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시간은 흐른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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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재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물자가 필요하다. 건축자재부터 시작하여 먹을거리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알트람 상회는 그 중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종류 중 일부를 팔고 있었는데, 이는 다른 상인들의 눈총이나 견제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다.
닉스는 그런 생리와 물자의 흐름을 상단과 함께 하며 직접 눈으로 보고 있었고, 그 외에 다른 모습들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폐허가 되었던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상인이나 노동자들이 모여들고, 사람이 모여들면 반드시 돈이 흐르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았다.
설령 돈을 주어야 하는 블루네일 왕실이나 귀족들, 또 이곳 사람들이 가난하다 하더라도.
“ 돈이 안 된다면 물자로 받아서 값을 치르는 경우도 빈번합니다. 특히 주머니에 여유가 없을 때에 그런 경향이 더더욱 짙어지곤 합니다. ”
“ 그런데도 굳이 여기로 상단을 이끌고 오신 이유가 뭔가요? ”
“ 허허. 상인이 상단을 이끌고 오는 이유가 별 다를 게 있을까요. 오로지 이윤을 얻기 위함일 뿐이지요. ”
지금 당장은 그리 큰 이윤이 남지 않고, 오히려 오고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손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윤을 얻기 위함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는 상단주를 보니, 닉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 어떤 이윤인가요? ”
“ 음. 어떤 이윤이라……. ”
본래 시간에 쫓길 때라면 이렇게 끈덕지게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해가 저문 지 오래인데다 어느 블루네일 마을의 여관 안이라 꺼리는 기색이 옅었다.
상단주는 그런 닉스가 대견하면서도 그 높은 신분 탓에 대하기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 사람이 사는 이상 영원히 폐허일 수는 없겠지요. 언젠간 이곳도 예전처럼 활기 있는 모습을 찾을 겁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윤이란 바로 거기에서 찾을 수 있겠죠. 물론 기대일 뿐이라 빗나갈 가능성도 없잖아 있습니다만… 투자라는 게 꼭 안전하지만은 않으니까요.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크게 손해 보는 것도 아니었으니 더 나쁠 것도 없다며, 상단주는 껄껄 웃었다.
그리고 닉스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상단주가 말하는 이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 약간 넋 나간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그 투자라는 게 뭘 말하는 거야? ”
“ 미래에 생길지 모를 거래처를 두고 하는 말이었겠지. 장사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을 믿음을 그 거래처와 쌓는 과정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상해? ”
“ 아니? 좀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게 괜찮은데. ”
잠시 후. 지온의 세 아이는 같은 방에 모여 닉스와 상단주가 나눴던 대화를 주제로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아버지를 둔 자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저택 사람들뿐이라고는 하나, 오랫동안 같은 저택에서 먹고 자랐기에 친밀감 있게 행동한다 한들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저택과 다르게 낯선 귀가 있다고는 하나 셋만 있는 사적인 공간에서 거리낌 없이 반말을 주고받을 정도로.
“ 너는 뭐 할 말 없어? ”
라케시스가 침대에 나란히 앉은 채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던 클로토의 어깨를 툭툭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감으며 한 마디 했다.
“ 어… 잘 됐네. ”
“ 얘는. 진짜 마법 말고는 관심이 없어서 문제야. ”
“ 그냥 클로토가 클로토 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
순간 라케시스는 닉스를 향해 네가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라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말로만 들었던 이브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쏙 빼닮았다면, 이 정도만 말해줘도 충분히 양호하기는 했기에.
“ …그래. 내가 말을 말자. ”
그렇게 누군가의 한숨 섞인 푸념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잠에 든 다음 날.
닉스는 다른 마을에 다다라서도 상단주 옆에 꼭 붙은 채 일을 배우던 중, 낯설되 낯설지 않은 일련의 무리를 멀찍이서 만나게 되었다.
“ 저 사람들도 상단인 것 같은데, 어느 상단인지 아시나요? ”
“ 음… 글쎄요. 이름 있는 상단이라면 그를 증명하는 문양이 있을 것이지만, 기회를 노리고 온 작은 규모의 상단이라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닉스의 옆에 나란히 서있던 상단주는 허허벌판과 비슷한 중앙 광장을 사이에 두고 멀어져가는 무리의 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규모가 작은 상단이나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었다면 결코 이렇게 비웃지 않았을 테지만, 그의 눈에 몹시 익숙한 문양이 보인 탓이다.
“ 문양을 보니 제국상회의 상단임이 분명해 보이는군요. 제국 내에서도 입지가 점점 좁아져 팔다리가 잘린 수준으로 규모가 줄었다더니, 이런 오지까지 온 모양입니다. 그 위세가 예전 같았으면 굳이 여기까지 올 리가 없으니까요. ”
“ 제국상단이요…? 혹시 제가 태어나기 전 치렀다고 하는 전쟁에서……. ”
“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제국이 전쟁을 일으켰을 시 적극적으로 물자를 지원했던 상단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 대상이 주전파라서 문제였지요. 현 제국 황제는 주전파의 반대 입장을 취했던 온건파니까요. ”
그래서 입장이 좁아지고, 현 황제도 썩 고깝게 보지를 않아 점점 입지가 좁아지다 저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까.
닉스는 상단주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그제야 저 낯선 이들에게서 익숙함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직접 본적이 없었다고는 하나 말만큼은 많이 들었기에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 그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을 힘이 남아 있기는 한 모양이네요. ”
“ 예. 예전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고는 하나 그 제국상회가 바로 망할 수는 없겠지요. 물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사실상 망한 것과 다름없다 생각은 합니다만…….”
“ 하지만 저렇게 살아있는 이상 언젠가 날개를 펼 가능성이 높겠죠. 저력이 있는 곳이니까요. ”
“ 물론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허업! ”
상단주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말하는 닉스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려다,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제국상단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는 시선과 그 우두머리를 바라보는 기색이 날카롭게 갈린 칼날 같아, 건드리면 베일 것 같다고 착각까지 한 탓이다.
공작님보다 배움이 느리고 아이 같은 면이 두드러지기에 마음을 놓아도 될까 싶었으나, 역시 크라우저 공작가의 핏줄이란 말인가.
상단주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던 헬레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숨을 죽였다.
기세에서 질적 차이가 난다고는 해도 그 본질적인 모습이 소름이 끼칠 만큼 꼭 닮아 있었던 탓이다.
“ 왜 그러세요? ”
“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
그러다 닉스가 전과 같이 아이 같은 눈빛을 띠며 묻자, 급히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놀란 건 놀란 것이고, 공작의 아이 앞에서 무례하다는 틈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급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닉스의 입술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온 탓에 그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 혹시 저들과 자리를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요? ”
“ 예, 예에…?! ”
“ 자리요. 기왕 같은 목적을 가지고 오지까지 와서 이렇게 만났는데, 한 번 인사라도 나누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해서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잖아요. ”
과거는 과거다. 듣기에는 좋지만 당해버린 입장에서 과연 그렇게 생각할 지가 의문이다.
설령 그것이 크라우저 공작가의 잘못이 아니라 스스로의 야욕에 따라 움직인 결과라 해도, 사람의 마음에 앙심이 피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애초에 분노라는 놈이 논리와는 크게 동떨어져 있는 것을.
“ 그, 그렇긴 합니다만……. ”
그러나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과 그를 말하는 아이의 신분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상단주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떠오르질 않았다.
하다못해 상대가 강성한 시절 그대로였다면 설득이라도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나, 그렇지도 않았다.
“ 그렇죠? 그러니 한 번 인사라도 나눠보고 싶어서요. 다만, 정 곤란하시면 어디에서 묵는지만 알아봐 주세요. 제가 직접 찾아 갈 테니까. ”
닉스는 그런 상단주의 심정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지를 주며 방긋 웃었다.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절대 그렇지 않음을 상단주는 알았다.
잘 알았기에 저 웃는 얼굴 뒤에 감춰진 의도가 훤히 보이는 듯 했고, 그래서 두렵기 짝이 없었다.
“ …알겠습니다. ”
그러니 더 이상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한 채 얌전히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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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넌 간도 크다. ”
상단주가 제국상회가 머무르는 여관과 대략적인 일정 정보까지 물어 온 그날 밤.
원형 테이블을 두고 둘러앉아 이야기하던 세 아이 중, 라케시스가 전후사정을 듣고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워했다.
지금까지는 말 잘 듣고 적당히 머리 돌아가는 아이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가끔 이럴 때 마다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 낯설기까지 했다.
“ 간이 커? 내가? 왜? ”
“ 지나가는 얘기로만 듣던 제국상회가 나타났다고 덥석 만나보겠다는 게 간이 큰 거지. 거기다 점점 기울어만 가는 상회라고 하는데. ”
“ 기울어져 간다고 해서 완전히 기울어진 건 아니잖아. 거기다 그냥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을 뿐인걸. ”
“ 그냥 얼굴만 봐? 상대가 널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겠어? 그냥 서로 안면이나 트자고? ”
말도 안 되는 소리. 라케시스는 닉스의 눈치만 보고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음은 물론, 상대도 결코 그러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또, 가슴에 불을 지르면 그걸 명분으로 삼아 완전히 짓밟으려 한다는 꿍꿍이가 있음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다를지언정 같은 아버지의 씨앗을 받아 태어나고, 같은 집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느끼는 무언가 때문에.
“ 그래. 나도 라케시스랑 같은 생각이야. ”
관심은 없을지언정 이런 부류의 대화에 끼지 못할 만큼 지식이 없지도 않았기에, 클로토도 한 팔 거들고 나섰다.
닉스가 나서게 되면 결국 자기도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했기에, 최대한 나서지 않는 상황을 마련하고 싶었다.
골치 아픈 일이 생겨 바깥에서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 저택에서 연구할 시간이 점점 멀어지게 되니까.
“ 너까지? ”
정작 닉스는 그런 생각을 모르기에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 얼얼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클로토는 조금도 신경쓰는 기색 하나 없이 입을 열었다.
“ 그래. 나까지. 애초에 이번 상행에 따라온 목적이 뭐야? 상단이 하는 일을 직접 보고 작게나마 체험하고 싶다는 거잖아. 그런데 네가 하려는 일은 그런 거랑 아무 상관이 없잖아. 더구나 그럴 경우 위험해 질 가능성은 생각 안 해? ”
닉스가 위험해지면 자연스럽게 상단주 또한 책임을 지게 될 텐데, 그랬다가는 여러 사람 목 날리는 꼴과 같다.
클로토는 최대한 정을 강조하면서도 덤덤하기 짝이 없는 투를 사용했다. 마치 그것이 개인적 감정을 완전히 빼고 이야기하는 진실인 것 마냥.
그래서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고 닉스는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결심을 꺾을 의지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입술을 뗐다.
“ 네 말이 맞아. 그런데 제국상회가 알트람 상회가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 어…? ”
“ 가세도 기울어가는데, 그 쐐기를 박았다고 할 수 있을 어머니, 그리고 그 공작가를 가만히 내버려 둘까? 오히려 평소에도 독기를 품고 다시 상회를 일으켜, 어떻게든 복수할 생각을 하지 않을까? 지금 안 된다면 나중에라도 말이야. ”
“ 어… 그럴 수도 있겠지? ”
닉스가 워낙 확신을 갖고 이야기하는 탓인지, 클로토도 눈을 끔뻑이며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라케시스마저 이게 맞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 더 말할 것이 없었다.
“ 그러면 후대에 우리 공작가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잖아. 더구나 현 황제가 우리 왕국에 우호적이라 하더라도, 그 생각이 계속 가지 않을 거고. ”
“ 후대까지 걱정하는 건 너무 이상한 거 아냐?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영원한 왕국도, 영원한 귀족도 없잖아. ”
“ 그건 맞지. 나라나 가문이나 차면 기울기 마련이니까. ”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 대에서 그 꼴을 보고 싶지는 않고, 그 위협이 될 만한 싹을 두고 보지도 않겠다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 정원에 보이는 벌레는 퍼지기 전에 골라잡아야 하고, 불씨는 크게 번져 파도가 되기 전에 꺼버려야 피해가 적은 법이야. 안 그래? ”
“ 그건… 맞는 말이지. 아무래도 골치 아픈 일이 덩치가 커지면 대하기 곤란하니까. ”
그러다보니 라케시스도 공감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시작했다. 바깥을 돌며 보고 겪은 일이 제법 많았던 탓이다.
“ 그래. 그러니까 미리 싹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말이 있기는 한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용서할 때와 사람은 가려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니까. ”
“ 그래서… 어떻게든 상대를 약올려서 틈을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
“ 응. 이렇게 다가온 것만 봐도 절대 그냥 넘기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 아닐까? 제국에서도, 왕국에서도 먼 외지에서 우연히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
이제는 제 편안한대로 신의 뜻까지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지만, 안전만 갖고 설득하기엔 너무 부족하다.
클로토는 결국 닉스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이며, 거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짧게 한숨 쉬었다.
이럴 때 보면 말로만 들었던 헬레나의 모습과 꼭 닮은 것만 같아서, 도저히 말릴 엄두가 나질 않기도 했다.
“ …그래. 네 맘대로 해. ”
결국 클로토가 못 이기겠다는 듯 백기를 들자, 닉스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었다.
“ 어휴… 니 똥 굵다. ”
휘말리는 입장에서 불평 한 마디 정도는 해야겠다 싶었는지, 가만히 지켜보던 라케시스가 눈을 흘기며 닉스에게 한 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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