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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200화 결 (2)
사람 열 명이 드러누울 수 있는 제법 너른 공간에 세 사람이 나란히 엎드려 있었다.
두 명은 검객(劍客)이었다.
절을 올리는 와중에도 절그럭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을 정도로 잘 다듬어진 무인.
그리고 그들 앞에는 수많은 위패가 놓여 있었다.
절강패웅 위무구.
수초검 철무막.
서량수사 배현덕.
정의맹과 마교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 중, 독보강호 하던 이들을 기리는 사당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주변보다 조금 더 큼지막한 위패가 하나 있었다.
구주신창 적룡패주 차시후.
엎드린 세 사람이 누군지는 뻔했다.
가장 좌측에 있는 검객은 천비령이었다.
꽃은 시드는 법이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시들 줄 몰랐다.
아니, 흘러간 시간이 오히려 영양분이 된 듯 더욱 아름다워졌다.
그 반대편에 있는 홍설도 만만치 않았다.
단순히 엎드렸다 일어나는 것일 뿐인데도 온몸에서 농염함이 잔뜩 묻어났다.
그런 두 꽃 사이에는 한 자루 검과 같은 기도를 뿜어내는 남궁천이 있었다.
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하염없이 위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조차 끔벅이기 싫다는 듯 잔뜩 붉어진 눈으로 말이다.
“앉아서 봐요.”
천비령이 그의 팔을 잡아 살살 바닥으로 이끌었지만, 남궁천은 요지부동이었다.
몇 번 실랑이를 벌였으나, 작년과 마찬가지로 패자는 비령이었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우두커니 서 있는 남궁천을 내버려 두곤 홍설의 앞에 앉았다.
그리곤 막 금으로 손을 옮겨가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올해는 조용히 추모할 수 없을까요?”
홍설은 비령의 손을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밀어냈다.
비령은 곧 울상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홍설은 매년 사모별인 추혼가를 연주했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애틋함이 더해져 절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홍설이 공력을 실어서 연주한다면 내공이 약한 이는 자살할지도 모른다.
비령이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이기 무섭게 홍설의 손가락이 현 위를 뛰어놀기 시작했다.
현이 튕길 때마다 섬뜩한 칼날이 심장을 할퀴고 도려냈다.
그를 통해 홍설이 얼마나 심적으로 힘들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비령은 흐르는 눈물을 가두기 위해 천장을 올려다보았으나, 아무리 커다란 눈망울이라 할지라도 끝없이 샘솟는 눈물을 담아 두기엔 역부족이었다.
기어코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홍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탓에 현을 뜯을 때마다 눈물이 현 위로 떨어져 내렸다.
과묵하게 서 있는 남궁천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시후의 위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지만, 시후를 떠올린다는 점은 다르지 않았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홍설의 사모별인 추혼가는 어느새 끝을 맺었다.
홍설은 잠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다가, 이어 불래연(不來戀)을 연주하기 위해 재차 금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현에 닿지 못했다.
스르륵.
남궁천이 몸을 돌린 것이다.
그는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맹에서 오기로 했나?”
그의 물음에 홍설은 고개를 저었다.
매해, 이곳은 항상 세 사람의 차지였다.
올해도 그럴 줄 알았으나, 문 너머 불청객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궁천은 잠시 고민하더니 문을 향해 다가갔다.
비령이 그런 그의 소매를 빠르게 잡았다.
“잠을 청하려고 오는 걸 수도 있으니······.”
“불가.”
남궁천의 간결한 대답에서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묻어났다.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고 배려심 깊었던 그라곤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남궁천의 단호한 태도 때문일까.
비령은 그를 더 만류하진 않았다.
남궁천은 그런 비령을 지나쳐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우뚝 선체로 가볍게 기도를 뿜어내었다.
문제는 ‘가볍다’라는 기준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다가오는 자가 한 성에서 열 손가락 내로 꼽히지 않는다면, 다가올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강한 기도를 내뿜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남궁천의 입술이 살짝 씰룩거렸다.
다가오던 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니깐.
그에 남궁천은 더욱 기세를 끌어 올렸다.
사당 내에 작은 바람이 불 정도였다.
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아무리 낮게 쳐 줘도 천하 백 대 고수 수준에 근접했다.
“허!”
남궁천이 탄식을 터트렸다.
상대는 그래도 다가오고 있었으니깐.
천비령과 홍설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곁으로 다가왔다.
“누굴까요?”
“이곳에 접근하지 말라고 해도 이렇게 다가온다면······.”
“설마, 마교?”
천비령이 화들짝 놀라며 낮게 중얼거렸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마교가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성을 버리고 달아남으로써, 이전의 위세를 되찾으려면 한참이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뒤에서 음모를 꾸밀지언정 이렇게 정면으로 다가오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세 사람의 귓가에 자박자박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거리는 대충 십여 장.
이미 매우 가까웠다.
그에 남궁천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쿵.
“멈추시오.”
상대가 말을 들은 것일까.
상대는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남궁천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곳은 십 년 전 마교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강호 영웅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오. 마침 오늘이 그 기일이라 제를 지내고 있기에 안으로 들이진 못할 거 같소.”
“······.”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상대는 걸음을 옮겼다.
뒤가 아니라 앞으로.
그에 남궁천은 검에 손을 얻었다.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그리하겠소.”
협박에도 상대는 굴하지 않았다.
“내 아우도 저곳에 있소. 부디 오늘 이 만남을 계속 이어 갈 수 있게 해 주시오.”
진실 어린 호소 덕분일까.
상대는 걸음을 멈췄다.
말을 더 꺼내어 설득할 법도 했지만, 남궁천은 말을 아꼈다.
지금 상황에서 언어는 사족이었다.
말을 덧붙이는 것 자체로 어설퍼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오랜 침묵 끝에 다시 앞으로 걸어왔다.
남궁천은 긴 한숨을 내쉬며 검을 뽑아 들었다.
“피는 안 봤으면 좋겠어요.”
“물론.”
남궁천은 비령의 걱정스러운 말에 가볍게 대꾸하며 문을 열었다.
상대가 고개를 숙이고 있기도 하거니와, 빛을 등지고 있는 터라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에 들고 있는 기다란 창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남궁천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십 년 전 이후로 창을 쓰는 이들이 많아졌다.
누구의 영향인지는 뻔했다.
제 몸을 불살라 천마를 격살한 강호의 영웅.
“다시 한번 경고하지만, 오늘은 이 안으로······.”
남궁천은 말을 하다말고 멈췄다.
상대가 다가올수록 창의 모양새가 눈에 익숙했으니깐.
그 모습에 입술을 더욱 잘근 깨물었다.
시후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분노했다.
“감히, 누가!”
똑 닮은 무기를 들고 이 자리를 방해하다니!
그의 전신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천하 백 대 고수?
아니다.
적어도 삼십 대 고수의 수준이었다.
그에 맞춰 상대도 기세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남궁천의 기세가 흐트러졌다.
상대가 창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숙였던 고개도 위로 들렸다.
챙, 챙그르르.
남궁천은 천하 십 대 명검에 들어가는 간장검을 냅다 바닥에 던졌다.
“차 아우!!”
* * *
밤은 지극히 짧았다.
정말 너무나도 짧았다.
그간의 대화를 나누기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가세! 올해는 미아가 못 왔지만, 미아도 정말 자네를 보고 싶어 했을 거야. 미아뿐만이겠나? 아버지께서도 자네한테 갚지 못한 빚이 있다며 항상 후회하셨네. 그리고 제갈세가도 가야 하지 않겠나? 려가 얼마나 상심이 컸었는지, 자네가 사라지고 석 달을 앓아누웠었다네. 아, 간 김에 철우도 봐야겠군. 이 녀석은 뜬금없이 어검대에 들어갔지 뭔가. 그리고······.”
남궁천은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마치 말을 멈추면 시후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시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남궁세가로 가죠.”
그 대답을 들은 남궁천의 입이 찢어질 듯 커졌다.
비령이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빨리 움직여야 일찍 도착하죠.”
“아, 그럼 어서 나가세!”
시후는 그런 남궁천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했다.
“일단, 몰래 가다가 낙양을 지날 때쯤 여기저기에 알리는 걸세. 그렇다면 다들 발칵 뒤집히지 않겠나? 생각만 해도 재밌군. 특히, 추나행 장로님 같은 경우는 천릿길도 달려올 테지. 아, 천지쌍협께는 몰래 얼굴을 비춰야겠군. 자네를 얼마나 그리워하셨는지, 지켜보던 내가 다 가슴이 짠할 정도였다네. 그리고 두 분이 키우던 혜아라는 아이도 보고 가야 하지 않겠나.”
남궁천은 경공을 펼치며 떠드느라 내공이 적잖이 소모되었을 테지만,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계속 떠들었다.
시후는 그런 남궁천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와중에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를 찾았다.
“뭘 찾는 건가?”
“아, 그게 잠시 소피가 마려워서······.”
“요 앞에 봉우리만 넘으면 제법 우거진 풀숲들이 나온다네. 조금만 더 참게나.”
남궁천의 말마따나 봉우리를 하나 넘자 제법 우거진 풀숲이 나왔다.
시후는 따라오려는 남궁천을 제지한 뒤, 빨리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풀숲으로 들어갔다.
뒤돌아 남궁천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남궁천이 어서 다녀오라는 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옆에 홍설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정말 귀여웠다.
비령은 피식 웃음을 흘리는 것이 조금 얄밉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시후의 눈엔 귀엽게만 보였다.
그들에게 눈을 돌려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눈물을 훔치며 낮게 속삭였다.
“로그아웃.”
* * *
시후는 모니터를 뚫을 정도로 관찰했다.
놀라울 정도로 집중한 시간이 어느덧 여섯 시간을 지났다.
그리고 그 집중에 관한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충분한 것 같아요.”
“하······.”
백창현 부장이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대로 의자와 한 몸이 되려는 듯했지만,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평소 오지랖이 넓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을 거 같군.”
시후는 그의 말에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니터는 실시간으로 한 사람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바로 시후였다.
시후는 세 사람과 함께 천산산맥을 내달리고 있었다.
“후회하는 건 아니지?”
백창현 부장이 불쑥 묻자 시후는 그제야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시후의 선택은 간단했다.
자신을 데이터화하여, 한 명의 NPC로 만들었다.
지금 남궁천의 곁에 있는 건 시후 자신이었지만, 자신이 아니었다.
“이게 맞아요. 게임과 현실을 구분해야 하니깐요.”
“구분하는 녀석이 데이터화한 NPC를 NPC에 붙여 줘?”
그의 말에 시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만족이죠. 이래야 제 마음도 홀가분해질 것 같으니까요.”
“후회되면 말해. 어차피 롤백하면······.”
“아뇨.”
시후는 백창현 부장의 말을 끊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 안에 있었던 일들은 추억으로 간직할 겁니다.”
그 대답에 백창현 부장은 피식 웃으며 시후의 머리를 헝클었다.
“잡생각은 다 태운 거 같아?”
“어느 정도는요.”
“어느 정도는 무슨, 죄다 태웠어야지.”
백창현 부장의 말에 시후는 모니터 속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NPC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추억마저 태울 수는 없잖아요.”
- 완결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