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3화 거지와 녹림 (2)
개방의 방도라면 지켜야 할 문규(門規)가 몇 개 있었다.
그중 세간에 가장 널리 퍼진 문규가 있었는데, 바로 ‘불의를 참지 말고 협을 행할 것’이다.
구파일방 중 유일하게 ‘협’을 행하라는 문규가 있는 문파가 바로 개방이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문규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르는 문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남의 것을 훔치지 말 것’.
시후는 상대가 개방의 사람, 그것도 개방의 장로인 추나행인 걸 알아차리자마자 협박을 했다.
딱, 그가 들어줄 수 있는 수준으로.
“저놈의 말은 도대체 왜 안 타고 다니는 게냐?”
그 결과, 추나행은 툴툴거리면서도 호북을 넘을 때까지만이라도 동행해 주기로 하였다.
사실 딱히 동행이 필요하기보다는 그와 같이 다니는 게 목적이었지만.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라고, 안 타는 게 아니라 못 타는 거죠.”
“그럼, 타지도 못하는 말을 뭐 한다고 끌고 다니는고?”
“곧 포동포동 살찌면 저 하나쯤은 태우고 다닐 수 있겠죠.”
“젠장, 이래서 어느 천년에 호북을 지날꼬.”
“그러길래 누가 규화계 훔쳐 먹으래요?”
시후의 말에 추나행이 발끈했다.
“규화계라니? 누가 그딴 걸 규화계라고 불러?”
다만, 그 초점은 다소 어긋나 있었다.
시후는 객잔에서 구매한 규화계를 하나 더 꺼내어 보여 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혹시나 또 음식을 탐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신양 홍매 객잔에서요.”
“이런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을 봤나. 아직도 이딴 걸 규화계라고 판단 말이지?”
거지 부심이라고 해야 할까.
‘거지닭’으로 더 유명한 규화계는 유독 거지들이 더 깐깐했다.
지금의 추나행처럼.
“원래 규화계의 출발은 그런 식으로 불에 직접 굽는 게 아니야. 출발부터 글러 먹었어. 진정한 규화계는 건 원래 땅을 판 다음에 말이야······.”
개방에서 장로의 위치에 있을 정도로 지위가 높은 만큼, 거지 중 상거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규화계 신념은 대단했다.
닭의 종류와 나이, 도축 상태 등을 자세히 따져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대충 흘려들었음에도 보통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동행하는 동안 그와의 대화는 늘상 이런 식이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내뱉으면 시후가 대답하고, 대화가 이어지면 곧 쓸데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였다.
“그리고 최상의 규화계를 만들기 위해서 다음으로 중요한 건 바로 얼마만큼 땅을 파느냐인데······ 응?”
규화계 개론을 열심히 설파하던 그의 입이 멈추었다.
하나 남은 그의 시선이 제법 완만한 오르막길을 향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너머를 보는듯했다.
“뭔가 소리가 들린듯한데······ 천천히 따라오거라.”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추나행은 오르막길을 달려갔고, 순식간에 능선 위로 모습을 감추었다.
메마른 가을 바닥이었지만, 어찌나 발이 가벼운지 먼지조차 일지 않았다.
시후는 흑마를 이끌고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능선을 올라갈수록 자신의 귓가에도 무엇인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쇠 부딪히는 소리가.
그리고 능선 가장 위에 다다르자 굽이친 산등성이 아래로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능선 아래에는 짐수레를 보호하듯 둘러싼 사람들과 그 주변을 물샐틈없이 에워싼 두 무리의 인원이 눈에 들어왔다.
[돌발 임무 ‘광마패도의 분노를 잠재워라’가 발동합니다.]
[해당 임무 진행 시, 사망 확률이 극도로 높으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시간제한이 있습니다. 30:00]
추나행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떠오른 알람 너머로 주변을 둘러싼 무리를 거침없이 돌파하는 추나행의 모습이 보였다.
번득이는 병장기를 상대하면서 권장만으로 돌파하는 모습은 조자룡과 비견될 만했다.
방향성은 정반대였지만.
“저 잔챙이들이 중요한 건 아니고······.”
능선에서 뒤섞인 무리 주변을 훑어보던 시후의 눈에 조금 떨어져 있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시후는 아름드리나무에 흑마 고삐를 묶어 두곤, 창을 단단히 잡은 채 능선 아래로 내달렸다.
이미 추나행은 표국을 둘러싼 녹림 무리를 돌파해서 안으로 파고든 지 오래였다.
그가 지나간 길은 이미 막혔고, 그렇다는 건 산적들은 뒤에서 달려오는 시후를 맞이할 준비가 충분히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니미럴, 저 개자식은 뭐야?”
“퉤! 주둥이 놀릴 시간에 막아!”
일 초에 떨어져 나갈 정도로 현격한 격차가 있었지만, 그건 상대가 추나행이었기에 그런 것이다.
바람을 찢어발길 듯 달려오던 추나행과 비교한다면, 둔한 멧돼지처럼 씨근거리며 달려오는 시후는 우습게 보일 터.
산적들은 곧바로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경공조차 펼치지 못하는 놈이 어딜······ 크엑!”
고작 삼류 주제에 상대를 얕잡아본 대가는 몸으로 겪어야 했다.
시후가 휘두르는 창대에 복부를 얻어맞은 산적이 뒤로 훨훨 날아갔다.
덕분에 산적들의 눈빛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다들 자세를 낮추며 시후의 창을 받아 내기 위해 조금씩 뭉쳤다.
어차피 이들을 힘으로 뚫을 생각은 없었다.
시간도 없거니와, 중요한 건 광마패도였으니까.
산적들이 뭉치는 것을 바라보던 시후는 손에 들린 창을 등에 빗겨 맸다.
갑자기 무기를 거두자 산적들의 눈매가 잘게 흔들렸다.
섣불리 달려들려고 몸을 움찔거리는 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무슨 속셈인지 파악하듯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비켜라! 우린 총표파자(總瓢把子) 광마패도 님에게 긴급히 전할 말이 있다!”
시후의 일갈에 대치 중이던 산적들의 눈이 요란하게 굴러다녔다.
‘총표파자’라면 녹림의 우두머리를 뜻하였고, 광마패도는 이번에 등극한 녹림 총채주의 별호가 맞았다.
“저놈 아는 사람 있어?”
누군가의 물음에 의문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총채주 님의 사람인가?”
“저 뒤에서 나타났잖아?”
“혹시, 개방에서 지원이 더 오는 걸 알려 주러 왔다거나?”
“경공도 모르는 무지렁이를?”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네가 먼저 치던가.”
얼핏 들리는 대화를 보니,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허장성세(虛張聲勢)가 먹히고 있는데, 주저할 필요가 있을까?
시후는 자신 있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산적들이 병장기를 꼬나 들긴 했어도, 차마 내리치긴 겁이 나는 듯 자세가 엉거주춤했다.
다들 주춤거리며 물러나기 바쁜 와중에, 어디를 가나 튀길 좋아하는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다.
물러나지 않은 한 산적이 도를 들어 올리며 시후를 겨냥했다.
“누······.”
“이름이 무엇이냐!”
산적이 누구냐 묻기도 전에, 되려 시후가 이름을 물었다.
역으로 질문을 받자, 도를 들어 올린 산적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쓸데없는 이유로 앞길을 막은 것이라면, 내 총표파자 님에게 고하여 네놈의 목을 날려 버리겠다! 다시 한번 묻겠다. 이름이 무엇이냐?”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요!”
홀로 막아섰던 그마저 물러나자, 시후의 앞을 막는 산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뻥 뚫린 앞을 향하여, 시후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광마패도를 향해 다가갔다.
기존의 이야기에서도 추나행이 잘 해결했던 이번 문제에 굳이 자신이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가만히 두면, 추나행이 알아서 광마패도를 잘 다독여 줄 것이 분명했기에.
다만, 그렇게 흘러가면 추후 있을 녹림채와 수로채의 회합의 규모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래선 곤란하다.
시후는 쭉쭉 갈라지는 산적들을 지나 뒤에서 관망 중인 광마패도에게 향했지만, 곧 문제가 생겼다.
산적들에게 잠시 발목이 붙잡힌 사이, 추나행이 먼저 광마패도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막 이야기를 나눈 것이면 좋겠지만, 별다른 투기를 발산하지 않는 광마패도의 뒷모습을 보니 곧 문제가 해결될 듯 보였다.
이대로 둬도 상관은 없지만, 흘러가는 데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광마패도! 내가 삼 초를 받아 내면 산적들을 모두 뒤로 물려라!”
광마패도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추나행의 얼굴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시후의 말을 들은 광마패도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돌아선 광마패도의 눈빛은 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고작 일류 수준인가?”
NPC들의 경우 ‘현격한 격차’를 바로바로 인지할 수 있으니, 광마패도의 말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일원신공’을 익힌 데다가 내공은 절정 초입에 다다랐지만, 무골이나 무공이 빈약했기에 여전히 일류의 수준이었다.
문제는 ‘현격한 격차’라는 건 그 어떤 운이 발생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수준의 상대라는 걸 의미한다는 것이다.
“총채주. 나와 대화를 나누던 거로 알고 있소만.”
“그렇지······. 그런데 잠시 날파리가 하나 끼어들어서 대화를 나누기가 힘드니, 한 마리부터 잡고 다시 대화를 이어나가지.”
“방주의 말을 가지고 온 나를 무시한다는 건 개방을 무시하는 것이고, 그렇다는 건 개방, 나아가 정의맹과 척을 지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문제없겠소?”
흉흉한 기세가 막 부닥치며 일촉즉발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추나행의 말에 광마패도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주먹을 꽉 움켜쥐는 추나행을 보더니, 곧장 바닥에 꽂아 둔 커다란 대도를 뽑아 들었다.
“글쎄, 확대하여 해석하는 게 취미라면 그렇게 하시고, 같이 베어 주길 원하는 게 아니라면 일단 비키지?”
“이놈! 내가 그리 우스워 보이더냐!”
“개방이 두려운 것이지, 선배의 추혼비각이 두려울까?”
광마패도의 말에 추나행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의도된 도발이라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평정심을 회복한 듯 평온해졌다.
틈을 보이면 베려고 했는지, 광마패도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일단 비키시오. 저 녀석이 남자답게 앞으로 나섰으니, 삼 초를 버틴다면 선배와 나누던 이야기도 들어 주겠소.”
“말도 안 되는 소리!”
추나행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광마패도는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광마패도를 바라보던 추나행은 시후의 곁으로 다급히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나야 중재하러 온 거지만, 네놈은 무슨 깡으로 이곳에 온 것이냐.”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온 거니 물러나요.”
“개뿔, 네놈이 저자의 삼 초식이라도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더냐?”
“방법이 있다고요.”
시후와 추나행의 실랑이는 끝이 없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광마패도가 발로 땅을 한차례 굴렀다.
“계집처럼 쫑알거리지 말고 어서 덤비거라! 그리고 추 선배는 옆으로 비켜나시오!”
당사자인 시후가 물러나지 않는데, 추나행이라고 딱히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저리 가세요.”
“우라질 놈.”
도움을 전혀 받지 않겠다는 듯, 멀리 떨어져 달라는 말에 광마패도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시후가 창을 들어 올리자 그는 들어오라 손짓했다.
“네 공격도 한 초식으로 인정해 주마.”
시후에게 그 말은 두 초식 만에 죽여 버리겠다는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광마패도는 연신 손을 까딱이며, 시후에게 어서 들어오라 손짓했다.
간을 보거나 대치를 할 필요조차 없었다.
수준 차이가 워낙 현격했으니깐.
시후는 곧바로 창을 내질렀다.
“구룡!”
아홉 개의 용이 입을 벌리며 쇄도했다.
광마패도의 손에는 어느새 등에 매달려 있던 대도가 들려 있었다.
무식할 만치 커다란 대도는 가볍게 휘둘러졌고, 시후의 구룡은 허상처럼 흩어졌다.
일 초가 지났으니 이제 그의 공격이 이어질 차례였다.
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다.
“검은 연꽃이 강을 따라 구주를 휘감을 것이다.”
가끔은 무력보다도 세 치 혀가 강력한 법.
시후의 한마디에 대도를 휘두르던 그의 어깨가 멈칫했다.
그 순간을 이용해 시후는 곧바로 창을 앞으로 찔러 넣었다.
“일섬!”
섬전처럼 찌르는 간결한 초식.
시후의 사모는 미간을 꿰뚫어 버릴 기세로 나아갔지만, 광마패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와중에도 그 공격을 가볍게 흘려보냈다.
아니, 흘려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대도에 시후의 창은 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착 달라붙어 있었다.
광마패도는 그 커다란 대도로 착자결(着子結)을 펼쳐 시후의 창을 붙잡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
[기막이 펼쳐졌습니다.]
시후는 알람 창 너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광마패도의 눈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넌.”
- 14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