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프롤로그
“드디어 내일이네.”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연신 키보드를 두들기던 시후의 손가락이 잠시 멈추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일은 그의 입사와 동시에 진행되었던 「천무」 온라인이 세상에 모습을 선보이기 때문이었다.
「천무」 온라인.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가상현실 게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게임이 선택한 방법은 매우 특별했다.
‘과거는 쓰여 있지만, 미래는 여러분이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게임 속 배경이 되는 무협지 『천무』는 고정되어 있지만, 그 미래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천차만별로 바뀔 것이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갈려 나갔던가.
우스갯소리로 ‘영혼을 갈아 넣었다’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건 손가락을 쉴 틈 없이 움직이는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다들 들어가 봐.”
백창현 부장의 말에 일순간 시후의 몸이 멈췄다.
비단 그러한 반응을 보인 건 시후만이 아니었는지, 사위가 정적에 잠겼다.
고개를 돌린 시후는 백창현 부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입니까?”
“물론. 다들 확인하던 것만 끝나면 퇴근해. 아, 그리고 방금 되물어 본 차시후 대리는 메일 보내 줄 테니 그거 검토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시뮬레이션 한 번 더 돌리고 퇴근하도록.”
‘제기랄, 실수했다.’
퇴근이라는 달콤한 꿀에 취해, 두 번 말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백창현 부장에게 질문을 던진 건 명백한 시후의 실수였다.
그 실수의 대가는 다름 아닌 업무의 연장.
그가 말을 철회할 일은 없으니, 시후는 오늘도 야근을 해야 할 것이다.
시후는 분노 어린 마음을 담아 키보드를 흠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물론, 손끝으로.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요즘은 기도 메타가 유행이라고 했던가.
메일을 클릭하기 전, 시후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짧게 기도를 올렸다.
“젠장.”
하지만, 신은 없었다.
확인해야 할 자료량을 본 시후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의 절망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창현 부장은 야속하게도 겉옷을 걸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주 과장을 필두로, 사람들이 하나둘 사무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비어 가는 사무실 인원만큼 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왜 하필 나야?”
“그러게 왜 말을 걸었어? 5년을 지냈는데 저 사람 성격을 아직도 몰라?”
“빌어먹을.”
입사 동기인 태영의 이죽거림에 시후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말대로 알고서도 실수한 건 시후 자신이었으니까.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시후의 어깨를 태영이 툭툭 건드렸다.
“도와주면 마치고 술이나 한잔?”
“너랑 술을 마시느니 회사에서 잠을 자겠다.”
“아, 진짜 딱 한 잔만.”
“꺼져.”
시후가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태영도 자기 일에 집중했다.
다만, 많은 양은 아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간다?”
시후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태영의 말을 대놓고 무시했다.
조그맣게 투덜거리던 태영이 사라지자, 곧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는 시후의 키보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시후가 잠시 손을 멈추자, 사무실 내부엔 정적이 찾아들었다.
혹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보았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빌어먹을 오늘도 최후의 생존자는 나 혼자군. 윌 스미스조차도 곁에 개 한 마리는 있었는데 말이야.”
시후는 최근에도 다시 봤던 고전 영화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결국, 샘이라 불리는 개 또한 감염되어 윌 스미스가 숨을 끊는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하긴, 결국엔 윌 스미스도 혼자 남았었지. 일이나 하자, 하지 않고 집에 갈 방법은 없으니깐.”
신세를 한탄해 봤자 뭘 하겠나 싶어 잡념을 빠르게 내려놨다.
시후는 두 눈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무서운 집중력을 보였다.
덕분에 키보드는 연신 비명을 토해내야만 했다.
집중이 끝났을 땐, 이미 한 시간이 훌쩍 넘게 지나 있었다.
그 덕분에 다행히도 열 시 전에는 퇴근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런 행복한 생각이 찾아들자, 시후는 책상을 살짝 내려쳤다.
“뭐가 다행이야. 여덟 시에 출근해서 열 시에 퇴근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제기랄! 이런 거지 같은 회사.”
입과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투덜거리는 입은 분노를 내뱉었고, 구름을 매만지는 듯한 손놀림은 키보드를 어루만지며 제 역할을 다 했다.
다행히 메일을 회신한 시간은 열 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퇴근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취하기 위해선,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위해선 사무실 가운데 놓인 중앙 컴퓨터로 가야 했지만, 중앙으로 향하던 시후의 걸음이 갑자기 선회하며 사무실 구석으로 향했다.
시후의 발이 멈춘 곳은 새까만 캡슐 앞이었다.
‘블랙 모아이.’
캡슐 초기 모델은 몇 번 들어가 보았지만, 최종판이라 불리는 이 블랙 모아이를 사용해 본 적은 없었다.
“이 캡슐 하나가 삼천만 원이라니.”
시후는 곁으로 다가가서 블랙 모아이 캡슐을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무광과 단순하게 생긴 외견은 회사가 추구하는 것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했다.
“캡슐의 디자인에 백날 신경 쓴다고 해도, 게임이 재미없으면 팔리지 않는다.”
입사부터 질리도록 들었던 말을 중얼거리다가, 캡슐 상단에 있는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띡.
퓨쓔우우.
바람 새어 나오는 소리와 함께 캡슐이 껍질을 벗고 내부를 보여 주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가기엔 충분해 보이는 공간.
내부 역시 외견과 마찬가지로 깔끔했다.
슬쩍 몸을 집어넣어 보자, 예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관에 들어가는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면, 지금은 몸을 살포시 감싸오는 게, 마치 오리털로 만든 침낭 같았다.
“이야, 여기서 자도 괜찮겠는데?”
조금 누워 있다 보니,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극 초반에야 시후도 자주 들어가서 구현도를 확인했지만, 전문 테스터들을 고용한 뒤부터는 들어갈 일이 없었다.
영상으로 보기는 했지만, 캡슐에 누워 있을수록 과거의 향수가 시후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잠깐만 들어가 볼까?”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신속했다.
“일반 사용자로 들어가고······.”
초기 테스트를 해 보았던 탓일까.
손가락을 거침없이 움직였다.
십여 가지에 다다르는 패널 버튼을 연이어 누르자, 곧 캡슐 안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신경 안정화 가스가 나옵니다.]
캡슐의 소리와 함께 머리맡에서 약한 바람과 가스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빠른 접속을 위해 강제적으로 반 수면 상태에 빠지자, 한창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메인 서버로 시후가 업로드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차 대리는 벌써 갔나?”
백창현 부장이었다.
그의 양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하나가 아닌 두 개인 거로 봐선, 시후를 위한 선물이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선물을 받을 사람은 지금 자리에 없었다.
그는 양손에 커피를 들고 사무실을 걸어오다가 시후의 자리를 지나 중앙 컴퓨터에 다다랐다.
“어딜 간 거야? 게다가 내가 시뮬레이션 다시 돌리라고 했을 텐데?”
백창현 부장이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중앙 컴퓨터에는 아직 기존의 시뮬레이터가 돌아가는 중이었으니깐.
“차 대리 이 녀석은 가끔 덤벙거리는 성격이 문제란 말이야.”
한숨을 푹푹 내쉬던 백창현 부장은 중앙 컴퓨터의 키패드를 빠르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리셋하고······ 2만 배속으로 돌리면 내일 7시 전에는 끝나겠군.”
백창현 부장은 패널 위로 뜨는 알람 창을 읽지도 않은 채 YES를 연타했다.
곧이어 화면이 검게 변하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들린 커피 중 하나를 시후의 자리에 올려 두곤, 품에서 담배를 꺼낸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빠져나온 사무실 구석에는 아주 미약한 소리와 함께 캡슐이 작동하고 있었다.
캡슐에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 주는 빨간색 불빛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중앙 컴퓨터가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캡슐 외부에는 ‘Uploading 100%’라는 글자만 계속 점멸하고 있었다.
여전히 시후를 품은 채로.
- 1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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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화 오류?
「나의 위에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조차 부숴 버리리라.」
중2병 가득한 문구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글자가 조금 뭉개져 보였다.
마치 볼록렌즈로 보는 것처럼 울룩불룩 변하던 글자는 조금 뒤 다시 제 모양을 찾았다.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찌푸렸지만, 곧 글자는 연기처럼 바람에 흩어졌다.
“얼씨구? 내일이 오픈인데 그래픽이 왜 깨지고 난리야? 처음에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시후가 혀를 차는 사이, 눈앞에 빛무리가 모여들더니 이내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천무’ 온라인의 시작 도우미였다.
“안녕하세요! 천무 온라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시작 시 도움을 드리는······.”
“생략. 외견 수정으로.”
칼같이 말을 끊자 도우미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팔을 옆으로 뻗었다.
곧 손끝이 닿은 허공이 일렁이더니 그 앞에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자신의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볼 정도로 자기애가 강하진 않았다.
샤워할 때는 다르지만.
곧 도우미가 생글생글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기본적인 외견 수정이 가능합니다. 명령어는······.”
“나이 스무 살, 피부 보정, 점 제거, 키 7cm 추가, 몸무게 12kg 감소, 콧대······.”
도우미의 설명을 다 듣기도 전에 시후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외모를 보정해 나갔다.
조절 가능한 키와 몸무게를 최대치까지 건드리고 콧대와 눈매마저 수정하자, 일평생 가져본 적이 없던 외모가 나타났다.
얼핏 봐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음······ VIP 등급에 따라 외견 수정을 더 수정할 수 있으면······.”
확연히 변해 버린 외모에 흡족해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자신의 실적을 올릴 방법을 궁리했다.
기본 외견 수정으로 이 정돈데 추가로 더 건드릴 수 있다면, 외모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니겠는가.
물론, 시후를 포함해서도 말이다.
“해당 외모로 시작하시겠어요?”
“그래.”
건성건성 대답하는 시후의 태도에도 도우미는 다시금 웃어 보였다.
그러곤 왼손 위에 게임 배경이 되는 중원의 지도를 띄우며 설명을 시작했다.
“외견 수정을 종료합니다. 다음으로 시작 도시 및······.”
물론, 이번에도 말을 끝까지 내뱉지는 못하였지만.
“무작위, 중립, 천추성, 기린, 없음.”
중원 지도가 미처 다 떠오르기도 전에, 시작 도시를 시작으로 진영과 배후성(背後星), 영수(靈獸)와 체질을 단박에 정했다.
시후가 설명을 듣지도 않고 거침없이 선택하자 도우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작위, 중립, 천추성, 기린, 없음. 맞나요?”
“그래.”
“그럼, 다음으로 천무 온라인 내 간단한 명령어 등을 알려 드릴······.”
“생략. 바로 시작.”
도우미는 이제 곧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확실히 이런 점은 구현된 정도가 뛰어났다.
일반 NPC들이야 단순 코드로 짜여 있지만, 특수한 개체들은 사람의 뇌를 스캔하여 그 위에 프로그래밍을 씌워서 그런지 대단히 사람 같았다.
“즈, 즐거운 천무 온라인 되세요.”
도우미의 인사말과 동시에 눈앞에 흑백의 조화가 절묘한 웅장한 문이 나타났다.
문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간 시후는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보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중지를 펼친 도우미를.
* * *
[‘천추성’의 가호를 받습니다. 도교(道敎) 관련 인물들에게 추가로 호감도를 얻습니다.]
[영수로 기린을 선택하셨습니다. 영구적으로 이동 속도가 상승합니다.]
“응?”
시후는 눈을 뜨자마자 쭉쭉 떠오른 반투명한 알람 창을 끄다 말고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기초 무관에서 시작해서 최소한의 무공을 가지고 나가야 하지만, 시후가 눈을 뜬 곳은 허름한 골목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시작 지점이 아니었다.
게다가 ‘첫걸음’이라는 시작 임무조차 뜨지 않았다.
“이런 시작 지점도 있었던가?”
아니다.
절대 없다.
확언할 수 있었다.
시작 지점 중 이런 곳은 없었다.
천무 온라인의 시작을 함께했던 자신이 모르는 시작 지점이라니,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누군가 졸면서 코드를 잘못 입력한 게 분명했다.
“하! 내일이 오픈인데 이런 오류가 있다고?”
시후는 복잡한 심경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시작부터 이 모양이면 뭔가 더 있지 않겠는가.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마차 여섯 대는 지나갈 법한 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쥐가 들끓을 것만 같았던 골목과 달리 대로변은 깔끔했다.
그리고 넓었다.
규모를 보아하니 아마도 성도급의 도시일 터였다.
좌우를 살피던 시후의 눈에 저 멀리 황금빛 전각이 들어왔다.
덕분에 골치가 더 아파졌다.
“성도급 도시에 황금빛 건물?”
엄청 눈에 띄는 건물이었지만, 성도급 도시에 저런 인상 깊은 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시후의 머릿속에는 말이다.
찾아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 짓눌렀다.
“빌어먹을, 왜 갑자기 이런 오류가······.”
골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지만, 혹여나 더 심각한 오류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불안한 마음에 시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거닐었다.
“이봐, 그 소식 들었나? 포목점 송 씨 딸이 어젯밤 야반도주를 했다지 뭔가.”
“당과 다섯 개만 담아 주쇼.”
NPC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이곳에 관한 단서를 찾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와중 어디선가 들어본 단체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청일표국에 어젯밤 도둑이 들었다던데······.”
“쉿! 청일표국 사람들이 듣는다면 경을 칠 소리를!”
“청일표국의 위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찌른다고 하더니, 내 주둥이까지 간수하려 들 줄은 내 몰랐군!”
“어허! 이 사람이 늦가을에 더위를 먹었나. 이쪽으로 와봄세.”
수염이 성성하게 자라난 두 노인이 대로변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골목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자 시후는 기억 저편에 뭔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분명 ‘청일표국’이라는 곳은 기억 저편 어딘가에 박혀 있는 곳이었다.
“어디서 들어봤지?”
그 자리에 멈춰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지만, 도통 머릿속 어디에 박혀 있는지 떠오를 기미가 없었다.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기보단, 적당히 인지만 하고 있으면 떠오를 거란 생각을 가지고 다시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단순히 시작 지점에 관한 오류인가······. 그보다 여기는 대체 어디야? 지도.”
지도를 펼치니 더욱 가관이었다.
분명 지도는 감숙성 난주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즉시 지도를 껐다.
확대해 볼 가치도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난주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폐허였으니깐.
“지도 역시 맛이 갔고······. 일단 저리 가볼까.”
거리에서 NPC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수집해서 듣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에, 가장 상징성이 있어 보이는 황금빛 전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칠한 것처럼 반짝이는 것은 둘째치고, 전각 외부 곳곳에 자리 잡은 조각들은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하였다.
특히, 전각 가장 최상층에는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봉황 조각과 전각 외견을 둘둘 감싸고 있는듯한 용 그림은 정말 심혈을 기울였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으니까.
다만, 지금 중요한 건 저딴 게 아니었다.
곧바로 입구를 향했다.
“이보게.”
당장이라도 관을 박차고 나올 듯한 노인이 시후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쩍 마른 몸에 추악한 외모와 꾀죄죄한 옷차림, 오물통에 뒹굴다가 왔는지 코가 떨어질 것 같은 악취까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노인이었다.
“사람이 불렀으면 대꾸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뭔가가 있는 노인네 같았다.
일반적으로 이런 변수를 만들어 내는 건 일반 NPC가 아니었으니깐.
시후가 빤히 바라보자 노인은 혀를 찼다.
“거, 눈빛 하고는······. 이보게, 내 배가 고파서 그러니 만두 한 접시만 사주지 않겠나.”
분명 최초 접속 시 전낭에는 은 열 냥이 지급된다.
어차피 잠시 확인만 하고 나갈 건데 돈이 무슨 상관이랴.
시후는 눈앞의 노인네가 어떻게 나오는지 볼 요량으로, 품속을 뒤져 전낭을 노인에게 던져 주었다.
전낭을 통째로 받아든 노인의 얼굴이 한층 오묘하게 변했다.
“자네, 돈 많은가?”
“이게 가진 돈 전부인데.”
노인의 외모는 여든은 훌쩍 넘어 보였다.
그런 노인을 대하는 시후의 태도는 분명 현실에서의 모습과 달랐다.
하지만, 지금 잔뜩 신경이 곤두선 상태에서 가식을 떨긴 싫었다.
상대가 NPC라는 점도 있었지만.
다만, 노인은 무엇이 재미있는지 껄껄 웃으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럼 밥 먹을 돈도 없겠군. 따라오게나. 내 밥을 사도록 하지.”
시후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노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그는 단 한치의 미동조차 없었다.
눈만 감으면 시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의 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확실히 뭔가 있는 NPC였다.
시후는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 그가 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아니, 어르신. 오늘은 또 왜······.”
그런 그의 앞을 막은 건 전각 입구를 지키던 점소이였다.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노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놈아! 오늘은 손님이다. 손님!”
“그냥 원하시는 음식을 드리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더는······.”
“어허, 이놈이 이공(耳孔)이 폐색(閉塞)되었나, 어찌도 이리 말을 못 알아들을꼬. 손님이라고 하지 않느냐, 손님.”
그는 점소이의 애원에 손에 들린 전낭을 짤랑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점소이의 얼굴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 반응이 노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일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노인이 성질을 부렸다.
“냉큼 자리로 안내하지 못할까!”
“아,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불같이 화를 내는 노인의 모습에 점소이는 울상을 지으며 전각 안으로 안내했다.
노인에게 팔을 붙잡힌 시후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입구를 지나 전각 내부로 들어가자 그 광경은 외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식탁 하나에도 장인의 혼이 깃들어 있었고, 내부 장식품 중 예사로운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주위를 둘러보던 시후를 향해 노인이 불쑥 물었다.
“어차피 다 가짠데 무슨 상관이람.”
노인에게는 현실이겠지만, 시후에게는 단순히 잘 만들어진 그래픽에 불과했다.
시후의 대답에 노인의 옹이구멍만 한 눈이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노인의 입술이 벌어지며 뭐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때마침 자리에 안내해 준 점소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어르신. 여기 어떠십니까. 여기 벽에 걸린 ‘추월화’라는 작품을 감상하시면서······.”
“만두나 두 접시 내오거라.”
“아, 저기······.”
노인의 주문에도 어찌 된 일인지 점소이는 움직일 기색이 없어 보였다.
우물쭈물하는 점소이의 앞에서 노인은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거들먹거렸다.
“어허! 돈은 있대도!”
“······ 만두 두 접시에 은 열두 냥입니다.”
점소이의 말에 노인이 당당한 표정으로 시후를 바라보았다.
거기 열두 냥 없는데.
눈이 마주친 시후가 살짝 눈을 좌우로 굴리며 어깨를 으쓱거리자, 노인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러곤 품에 넣은 전낭을 꺼내 짤랑거려 보더니, 시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노려본다고 없는 돈이 나오기야 하겠는가.
점소이를 매섭게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온화하게 바뀌었다.
“자네, 그리 허기진 건 아니지? 그렇다는군. 그럼 두 접시면 너무 많지. 한 접시만 냉큼 내오너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그의 모습에 점소이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점소이를 향해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던 노인이 낯빛을 바꾸어 시후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고작 은 열 냥으로 이 ‘황금각’을 올 생각을 했단 말이야? 육시럴. 당연히 금이라고 생각했거늘, 은 열 냥이라니. 이곳은 금이 없다면 출입을 금한다는 흰소리가 돌 정도로 비싼 곳임을 몰랐단 말이냐? 이런 세상 물정 모르는 얼같이 같은 놈을 보았나······.”
전낭을 열어보지도 않고 열 냥을 맞춘 노인의 재주는 제법 놀라웠다.
그것도 금인지 은인지도 바로 알아차리다니.
그의 말을 들었다면 누구나 놀랄 것이 자명했다.
물론,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별로 놀라운 재주도 아닌데 놀라워하긴. 내게 이정도 재주는······.”
하지만, 노인의 예상과 달리 시후가 놀란 건 그의 재주 때문이 아니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주변을 둘러보던 시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황금각?”
“응? 그래, 황금각이지. 그보다 이놈이 혓바닥이 어디서 잘렸나. 말끝이 왜 이렇게 짧은 게야? 이놈아, 아무리 못해도 네놈보다······.”
노인의 타박에 시후는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황금각은······ 18년 전에 불타서 사라진 난주(蘭州)에 있을 텐데?”
- 2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