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69화
* * *
천족의 가장 큰 약점은 날개다. 약점임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신체부위다.
천족의 문화 중 하나는 등에 아무도 태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외로 등에 누군가를 태울 때가 있는데.
자신의 약점을 맡길 정도로 소중한 이에게 신뢰와 호감을 내보였을 때라고 한다.
강한윤은 '천족의 문화' 라고 제목이 적힌 책을 닫았다.
라이라에게 베아트리스와 관계를 의심 받은 뒤 궁금해서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얘기한 게 틀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하지만 천족에 관한 서적을 3권까지 읽고 난 뒤에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천족은 등에 아무나 태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베아트리스는 왜 그런 거지.'
게임에서는 당연히 종족의 문화 같은 건 설명해주지 않는다.
설정 집에도 그런 구구절절한 설정은 없었다.
'천족에게 다른 영웅을 태우지 못하는 건 버그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
강한윤은 게임을 할 때 이해할 수 없었던 요소가 있었다.
천족에게 물건 운반은 할 수 있어도 영웅을 태우는 건 안 되는 것이다.
그저 밸런스 상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문화 때문에 못 태운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강한윤은 작전 막사로 돌아가서 에우제니아의 책상 옆에 앉았다.
"에우제니아. 천족의 등에 남성이 타는 건 신뢰와 호감의 의미라는 데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지. 난 그래서 네가 베아트리스랑 이미 섹스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섹스한 줄 알았다고?"
당연하듯이 말하는 에우제니아에게 강한윤은 눈을 찌푸렸다.
"신뢰와 호감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배필이라고 인정하는 사내가 아니면 여성들은 태워주지 않지. 아니면 가족이거나."
"아니... 그럼 나는 왜 태워준 거야?"
"그만큼 좋나보지. 강한윤 너는 진짜 여자 복이 터졌나보다. 1명 더 늘어서 좋겠다?"
"아니... 착잡하다고. 나는 모르고 탔는데 이런 의미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했으니까."
"난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해라. 별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에우제니아가 혀를 찼다.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하는 그녀의 태도에 강한윤은 오히려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만졌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야.'
베아트리스의 심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물어보기도 그런 상황이었다.
계급이 훨씬 높은 상관에게 대놓고 '베아트리스님. 저를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십니까?' 라고 말한다? 미친 게 틀림 없다.
그건 절대 아니다. 해서는 안되는 방법이다. 강한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먼저 얘기를 꺼내긴 애매하니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하나.'
그는 머릿속에서 수많은 고민을 하며 서류를 정리했다.
물론 에우제니아는 강한윤의 상황이 어떤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일과 끝나고 저녁 먹기 전에 내 막사로 찾아와. 오늘 저녁엔 노아 중위에게 갈 거잖아."
그녀는 오늘 시간을 아껴서 빠르게 섹스를 하고 싶었으니까.
어제는 저녁에 했으니, 오늘은 남는 시간에 짧게라도 즐길 생각이었다.
강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막사로 찾아갈 생각을 했다.
여기서 더 고민을 한다고 해봐야 해결 되는 건 없다.
베아트리스에 관한 것도 신경이 쓰이지만, 더욱 중요한 건 작전을 어떻게 하느냐다.
'뭐. 알아서 되겠지.'
강한윤은 미래의 자신이 알아서 잘 해결할 거라 믿고 막사 밖으로 나섰다.
***
강한윤은 점심을 먹고 난 뒤, 부대의 남쪽 문을 향해 걸었다.
베아트리스가 그를 데리러 오니까. 약속된 장소로 나가야 했다.
펄럭 펄럭
공중에서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리고, 베아트리스가 땅에 가볍게 착지했다.
"베아트리스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한윤. 오늘은 빨리나왔네요."
"오전 일과로 할 일이 없었거든요."
강한윤은 자연스럽게 베아트리스의 등에 업혔다.
살결이 부드럽다는 생각을 하며 자연스럽게 목덜미 부분으로 얼굴을 기댔다.
베아트리스에게서 베이비파우더 향이 났다.
'나만 의식하는 건가?'
베아트리스는 아무 감정이 없을 수도 있다. 그저 작전이기 때문에 태워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감정이 있다는 것이겠지.
강한윤은 먼저 입을 열었다.
"베아트리스님."
"왜요?"
"..."
하지만 그 이후로 말을 하려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한 마디. 그 한마디면 되는데.
이 한 마디로 인해서 작전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족과의 사이가 좋은 상황에서 굳이 트러블을 만들 수는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에요. 시시하게."
그녀의 말에 웃음기가 섞여있었다.
'그래. 작전 끝나고 물어보자.'
조금 더 시간을 보낸 뒤에 확신을 가지자.
아무런 힌트도 없는 지금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강한윤은 베아트리스의 등에 탄 채로 카브란 산맥으로 향했다.
마을에 내려서 하프반, 나인, 디엔 3명이 작업을 잘 하고 있는 지 확인한다.
스크롤에 문제가 없는 지 직접 확인을 하고 난 뒤, 달리스의 오두막으로 향하는 것으로 간다.
"강한윤. 저는 주변을 날아보고 올게요."
"네."
베아트리스가 날아간 하늘을 바라보던 강한윤은 달리스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달리스. 오늘 저녁에 뭐 먹고 싶어?"
"크음... 그.. 생선 구이가 맛있었다."
"역시 그렇지?! 내가 달리스 입맛을 잘 알거든. 에헤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강한윤이 달리스의 오두막에 들어가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달리스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애교를 부리듯이 말하는 세베라.
그걸 부끄럽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달리스다.
이제는 세베라가 달리스에게 착 달라붙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강한윤은 내부로 들어가서 작업이 끝난 스크롤들을 확인했다.
"일은 제대로 하고 있네."
"강한윤. 언제 왔어?"
"방금 왔지. 너네 둘이 이런 저런 짓을 하는 것도 다 봤고."
"이런 저런 짓은 하지 않았다!"
달리스가 발끈했다. 이렇게 반응하니 오히려 정말로 한 것처럼 보인다.
강한윤은 보고 있던 스크롤을 대충 책상 위로 던져 놓았다.
'흐음.'
아무리 봐도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였다.
어색하면서도 풋풋하면서도 분홍색 하트가 피어오르는 듯한 분위기.
이제야 막 섹스를 한 커플의 느낌이다.
'뭐 상관없긴 한데.'
작업물만 잘 나오면 그만이니까.
오히려 강한윤은 달리스와 세베라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세베라가 오드웰 연합군으로 오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연인 관계가 되고 달리스가 꼬신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마탑에 비하면 꿇리는 조건이긴 하지만... 내가 퍼주면 되니까.'
마법에 관한 지원을 해주면, 연구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돈은 나가지 않는다.
그 외로 필요한 자금은 부대에서 재량껏 지원해줄 수도 있다.
"달리스. 오늘 저녁에 3중 마법 각인 가르쳐줄 거지?"
"작업이 끝난다면 당연하지."
"기대할게?"
기대한다는 게 다른 의미로 들리는데. 아니면 말고.
강한윤은 조용히 오두막 바깥으로 나왔다.
"베아트리스님!"
"강한윤. 볼일 끝났나 봐요?"
"네. 다들 손재주가 좋아서 스크롤에 불량품이 없네요. 안다이얄로 돌아가요."
"네에~ 그럴게요."
묘하게 기분이 좋아보이는 베아트리스와 함께 강한윤은 안다이얄로 향했다.
*
안다이얄에 도착한 베아트리스와 강한윤은 공터에 지어지고 있는 투석기를 바라보았다.
"뭐야."
투석기가 무슨 건물만 하다. 거기에 바퀴도 달려있다. 이게 대체 뭐지.
말도 안 되는 사이즈에 입을 떡 벌리고 있으니, 작업하던 드워프. 그림스위그가 바깥으로 나왔다.
"강한윤 대위! 이제 곧 있으면 완공 된다네! 다른 투석기들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그림스위그님. 이게 대체 뭡니까?"
"이동식 투석기라네! 이왕 만드는 거 이것저것 기능을 넣어봤다네!"
"여러 가지 기능이요?"
"분해 조립도 설명서대로 하면 쉽고 그냥 옮기기도 된다네! 마석으로 자동 재장전도 되고! 어떤가!"
강한윤은 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대체 왜 이런 걸 만든 거지.
평범한 투석기를 원했는데 이상한 기능이 탑재된 투석기가 완성되고 있었다.
'성능만 확실하면 된 거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무슨 기능이 있든 간에 투석기로서 작동만 하면 되는 거다.
"야. 이게 대체 뭐냐."
옆으로 다가온 에우제니아의 물음에 강한윤은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은 투석기라고 합니다."
"일단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석으로 작동하는 여러 기능을 넣어놨다는 데. 드워프들이 원래 이렇습니까?"
"나도 잘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
아무튼 그녀도 그렇다고 한다.
정찰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노아도 합류했다. 바쁘게 움직였는지, 목덜미에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다.
"강한윤. 이게 뭐야?"
"투석기래."
"투석기?"
"몰라 나도."
노아의 물음에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좋아! 다 됐네! 그럼 한 번 발사해보겠나!"
기다리다 보니 드디어 투석기가 완성되었다.
끼릭 끼릭 끼릭
마석이 빛나면서 투석기가 알아서 장전이 된다.
투석기 위로 쇠구슬을 올려놓은 뒤, 구멍을 찾았다.
그림스위그에게 부탁한 내용은 마석을 쇠구슬로 코팅하듯이 감싼 다음 적당한 구멍을 내달라는 것이었다.
동전 하나 정도 들어갈 정도의 구멍에 마법 스크롤을 집어넣고 마나를 주입했다.
구멍 사이로 마나가 깃들면서 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가속' 과 '반응 폭발' 의 문양이 빛나는 것이리라.
콰앙!
투석기에서 큰 소리가 나면서 쇠구슬이 저 멀리 날아간다.
날아간 쇠구슬은 가속이 붙은 채로 더 멀리 날아가고.
충격 반응으로 인해서 폭발할 터다.
"베아트리스! 이왕 온 김에 저 구슬이 어디까지 가는 지 정찰해 봐!"
"네에."
에우제니아의 명령에 베아트리스가 망원경을 꺼내서 공중으로 올라간다.
베아트리스의 도움을 받아서 영점조절을 할 필요가 있었다.
쿠구구궁
저 멀리서 폭발음이 들린다.
공중으로 날아갔던 베아트리스가 돌아오면서 소리쳤다.
"왼쪽으로 조금만!"
"왼쪽으로 10밀 조정!"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진짜 조금만!"
"오른쪽으로 5밀 조정!"
투석기의 영점이 하나하나 맞아 들어간다.
쿠구궁 쿠구구궁
10km는 족히 떨어져 있는 거점에서 쇠구슬이 폭발하며 소리를 낸다.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강한윤은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나폴레옹이 한 말을 떠올렸다.
'역시 신은 최강의 포병대를 가진 쪽에 서는 법이지'
***
안다이얄 거점을 공격하기엔 수비가 너무 유리한 지형이다.
어지간해서는 뚫을 수 없다는 걸 알고서 용병을 더욱 고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용병들은 던전이 있다는 소문에 홀려서 전부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용병왕 볼트는 행방불명.
북부의 마탑주인 세베라는 정찰 임무 도중 행방불명.
시체는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포로가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던전에 대한 소문도 상대 쪽에서 흘린 거겠지.'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내지 못한 것으로 보아, 상대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전력을 갉아먹는 카드가 여러 개 있다면, 불리한 것은 푸니아 거점이 된다.
'공격을 해야 한다. 저녁이나 새벽이다.'
이안 베르첼이 내린 판단이었다.
더 이상 질질 끌면 안 된다. 속전 속결로 싸워야 한다.
상대의 물자가 안다이얄 거점으로 모이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
다행히 이쪽은 총력전을 펼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게이브. 모든 기사와 병력들에게 전해라. 오늘 저녁에 안다이얄 거점으로 총 공격이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베르첼의 입이 미세한 근육경련으로 떨렸다.
'뭔가. 불길하다.'
상대의 물자가 꾸준히 움직임에도 조용하다는 것이 불안을 만들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 까. 내가 오드웰 연합군이라면.'
이안 베르첼은 의자에 앉아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럼에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기사들을 앞세워서 공격을 할 수 있는 푸니아를 공격할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오드웰 연합군은 병사와 기사의 병력이 많지 않아서, 총력전은 피하려고 하니까 말이다.
'그래. 상대는 최대한 수비적으로 행동할 거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이안 베르첼은
콰아아앙!
푸니아에서 들리는 폭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