오른 알람을 보니, 필사본이 아니라 진본인듯했다.
건네받은 ‘흑련회의 비밀 지령(4)’을 펼쳤지만, 알람이 알려 줬듯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알아보지도 못할 걸 왜 줘요?”
“정말 못 읽는 거야, 못 읽는 척하는 게야?”
“믿지 말던가요.”
시후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지령을 그대로 던져 주었다.
추나행은 자신의 손에 들린 지령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의 말대로 광마패도가 간 곳을 지킨 지 이틀이 지나자, 녀석이 나타났다. 정말 신기자 어르신과 연이 닿아있는진 모르겠지만, 최악의 가정도 해야 하는 법. 지금 무작정 널 믿겠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널 속이는 것과 다름없으니 터놓고 말하마.”
“하세요.”
“개방에서는 당분간 널 주시할 것이다. 주의 등급 갑(甲)의 인물로 지켜볼 터이니, 혹여라도 오해 살 행동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눈을 부라리는 추나행의 태도에도 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대충 흔들었다.
“이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아무튼, 일단 알겠어요.”
“거, 말이 통해서 좋구나. 그보다 닭 세 마리라는 건 무슨 말이냐?”
“한 마리는 직접 드셨고, 두 번째 닭은 서신을 전해 달라던 연개가 먹었고, 세 번째 닭은 오늘 보낸 이결 제자가 고이 챙겨갔으니 세 마리죠. 이 개똥 같은 분식 패!”
시후는 품에서 꺼낸 분식 패를 쥔 채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추나행은 피식 웃으며 손을 건넸다.
“이놈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패를 내놓거라.”
“내놓으면, 다른 걸 주기라도 하실 겁니까?”
“거지 문파에 있는 게 뭐가 있겠느냐? 이 숟가락이라도 주랴?”
추나행이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린 숟가락을 쥐고 흔들었다.
시후에겐 오랜 세월 그의 입을 들락날락한 그딴 물건을 받고 싶은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만, 용봉지회를 앞두고 생각해 둔 것은 하나 있었다.
“개방에서 가지고 있는 적행(賊行) 패, 지금 있죠?”
- 2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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